• [CEO 걷기 프로젝트] 당신의 불혹은 안녕하십니까 전라남도 강진 다산오솔길

    입력 : 2014.02.28 16:33:15

  • 사진설명
    “대학 졸업식 앞두고 단골 술집에 모여 어찌나 떠들면서 퍼마셨는지… 다른 건 기억나지 않는데, 10년 후에 마누라랑 애들하고 같이 모이자던 말은 기억이 나데요. 그게 무슨 거창한 약속도 아닌데, 그 땐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더라고. 그런데 그게 힘들었어요. 수화기 들고 번호만 누르면 되는데, 그 때 모인 열댓 명 중 먼저 말 꺼내는 놈이 없는 거야. 한 15년 쯤 흐르고 나니 하나 둘 그 때 얘기를 하더군요. 마흔 너머 돌아보니 이제 외롭다나 뭐라나….” 헛웃음 한 번에 한숨이 서너 번, 맛있다 연발하며 젓가락질 요란하던 돼지불백이 뒤로 밀렸다. 서로 먼 산 바라보다 시킨 소주는 같은 잔이건만 비울수록 맛이 다르다. 날라 다녔다는 대학시절의 한 잔은 달디 단 끝맛이 혀끝을 녹이더니, 이리저리 툭툭 밀리는 사회생활을 입에 올리자 떫고 쓴맛에 온몸이 찌릿했다.

    “안형, 당신보다 서너 살 많은 내가 충고하는데, 사회생활 바쁘단 핑계로 친구들이랑 연락 끊어지면 마흔 넘어 외롭다니까. 나나 내 친구들 보라고. 30대에 뭐 빠지게 일해서 40대 중반에 직급은 부장 이상으로 높아졌는데, 마음 편하게 터놓고 지낼 이들이 없어요. 그렇다고 하루 종일 가족과 붙어 있을 수도 없고… 아무리 연봉이 높으면 뭐해. 혀에 착 감기는 술이 있어도 같이 마실 사람이 없는 걸. 쓰디 쓴 소주 한 잔이라도 주거니 받거니 해야 맛을 알거 아뇨.”

    20대 후반에 대학을 마치고 지금의 회사에 입사한 지 십수 년…. 죽을 똥 살 똥, 꼭 살아야 한다며 기를 쓰고 달려온 K부장은 올 초 초상집에서 대학친구들을 만났다. 졸업 후 가장 많은 동기들이 모인 자리의 주인공은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젠 살만 하다던 사업가 친구였다. 그 살만한 게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없었는데, 급성심근경색으로 먼 길 떠난 그 친구의 장례식장은 개중 가장 넓고 쾌적했다.

    “다들 모여서 죽을상을 하고 앉았는데, 그 놈은 병풍 뒤에 누워있더라고. 그렇게 제수씨랑 그 놈 아들 대면하는데 뭐라 할 말이 있어야지. 그 친구 덕분인지… 이제 친구들끼리 가끔 연락도 하고 얼굴도 봐요. 허허”

    다시 헛웃음 한 번에 한숨이 한 번, 탁 털어 넣은 소주 맛은 쓰다 못해 달았다.

    강진만이 한 눈에 들어오는 천일각
    강진만이 한 눈에 들어오는 천일각
    앞은 바다요 뒤는 산이라… 멀다. 이렇게 먼 줄 알았으면 식당부터 숙박까지 꼼꼼히 챙겼어야 했는데 아뿔싸, 이미 늦었다. 서울에서 전라남도 강진까지 자동차로 대여섯 시간. 어차피 1박2일 코스라 생각하고 오후 서너 시 쯤 느긋하게 출발했는데 해가 지평선을 넘으니 몸은 천근만근이요, 사고가 났는지 답답한 도로는 얹힌 속보다 체증이 심했다. 우여곡절 겪으며 숙소에 도착한 시간은 밤 10시. ‘문화체육관광부와 한국관광공사가 지정한 우수숙박시설 굿 스테이(Good Stay)’란 간판이 큼직한 숙소에 들어서니 노곤한 몸이 땅으로 꺼지는 것 같다.

    다음 날 아침, (왜 굿 스테이라 지정했는지 의아한) 숙소를 나섰더니 이게 웬걸, 예보에도 없던 눈에 수북하다. 이른 봄빛 담으려던 카메라 앵글엔 어쩔 수 없이 늦겨울 아쉬움만 그득하다. 그렇게 다산오솔길이 시작되는 다산유물전시관 앞에 도착했다.

    편안할 강(康)에 나루 진(津)을 쓰는 강진(康津)은 기름진 평야와 강진만(灣)이 어우러진 풍요로운 곳이다. 그 중심부의 만덕산(萬德山·408m) 자락을 타고 넘는 다산오솔길은 말 그대로 앞은 바다요, 뒤는 산이다. 그만큼 오롯한 길을 휘감은 경치가 수려하고 깊다. 예부터 야생 차밭이 많아 다산(茶山)이라 불렸는데, 덕분에 18년간 이곳에 유배된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1762∼1836)의 호도 자연스레 다산이 됐다고 한다. 그러니 다산오솔길은 정약용의 길이다. 실제로 산 중턱엔 그가 10년간 기거하던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자리했다.

