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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멸의 명곡 ‘사계’ 빨간머리 사제 비발디
입력 : 2014.01.06 09:3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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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가 연주하는 비발디의 ‘사계’. <사진제공=크레디아>
“얼음 위를 천천히 걷는다/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하며/힘차게 걸어 보았지만 순식간에 미끄러져 넘어졌다/일어나서 다시 얼음 위를 힘차게 걸어 보았지만/또 다시 넘어져 얼음이 깨졌다/닫아진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면/바람이 제멋대로 휘젓고 다니는 소리를 듣는다/이것이 겨울이다. 하지만 즐겁지 않은가.”(3악장 소네트)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32분음표가 겨울바람처럼 몰아친다. 그런 자연에 맞서려고 하다가 다시 순응하는 인간의 모습이 느껴진다. 사계절과 어우러져 살아가는 인생을 그린 작품이 바로 ‘사계’다. 생기 넘치는 자연의 풍경이 기운을 북돋아준다. 소네트는 봄을 “샘물은 산들바람에 유혹 당해 졸졸 흐르는 소리를 달콤하게 낸다” “꽃에 파묻힌 화창한 목장에는 나무들의 푸른 잎이 정답게 속삭이고 개 옆에는 염소치기가 잠들다”로 묘사한다. 연속되는 16분음표가 시냇물이 흐르는 모습을 청명하게 표현한다.
여름의 소네트는 “불타는 태양의 계절에는 사람도 지치고 개도 지치고 소나무도 시든다. 그러나 뻐꾸기는 울기 시작하고 호도새와 오색방울새의 노래가 들린다”고 표현해 더위를 잊게 만들었다.
가을은 추수의 계절이다. “마을 사람들은 춤과 노래로 풍년을 축하하고 술은 축제를 열광케 하네. 향연 뒤의 포근한 잠”이라는 소네트로 풍요를 읊는다.
바이올린의 교과서로 추앙받아 인간이 숨 쉬는 자연을 아름답고 싱그럽게 연주하기 때문에 ‘사계’는 가장 사랑받는 클래식 음악에 꼽힌다. 듣고 있으면 기분 전환이 되기에 피곤한 출퇴근길 지하철에서 자주 흐르는 음악이다. 백화점에서도 쇼핑 손님들을 위해 가장 많이 선택하며 휴대폰 벨소리로 애용된다. 록과 크로스오버 등 다른 장르 음악가들이 즐겨 연주할 정도로 대중적인 곡이기도 하다.
수많은 대가들에게도 영감을 줬다. 2001년 이 곡을 녹음한 바이올리니스트 정경화 씨는 “계절마다 차이가 뚜렷한 시골 정경을 담은 ‘사계’를 연주할 때마다 고향과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고 말했다.
그는 ‘봄’을 이렇게 설명한다. “제1악장의 바이올린 독주는 활기찬 기운과 함께 들판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연상시킵니다. 그리고 새의 지저귐이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독주 바이올린으로, 두 대의 바이올린이 합쳐져 세 마리의 새가 나무 위에서 지저귑니다. 봄에는 화창한 모습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바이올린 선율이 어둡고 거칠어지면 먹구름과 폭풍우가 몰려옵니다. 천둥과 비는 평화로운 정경을 순식간에 망쳐버립니다. 그러나 비는 곧 그치고 다시 새들이 즐겁게 노래합니다.” 1723년 작곡된 ‘사계’는 비발디의 협주곡 450곡 중 가장 유명하다. 이 곡은 원래 12개 작품이 수록된 악보집 ‘화성과 창의의 시도’ 일부분으로 출판됐으나 사계절을 묘사한 첫 네 곡이 자주 연주되면서 훗날 ‘사계’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은 각 3악장으로 구성됐으며 빠른 악장들 사이에 느린 악장이 하나씩 끼어져 있다.
그렇다면 소네트는 누가 썼을까. 아직까지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다만 시구에 베니스 방언이 나오고 비발디의 편지에 자주 나타나는 베니스식 철자법을 사용해 비발디가 이 시를 직접 지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추측할 뿐이다.
비발디는 바로크 협주곡 분야 최고 작곡가였다. 협주곡 형식을 확립하고 3악장(빠르게-느리게-빠르게)을 정착시켰다. 또 모든 악기가 함께 연주하는 투티와 솔로 파트를 구분해 독주자가 기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 그의 바이올린 작품은 바이올리니스트의 교과서로 불린다. 초보자들이 반드시 익혀야 할 기교들을 총망라했기 때문이다. ‘사계’에서도 현란한 바이올린 기교를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열정적인 바이올린 선율은 마치 오페라의 프리마돈나처럼 화려하다. 당대 최고 바이올리니스트였던 비발디는 이 곡에서 처음으로 크레센도(점점 세게)와 데크레센도(점점 여리게)를 사용해 바이올린 주법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깊고 중후한 맛은 떨어지고 자기 복제가 심하다는 비판도 있다.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비발디가 똑같은 작품을 400곡이나 썼다’고 혹평했을 정도로 화음 변화가 거의 없다. 하지만 첼리스트 장한나 씨는 “같은 리듬이 계속 반복되는데 어느 음을 중요하게 여기냐에 따라 곡이 확확 변한다”고 비발디를 옹호했다.
