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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수산의 자작나무 아래서] ③ 닭 밑씻개인가 이슬풀인가
입력 : 2012.11.12 10:5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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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기자가 차가운 주검이 되어 일본의 집으로 돌아온 것은 태풍이 스쳐가던 저녁 무렵이었다. 다음 날, 야마모토 기자의 관이 집을 나와 추도회장으로 향하기 직전 그녀의 아버지는 뜰에 핀 야생화 하나를 꺾어 그녀의 관에 넣어 주었다. 다른 어떤 꽃보다도 야생화를 좋아했던 딸을 위해 아버지가 건넨 마지막 손길, 이때 관에 넣은 꽃을 일본 언론은 ‘츠유쿠사(ツユクサ, 露草, 이슬풀)’라고 썼다. 내 서재 밖의 마당에도 자라는 흔하디 흔한 풀이다. 푸르고 조그만 꽃이 피는 이 풀의 우리말 정식 명칭이 닭의장풀이다. 그러나 흔히 ‘닭 밑씻개’라고 부른다. 한 나라에서 닭 밑씻개라고 부르는 풀을 옆 나라에서는 이슬풀이라고 부르다니.
달개비라고도 하는 이 풀의 꽃이 아침에 피었다가 한낮이면 진다고 해 일본 사람들은 이슬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학명은 ‘Commelina Communis’로 서양에서도 일상적으로는 ‘Dayflower’라고 부른다. 그런데 어쩔 것인가. 흔하디 흔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겠지만, 한국인도 참 못 말릴 사람들이다. 아주 하찮은 데다 생김새가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싶지만 어쩌자고 꽃 이름에 밑씻개가 뭐람.
일본과 우리나라의 꽃 이름을 비교하자면 두 나라의 민족성이 드러나 웃음이 나온다. 나팔꽃을 일본에서는 ‘아사가오(あさかお, 朝顔, 아침 얼굴)’라고 부른다. 나팔꽃이라는 우리의 이름이 형태를 중요시한 직설적인 표현이라면 일본은 의미에 가치를 둔 좀 더 감성적인 이름이다.
음식 이름만 해도 그렇다. 일본에는 좀 웃긴다 싶은 그런 음식 이름들이 많다. 한 예로 ‘애비자식 덮밥’이 그렇다. 우물 정(井)자의 한 가운데 점을 찍어 놓고 일본에서는 돈부리라고 부른다. 이 돈부리가 바로 덮밥으로, 이 덮밥 가운데 애비자식 덮밥이라는 것이 있다.
‘오야코(親子) 돈부리’가 그것이다.
일본에 살고 있던 20여년 전, 집에서 길 하나 건너인 후지TV 앞의 덮밥집에서 처음으로 이 메뉴를 보았다. 오야코 돈부리라면 아버지와 아들 덮밥인데 도대체 무슨 음식 이름이 이런가. 이름이 수상해서 못 먹을 셈치고 이 음식을 주문하고 자못 궁금해 하며 기다리던 내 앞에 드디어 덮밥 그릇이 나왔을 때, 나는 인터넷에 댓글을 달 때나 쓰는 그 말 그대로 ‘허걱’ 하고 웃을 수밖에 없었다. 애비자식이 맞았다. 내 앞에 놓인 그릇에는 하얀 쌀밥 위에 닭고기와 달걀프라이가 얹혀 있었다. 닭이 먼저인지 알이 먼저인지는 나도 모른다. 어쨌든 닭이든 달걀이든 둘 가운데 하나가 애비이고 자식인 건 확실하지 않은가.
이렇게 얄밉기까지 한 일본의 음식 이름에는 ‘츠기미(月見) 우동’이 있다. 우리말로 옮기자면 ‘달 보기 우동’ 혹은 ‘달맞이 우동’쯤 될까. 별다른 음식이 아니다. 보통의 우동에 달걀노른자를 하나 떨어뜨린 우동이다. 국수 가닥 위에 얹 힌 달걀노른자가 달이 되는 순간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음식의 이름처럼 솔직하고 담백한 것도 없다. 우리의 음식에는 본질을 왜곡하면서 장식적으로 붙인 음식 이름이 거의 없다. 어쩌면 내가 아는 음식 가운데 이런 이름으로 유일한 것은 ‘샛서방’이라는 먹을 것도 없는 생선이 아닌가 싶다.
