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자 골퍼들의 중2병
입력 : 2013.08.09 16:56:58
-
수사가 진행되며 B가 밝힌 사건의 전말은 어이가 없을 정도다. A와 하룻밤을 보낼 수 있는지에 대해 친구들과 오리백숙 저녁내기를 했다는 것이다. 소송은 지난 6월 500만원의 합의로 마무리됐다. 결국 B는 500만원짜리 오리백숙을 먹은 셈이다. 회원권 처분은 당연한 절차였다. B의 저질스러운 자질이 가장 큰 문제였지만 발단은 친구들 앞에서 부린 허세였다.
남자들은 허세를 부린다. 실제보다 크게 부풀리고 다른 모습으로 포장하는 것을 즐긴다. 수컷들의 주된 허세 분야는 신체적인 능력과 관련된 것들이다. 거기엔 ‘성적 능력’도 포함된다.
골프 커뮤니티에선 가끔 캐디와의 하룻밤에 대한 무용담이 올라온다. 라운드 도중 자신의 섹스어필에 감복한 여성 캐디가 (상당히 아름다운) 만남을 제의했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소설 수준이다. 캐디가 2차 서비스를 제공하는 골프장이 어디인지 묻는 골퍼들도 상당하다.
현재 경기도 부근 퍼블릭 코스에서 근무 중인 15년차 베테랑 캐디는 답한다. “20~30년 전엔 기업체 임원들이나 정치인들과 강압적으로 술자리가 마련되기도 했다고 들었어요. 그것도 일부 사례고 요샌 말도 안 되는 이야기죠.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골프 커뮤니티 오프라인 모임에 여성 골퍼 비율이 압도적으로 적은 이유는 왜일까? 골프 인구 비율도 문제겠지만 오프라인 모임에서 벌이는 수컷들의 허세 퍼레이드도 단단히 한몫을 한다.
20대 후반 여성 골퍼인 C는 최근까지 활동했던 인터넷 골프 커뮤니티를 탈퇴했다.
“오프라인 모임에 몇 번 참가했다가 질색했어요. 친절한 것까지는 좋지만 과한 참견으로 제대로 스윙 한 번 못하고 라운드를 마쳤어요. 뒤풀이 술자리에선 10명의 남자들이 2시간 가까이 내가 잘났다고 떠들어대는데 정말 못 봐주겠더라고요.”
구애든 호의든 남성들은 이성에 대한 호감의 표시로 허풍을 떤다. ‘프로 데뷔 권유를 수차례 들은 스윙이다’부터 ‘○○골프장에서 내 이름을 대면 만사형통’, ‘이번에 우승한 ○○선수가 나랑 형동생 하는 사이다’까지 허세의 종류도 다양하다.
문제는 이러한 허세의 의도가 어찌됐든 호감을 얻는 데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연습장에서도 비슷한 사례는 여럿 있다. 골프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여성 골퍼가 연습을 하고 있으면 남성 골퍼들의 원치 않는 어드바이스가 줄을 잇는다. 방식도 ‘한참을 지켜봤는데…’ ‘이런 말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가 잘 알아서 그러는데…’ 등 다양하지만 결론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성 골퍼들의 항의로 일부 연습장에선 여성 전용층을 운영하기도 한다.
현대 골프 이론을 완성했다는 평을 듣는 <모던 골프>의 저자 벤 호건은 주위 사람들이 골프에 대해 물어도 답하지 않았던 것으로 유명하다. 골프에선 흔히 고수일수록 조언을 하지 않는다는 격언이 있다.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다. 현재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활동 중인 캐디 모임 카페 ‘캐디세상’ 게시판을 뒤적이다 보면 남자들의 허세로 벌어지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로 가득하다. 대표적인 사례는 남성 골퍼들이 가장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드라이버 비거리다.
