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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교수의 인간과 신]⑫ 세상의 세 기둥
입력 : 2012.12.27 13:5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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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쉬나는 ‘타낙’으로부터 자랑스럽게 거리를 두며, 경전을 인용하지도 않았고 그 가르침에 의존하지도 않았다. 미쉬나는 유대인이 무엇을 믿었느냐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관심을 가졌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일생생활에서 어떻게 ‘차별된 거룩한 행위’를 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사실 시대의 필요에 맞춰 재해석될 수 없는 경전은 죽은 것이다. 미쉬나는 단순한 지적 추구가 아니며, 그 연구가 목적이 아니다. 미쉬나는 실제 행동을 유도하도록 영감을 줘야 한다. 경전을 읽는 자는 토라를 실제 상황에 적용시키고, 이것이 공동체의 모든 이들에게 말할 수 있도록 할 의무를 지닌다. 목표는 불명확한 구절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화급한 문제에 응답하는 것이다. 실제 적용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한 경전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랍비들은 경전을 ‘미끄라(Miqra)’, 즉 ‘부름’이라고 불렀다. 경전은 유대인들을 행동으로 인도하는 요구이다. 미쉬나는 실생활에 적용할 법률에 관한 내용이다. 그러나 미쉬나의 ‘네지킨’ 편에 등장하는 ‘선조들의 어록’이란 부분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잠언집이다. ‘선조들의 어록’의 핵심은 1장 2절에 등장한다.
“의로운 시몬은 ‘위대한 회중’ 가운데 한 명이었다. 세상은 다음 세 가지에 달려 있다. 토라, 아보다 그리고 헤세드 베풀기.”
기원전 3세기에 생존했던 ‘의로운 시몬’은 유대인 전통에서 가장 존경받은 지도자 120명으로 구성된 ‘위대한 회중’ 가운데 한 명이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입법부에 해당하는 크네셋의 정수도 이 전통에 따라 120명이다. 시몬은 나라를 잃고 세계로 흩어진 유대인들을 하나로 묶고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는 근간을 세 가지로 규정했다.
첫째는 ‘토라’다. ‘토라’는 일반적으로 유대인들의 경전을 총칭하는 용어다. 토라의 축자적인 의미는 ‘명중’이란 의미이다. 궁수가 자신이 당긴 활이 명중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정(靜)과 동(動)의 균형’에 따라 유연하게 몸의 흩어짐이 없이 발사해야 한다. 토라는 단순히 훌륭한 내용이 기록된 경전이 아니라, 토라를 읽는 사람의 정결한 마음가짐이며 삶이다. 평상시 삶이 흩어짐이 없고 반듯할 때, 화살이 과녁으로 달려갈 수 있다. 더욱이 토라는 ‘과녁’이 아니라, 궁수가 활을 방사했을 때부터 결정되는 활이 날아가는 ‘길’이다. 토라의 내용이 일상생활의 삶을 인도하는 ‘길’이 되어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때 토라는 완성된다. 히브리어로 ‘하타’라는 단어는 ‘활이 과녁에 빗겨나가다’와 ‘죄를 짓다’라는 두 가지 의미를 동시에 지닌다. 유대인들에게 ‘죄’란 십계명을 어기는 것뿐만 아니라 더욱더 근본적으로 ‘인간이 매일 매일 걸어야 할 길을 알지 못하고 찾지 못하는 것’이다. 시편 1편은 그 길을 찾아 묵상하고 걷는 자가 행복하다고 전한다.
둘째는 ‘아보다’이다. 히브리어 아보다는 현대어로 해석하기 난해한 단어이다. 아보다는 ‘예배/신을 섬기기’와 ‘노동하기’라는 전혀 다른 두 가지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영국 국왕 제임스 1세가 영국 성공회의 예배에 사용할 수 있는 표준 성경을 번역하라고 명령했다. 학자들은 ‘아보다’라는 단어를 Service라는 단어로 번역했다. Service는 영어 용례에서 ‘예배’와 ‘노동’ 모두를 뜻한다. 5세기 이탈리아의 베네딕투스는 베네딕토수도회의를 창설했고 그 수도회의 모토를 ‘노동은 기도다(Labore est orare)’로 정했다. 신을 섬기는 것은 일상생활의 직업을 통해 주위 사람들에게 드러나야 하며, 자신이 하는 직업은 신에게 하듯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세 번째는 ‘헤세드를 베풀기’이다. 탈무드에서 랍비 심라이는 “토라는 헤세드로 시작해 헤세드로 마친다”라고 말했다. 헤세드는 원래 ‘충성’이란 의미였으나 기원후 1세기부터 의미를 확장해 ‘자기희생적인 행위’의 의미를 지니게 됐다. 헤세드는 자기에게 부과된 의무를 넘어 자신에겐 손해가 되더라고 상대방이나 모두를 위한 ‘행위’이다. 신약성서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에서 종교지도자와 학자는 아무도 없는 한적한 산속에서 다친 사람을 보고도 모른 채 지나갔지만, 한 사마리아인은 ‘필요 이상’으로 그를 데리고 여관으로 데려가 치료해주고 여관 주인에게 돈까지 주면서 돌봐달라고 부탁했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은 다친 사람의 처지를 자신의 처지라고 여기는 ‘공감’할 수 있는 능력뿐만 아니라, 그 마음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자비’의 용기도 가진 자이다. 헤세드는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는 ‘무아’의 실천이다. 나는 2013년이 우리 모두가 자신이 반드시 걸어가야 할 ‘길’을 발견해 ‘매일 매일 정진’하고 주위를 돌아보고 이웃을 위해 ‘자비’를 베푸는 ‘니르바나’를 경험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배철현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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