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EO 걷기 프로젝트] 순백의 기상 담긴 자작나무 그리고 작심일년

    입력 : 2014.01.06 09:54:02

  • 사진설명
    “좀 특별한 새해맞이 이벤트 없을까” 뜬금없지만 왠지 솔깃한 제안에 송년회 분위기가 새해로 넘어갔다. 뭔가 건질 게 있을까 담금질하던 술꾼들이 그만 됐다며 손사래 친 건, 해맞이 장소로 ‘강원도 낙산해수욕장이 최고’네 ‘정동진이 제일이네’ 란 말이 나왔을 무렵이다.

    “웬 강원도 해맞이? 설레는 맘 안고 31일에 강원도로 떠나면 족히 10시간은 꼼짝없이 차에 갇혀 있어야 하거든. 고속도로나 국도나 별반 차이가 없어. 그렇게 도착해서 해맞이 하러 나서면 채 10분도 버티고 서있기 힘들어. 바닷바람이 얼마나 쓰리고 아린지 난로를 껴안고 있어도 덜덜 떨린다. 올라올 땐 또 어떻고. 다시 10시간은 족히 차에 갇혀 있어야 해. 그런데 그 짓을 한다고? 너 마누라 말고 애인 생겼냐?” 40대 중반에 부쩍 주말 산행이 잦아진 선배가 뭣도 모르면 나서지도 말라고 타박이다. 테이블 모서리에서 이 논리 정연한 이야기를 조용히 듣고 있던 여선배가 타박에 타박을 더했다. “넌 그 짓이 추억이란 걸 왜 모르니. 그걸 모르니 마흔 넘어 혼자 산에 가는 거야. 아무리 좋아도 혼자가 둘보다 좋을라고. 외로움을 즐긴다고? 그걸 왜 즐겨? 나 같으면 혼자 산에 가느니 10시간, 20시간 가족이랑 차에 갇혀 있겠다”

    그 순간 강원도 인제가 떠오른 건 오로지 풍경 때문이다. 이름하야 비경(秘境) 속에서 맞는 새해가 뭔가 특별할 것만 같았다. 1월 1일이 아니면 어떤가. 혼자보다 둘, 둘보다 셋이 나서는 산행에 작심일년까지 챙겨 가면 이보다 좋을 게 없을 것만 같았다. 머리와 가슴이 통하자 몸이 동했다. 평일 오전, 서울에서 인제는 고작 2시간 반이면 족했다.

    굽이굽이 펼쳐진 설경, 태백산맥이 한 눈에 설악을 품은 인제는 볼거리가 지천이다. 그 중 설악산 대청봉(1경), 대암산용늪(2경), 장수대 대승폭포(3경), 12선녀탕(4경), 내린천(5경), 방동약수(6경), 백담사(7경), 합강정(8경) 등이 인제 8경으로 꼽힌다. 귀에 익은 지명을 뒤로 하고 굳이 원대리로 방향을 정한 건 어감도 정겨운 ‘속삭이는 자작나무숲’ 때문이다.

    하얀 나무껍질이 이국적인 자작나무는 추위에 강해 강원 산간 지역에 많이 분포돼 있다. 아름드리라기엔 한참 부족해 목재로서 제 구실을 할까 싶지만 강도가 좋고 잘 썩지 않아 쓰임이 다양하다. 원대리 자작나무숲은 봄가을, 특히 가을 단풍이 유명해 사진가들 사이에선 이미 이름난 포인트다. 가을이면 노랗게 물들며 신세계를 연출하는 자작나무숲이 겨울엔 어떤 모습일까.

    원대산림감시초소에 산행자의 인적사항을 적고 시선을 멀리 두니 수북하게 쌓인 눈에 눈이 시리다. 발걸음을 옮기자 두꺼운 등산화를 가슴으로 안아 폭삭 가라앉은 길 언저리 눈밭의 깊이가 족히 15㎝는 돼 보였다.

    길을 나서니 적막강산에 뽀드득 소리가 요란하다. 원대봉(684m)의 경사가 완만한 곳에 자리한 숲까지 약 30°의 경사진 눈길이 굽이굽이 3.2㎞. 초소 근무자는 족히 40분이면 닿는 거리라 했지만 뒤뚱이는 걸음걸이는 시작부터 시간을 놓았다.

    숲을 찾아 오르는 길이지만 이미 숲은 시작됐다. 간간이 자작나무가 숨은 곳에 소나무와 박달나무가 온 몸으로 눈을 버티고 섰다. 적설량이 얼마나 됐는지, 나무 옆 전봇대의 원기둥 모서리에도 눈이 소복하다. 살짝 휜 전깃줄에도 어김없이 눈은 쌓여 있다. 바람이 심한 골짜기에 뿌리 내린 자작나무는 허리가 휘어질 대로 휘어져 제대로 아치를 그렸다.

    사진설명
    눈 시린 눈밭에 펼쳐진 70만 그루의 자작나무 보폭을 좁혀 종종걸음으로 산에 오르면 ‘속삭이는 자작나무숲’이라 적힌 표지판 아래로 자작나무가 그득하다. 하늘로 30m 넘게 뻗은 자태가 쪽 고르다. 당연히 자연적으로 생긴 숲이겠거니 싶지만 사실 이곳은 인공수림이다. 한국전쟁 당시 치열했던 강원도 고지에 1970년대부터 산림청이 자작나무를 심기 시작했고, 원대리에는 1990년대부터 식재가 진행됐다. 자리잡은 자작나무만 어림잡아 70만 그루. 4~5년 전부터 인제 지역 아이들에게 숲유치원으로 개방됐던 숲은 2012년 10월, 25㏊넓이에 자작나무 코스, 치유코스, 탐험코스 등 3개의 탐방로를 만들어 자작나무숲으로 공식 개장했다.산책로로 이어지는 계단을 따라 언덕 아래로 내려서면 지형 탓인지 소리가 또렷해진다. 쌓인 눈이 소리의 울림을 조율하는 것일까. 발 없는 말 천리 간다는 속담, 제대로 경험할 수 있다. 문득 황지우 시인의 <겨울산>이 떠올랐다. 너도 견디고 있구나

    어차피 우리도 이 세상에 세들어 살고 있으므로

    고통은 말하자면 월세 같은 것인데

    사실은 이 세상에 기회주의자들이 더 많이 괴로워하지

    사색이 많으니까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
    찾아가는 길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 자작나무숲 서울을 벗어나 춘천 고속도로 말미에 동홍천IC를 나서면 44번 국도가 오롯하다. 인제 방면으로 가다 남전교 근방에서 우회전해 길을 나서면 인제종합장묘센터 표지판이 커다랗게 섰다. 5분정도 직진하면 원대산림감시초소가 보인다. 주차장이랄 것도 없어 갓길에 차가 늘어섰다. 내비게이션으로 찾으려면 강원도 인제군 인제읍 원대리 763-4로 입력해야 한다. 자작나무 숲으로 향하는 길은 굽이굽이 산길이다. 눈이 소복해 걷기 힘든 길이지만 타이어 자국이 선명하다. 산 너머 펜션을 예약한 이들은 사륜구동에 한하여 통행이 가능하다.

    북부지방산림청 인제국유림관리소 (033)460-8036

    [안재형 기자 사진 정기택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0호(2014년 0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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