최근 <골프다이제스트>가 스카이72 골프장에 방문한 골퍼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국내 아마추어 남성 골퍼들의 평균 드라이버 비거리는 215야드 정도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면 온통 250~300야드의 PGA 투어 수준의 장타자들밖에 없다. 도대체 평균 비거리는 누가 다 깎아먹고 있는 것일까? 남자들은 대부분 신장은 3cm 정도, 드라이버 비거리는 20야드 정도 보태서 이야기한다. 충청북도 음성에 위치한 ○○코스 12번 홀 해저드엔 로스트볼이 가득하다. 티박스에서 180야드부터 위치한 해저드로 볼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곳의 코스 담당자는 “12번 홀에선 실제 비거리가 까발려진다. 300야드 가까운 드라이버 비거리라고 자랑하던 골퍼들도 대부분 해저드를 못 넘기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해저드에 볼을 빠뜨린 골퍼들의 반응은 비슷하다.
‘어라? 이상하네. 한 번만 더 쳐볼게!’ 몇 번을 거듭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생각보다 드라이버 비거리에 목숨을 거는 남성 골퍼들이 많다. 스코어가 백돌이라도 장타를 날리는 골퍼에겐 경외심이 생기는 것이다.
현재 분당 스파밸리에서 레슨을 진행 중인 박광수 프로는 “일부 남성 골퍼 중 다짜고짜 드라이버 비거리를 늘려 달라는 사람이 많다. 체계적인 단계를 거쳐야 전반적인 실력이 향상되는 법인데 당황스럽다”고 말한다. 일부 골퍼는 과도한 힘을 줘 클럽이 그물로 떨어지거나 부상을 입는 경우도 있다.
드라이버 비거리에 대한 콤플렉스는 클럽 교체에 대한 펌프질을 자극한다. 던롭의 김혜영 마케팅 과장은 “모든 클럽 중 드라이버 교체 시기가 가장 짧은 편이다. 클럽의 손상보단 비거리에 대한 솔루션으로 찾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남성 골퍼들의 허세를 자극해 장사를 하는 경우도 있다.
지난해 프로기아는 비슷한 스펙의 클럽을 한 해 동안 14개나 출시했다. 장거리 골퍼로 유명한 장하나 프로조차 “골프는 비거리보다 숏게임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된장녀’라는 신조어가 있다. 자신의 수준에 비해 과도한 사치품을 선호하는 여성들을 조롱하는 말이다.
필드 위의 남성들은 어떨까? 지난해 골프를 시작한 D는 주말 골퍼로 현재 백돌이가 목표다. 바쁜 업무로 연습장도 자주 나가지 못하는 편이라 필드에 가면 이리저리 튀는 볼을 주우러 뛰어다니기 일쑤다. D가 18홀에서 사용하는 평균 볼은 2더즌 이상으로 적게 잃어버렸을 경우 한 홀당 평균 1.3개의 볼을 소비한다.
D가 선호하는 골프공은 타이틀리스트의 프로 V1x다. 1더즌 판매가인 7만원을 고려하면 한 홀당 약 8000원 정도를 로스트볼로 소비한다는 얘기다.
업계 관계자는 “타이틀리스트의 프로 V1x의 경우 우수한 성능이 입증된 볼이지만 4피스로 경도가 물렁물렁해 컨트롤이 힘들다. 정교한 스윙이 필요한 볼이라서 아마추어 골퍼가 사용했을 경우 방향성을 예측하기 힘들다”고 말한다. 돼지 목에 진주인 셈이다.
남성들은 필드에서 고가 클럽으로 콧대를 높인다. 골퍼 F는 최근 드라이버를 구매했다. 모 기업의 회장이 애용하는 브랜드 제품으로 전체가 도금으로 처리돼 있다. 가격이 무려 1200만원. F는 라운드를 나갈 때마다 캐디백에 드라이버를 꼽아 놓지만 사용은 하지 않는다. 스크래치가 날 것 같아서란다.
수컷들의 허세는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자신의 권위나 부족의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해 20kg에 육박하는 모자를 쓰다 디스크에 걸리거나 수백 명이 죽어나가는 대규모 공사로 피라미드나 만리장성을 완성했다.
21세기 남성들은 필드에서 남보다 우월하다는 착각에 빠진 중2로 돌아간다. 어느 정도의 허세는 귀엽게 봐줄 수 있지만 결코 자신을 포장해주지는 못한다. 필드 위에선 자고로 과묵하고, 실력으로 보여줘야 하는 법이다.
[조재국 매일경제 골프포위민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5호(2013년 08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