    그는 마음을 다스리며 친구를 만나기 위해 이 길을 걸었다고 한다. 외롭고 고통스런 유배의 나날을 함께 한 이는 백련사의 학승 혜장(1772~1811) 스님이다. 유학에 식견이 높았던 혜장이 정약용의 학문에 감탄해 배움을 청했고, 정약용 역시 혜장의 학식에 놀라 그를 선비로 대했다. 그래서 이 길은 친구를 찾아가는 설렘의 길이다. 직접 만나는 것 외엔 도리가 없던 시대의 광대역이자 LTE-A쯤 되는….

    만덕산 중턱에 자리한 다산초당
    만덕산 중턱에 자리한 다산초당
    마흔 이후, 그 즈음 걷는 길 입장료가 없는 다산유물전시관엔 정약용의 업적과 유물, 생생한 필체가 담긴 편지들이 전시돼 있다. 전시관 뒤쪽으로 난 길을 따라 100m 쯤 오르면 하늘로 곧게 뻗은 두충나무숲이 이채롭다. 그 숲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나가면 한옥으로 멋을 낸 민박과 식당, 찻집이 오밀조밀하다. 귤동마을이라 이름 붙인 이곳은 모든 집이 다산으로 시작해 정약용으로 끝난다. 그 중심에 자리한 찻집에선 전 강진군수가 직접 차를 우려낸다. 다산이야기는 저절로 따라온다.

    마을의 허리춤으로 난 길을 300~400m쯤 오르다보면 다산초당에 이른다. 생각보다 가파른 길은 그 모양이 천차만별이다. 돌계단을 오르는가 싶으면 무성한 대나무 숲이 하늘을 가려 섰고, 발걸음이 더디다 싶으면 고스란히 드러난 소나무 뿌리가 서로 뒤엉켜 길을 이루고 있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뿌리가 가는 이의 발걸음을 붙잡고 숨을 고르게 한다. 마치 왜 그리 일삼아 걷느냐며 나무라는 것 같다.

    잠시 초당 마루에 앉아 바라 본 숲은 눈이 시리게 푸르다. 내리는 눈에 허옇게 바랬다지만 본래 잎새의 색이 진하고 도드라졌다. 잠시 머무는 이에겐 이처럼 더없는 쉼터지만 10여 년을 머문 이에겐 도대체 어떤 공간이었을까.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던 정약용이 천주교 대탄압인 신유사화(1801년)에 연루돼 대역죄인이 된 건 그의 나이 마흔의 일이었다. 이 일로 셋째형 정약종과 조카사위 황사용, 매형 이승훈이 처형됐고 둘째형 정약전은 흑산도에, 정약용은 이곳 강진에 유배된다. 그야말로 풍비박산난 가문은 어찌 수습할 도리가 없었다. 남들은 인생의 전성기라는 마흔 살에 홀로 귀양살이라니. 그 절망이 어찌나 무겁고 무서웠는지 그 또한 석 달간 강진 읍내 주막에서 옷도 갈아입지 않고 두문불출했다고 한다. 외가 쪽 친척인 해남 윤씨의 도움을 받아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긴 건 유배된 지 8년째 되던 1808년 봄의 일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 500여 권의 저술을 남기고 18명의 제자를 키워낸다. 오로지 책 읽고 글 쓰는 데 온 공력을 바친 것이다. 지금은 기와를 얹혔지만 초당 옆 아담한 연못은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형태가 고스란히 남아있다. 연못 옆으로 난 길을 따라 50여 미터를 오르니 갑자기 시야가 탁 트였다. 이곳이 천일각이다. 강진만의 너른 바다와 그 너머 장흥의 천관산이 한 눈에 보여 마치 숲에 갇힌 다산초당이 세상과 소통하는 창과 같았다.

    (위)통일신라시대 말기인 839년, 무염스님이 창건한 백련사 전경, (아래)백련사 동백꽃
    (위)통일신라시대 말기인 839년, 무염스님이 창건한 백련사 전경, (아래)백련사 동백꽃
    붉은 빛 동백꽃이 한 가득… 천일각 뒤로 난 길은 오르막과 내리막, 다시 오르막이 반복된다. 굴곡은 적지만 작은 고개에 이르면 제법 가파르다. 나뭇가지 사이로 백련사가 아련하면 다산오솔길의 마지막 내리막이 시작된다. 이 길은 아름드리 동백나무숲이 빼곡하다.

    덕분에 3월이면 맑고 붉은 기운이 사찰 주변을 휘감는다. 3월 말이면 빨간 꽃송이가 절정을 이루며 노란 꽃술을 수줍게 머금고, 4월이면 몽우리 째 떨어진 동백꽃이 붉은 꽃길을 낸다.

    지금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약 5만2000㎡의 동백나무숲(1500여 그루)은 200여 년 전, 정약용과 혜장이 세상사를 논하며 토론하던 학문의 장이요 우정의 공간이었다.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를 완성한 1818년, 유배생활을 마치고 강진을 나섰다. 하지만 혜장은 그를 배웅하지 못했다. 7년 전인 1811년 이름 모를 병에 유명을 달리했던 것이다. 그때 그의 나이가 마흔이었다.천년고찰 백련사는 앞마당에 차를 재배해 고즈넉한 분위기에 정감을 더했다. 다산유물전시관에서 출발해 느긋한 걸음으로 두 시간 남짓… 시계 바늘이 12시를 넘어서자 오가던 스님들이 당연하다는 듯 물어온다. 그 어감이 차분해 마치 혜장이 다산에게 권하는 듯 했다. “준비한 찬은 없지만 공양은 드셔야 합니다.”

    [안재형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2호(2014년 03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매일경제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