고아들에게 바이올린 가르친 빨간 머리 사제 작곡한 지 290년이 지난 ‘사계’가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으니 비발디는 놀라운 재능을 가진 천재 음악가다. 혹시 신의 계시를 받고 만들어 수백 년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공교롭게도 그는 사제였다. ‘빨간 머리 신부’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아버지 조반니 밥티스타는 베네치아 성 마르코 대성당의 바이올리니스트였다. 그는 아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고 자신을 대신해 성당 연주에 참여시켰다.
비발디는 15세가 되던 1693년 성직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703년 사제로 임명됐지만 천식으로 미사곡을 부를 수 없었다. 그래서 피에타 병원 부속 음악원 바이올린 교사로 자리를 옮겨 40년 동안 일했다. 환자나 고아들이 머물던 곳이지만 음악 학교로 이름을 날리게 됐다. 이 곳 아이들은 흰옷을 입고 천사처럼 노래했다. 바이올린과 플루트, 오보에, 파곳 등 다양한 악기를 연주했다. 음악회 때는 석류나무 꽃다발을 꽂은 젊은 수녀가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이 학교 재직 시절 작곡한 협주곡집 ‘조화의 영감’ 작품 3과 ‘라 스트라바간차’ 작품 4 등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출판됐다. 유명세를 얻게 된 그는 오페라 작곡에 전념했다. 1713~1718년 베네치아에서 오페라 10개 작품을 공연했다.
그는 오페라 공연 쉬는 시간에 무대에 올라가 바이올린 독주를 들려줬다. 그 연주에 놀란 독일 귀족 우펜바흐는 “비발디의 손가락은 한 치 오차도 없이 정확한 위치를 짚었으며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연주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서울 충무아트홀에서 공연된 비발디의 오페라 ‘유디트의 승리’. <사진제공=충무아트홀>
이 작품은 적장의 목을 베서 민족을 구한 이스라엘 여성 영웅 유디트의 이야기다. 아시리아 군대의 침입을 받은 베툴리아 지방의 미망인 유디트는 자신의 정조까지 희생하며 적장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고 죽인다. 피치는 종교음악이라 배제된 성적 요소(에로티즘)를 살렸다. 뇌쇄적인 표정의 여인이 남자의 잘린 머리를 들고 있는 클림트의 그림 ‘유디트’처럼 생동감 있는 무대를 연출했다. 영적인 노래라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오페라지만 피치는 특유의 감각으로 관능미를 살려냈다. 그는 1716년 베네치아에서 ‘유디트의 승리’를 초연했을 당시 전례 미사를 재현했다. 종교적 건축양식 기초인 나선형 대리석 기둥 4개, 큰 제단, 다양한 난간과 통로들을 만들었다.
이 작품의 또 다른 특징은 여자 가수 5명이 남성 역할까지 맡아 살벌한 노래 대결을 벌였다는 것. 피에타 병원 부속 음악원 교사로 재직할 때 고아원 소녀들을 데리고 연주했던 비발디는 모든 배역을 여성 음역으로 작곡했다.
서울 무대에서 유디트 역은 이탈리아 메조소프라노 티치아나 카라로, 홀로페르네스 장군 역은 메조소프라노 메리 엘렌 네시, 홀로페르네스 시종 바고아 역은 소프라노 지아친타 니코트라, 유디트의 하녀 아브라는 소프라노 로베르타 칸지안, 베툴리아 지도자 우치야는 메조소프라노 알렉산드라 비젠틴이 맡았다. 반주는 조반니 바티스타 리곤이 지휘하는 바로크 실내악단 ‘카메라타 안티콰’가 담당했다. 오페라로 큰 명성을 얻은 비발디는 이탈리아 만토바의 헤셀다르슈타트 영주 필립공의 궁정악장이 됐다. 12곡으로 이뤄진 협주곡집 ‘라 체트라’를 카를 6세 황제에게 헌정하고 상금과 훈장, 작위를 받았다. 명예도 얻었고 돈벌이에도 신경을 쓴 것 같다. 1733년 값이 더 비싼 자필 악보의 거래에 방해된다는 이유로 더 이상 출판을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런데도 그의 말년은 쓸쓸했다. 마지막으로 눈을 감은 곳도 고향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빈이었다. 1741년 빈의 빈민묘지에 안장됐다. 어쩌면 베네치아 청중이 그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아 훌쩍 떠났을 지도 모른다. 제자인 메조 소프라노 안나 지로와 염문을 뿌리고, 그녀의 여동생 파울리네와 세 명이 동거하는 바람에 평판이 나빠져 베네치아를 떠났다는 추문도 있었다.
그래도 그는 ‘음악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바흐가 가장 존경한 작곡가였다. 바흐는 비발디의 음악을 교전(敎典)으로 여겼으며 편곡까지 했다.
[전지현 매일경제 문화부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0호(2014년 0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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