전라도 음식 그것도 순천지방의 상차림에서 보이곤 하는 이 샛서방 고기란, 너무 맛이 좋아서 자기 서방은 주지 않고 숨겨 두었다가 몰래 은근히 사귀는 그 남자, 샛서방에게나 주는 고기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했다. 그러나 워낙 먹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억세고 대가리만 큰 고기라 쌀쌀맞게 내치기 섭섭해서 그런 맛깔스럽고 후덕한 이름을 붙여 준 게 아닌가 싶었던 그 샛서방 고기 뿐, 우리는 음식 이름에서도 그 표현이 간명직재(簡明直裁)하다.
우리의 음식은 그처럼 꾸밈이 없다. 지금 곧 바로 만들었든 쉽게 만들었던 막 만들었다고 ‘막국수’라고 하는 이런 한국의 음식 이름이 나는 정겹고 솔직해서 좋다. 있는 그대로, 푸짐하게, 색깔조차도 재료 그대로의 색을 한껏 살리는, 듬뿍 내놓는 것이 우리 음식의 본질인 것이다.
정론(正論)은 정명(正名)에서 시작한다고 설파한 분은 언론학자 최정호 박사였다. 연세대에서 정년을 맞으며 가졌던 퇴임기념 강연에서였다. 그 강연장에서 ‘올바른 논지는 올바른 이름 붙이기에서 시작한다’는 강연을 들으며 문득 떠올린 것이 ‘광주사태’라는 말이었다.
사건이 한창이던 1980년 5월 21일 계엄사령관 이희성이 “광주에서 소요사태가 일어나고 있다”고 언급한 이후 얼마나 많은 이름이 5·18을 호도, 비하, 왜곡, 과장했던가를 생각했던 것이다. 광주폭동, 광주학살, 광주사태, 광주민중봉기, 광주시민항쟁, 5월 민중 항쟁…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름을 거치고 넘으면서 ‘5·18 광주 민주화운동’으로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은 ‘정명은 정론이다’는 말을 체감하게 하기 때문이었다.
이름이란 그처럼 엄숙하다. 무섭게 냉혹하다. 이름이라는 대명사가 그 이름으로 대변되는 어떤 사안의 본질과 그 본질이 품고 있는 진실을 드러내지 못할 때 그 이름도 그 본질도 허위일 뿐이다. 어떤 무엇이든 그에 걸맞고 그에 합당한 이름을 가져야 한다.
스스로가 혹은 회사의 방침에 따라 전쟁터에 나가는 종군이라는 행위를 빗대어 종군위안부라는 말로 그 참혹하고도 비인간적인 여성의 인권유린을 호도해 온 일본이다. ‘창씨개명은 조선인이 원해서 했다’ ‘강제징용은 없었다’고 과거사 문제와 관련해서도 일본 우익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여전하다.
전쟁의 그때를 그리워하는, 전쟁에 광분하여 근린제국과 자국민의 목숨을 그토록 많이 죽음으로 내몰고 나서도 그때를 잊지 못하며 ‘꿈이여 다시 한 번!’하는 나라가 인류 역사의 언제, 어디에 있는가. 닭고기 덮밥을 놓고 ‘아버지와 아들 덮밥’이라고 하고, 달걀 하나 깨뜨려 넣고 ‘달맞이 우동’이라고 하는 일본의 이런 성향은 민족성과 연결되면서 역사 인식에까지 이어져 있지 않나 싶다.
경색된 한일관계를 바라보며, 정명이 정론의 첫 발걸음이라는 생각을 다시 한 번 가다듬게 되는 요즈음이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6호(2012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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