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연의 비블리오필리] 남자를 만든 남자를 뛰어넘은 여인들

    입력 : 2012.10.05 17:47:47

  • 에바 페론
    에바 페론
    에바 페론 1952년 7월 26일 아르헨티나 영부인 에바 페론이 34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민중들은 ‘아르헨티나여 나를 위해 울지 말아요(Don’t cry for me Argentina)’의 주인공 에바 페론을 성녀로 지정해 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했고 부자와 보수주의자들은 악녀의 죽음을 축하하면서 샴페인을 터뜨렸다.

    에바 페론은 1919년 사생아로 태어났다. 농장주의 첩이었던 에바의 어머니는 가난과 핍박 속에서 에바를 키웠다. 미모의 에바는 아픔과 고통으로 점철된 고향을 떠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서 나이트클럽 댄서, 싸구려 코미디 배우를 전전하면서 젊은 날을 보낸다. 그러던 중 우연히 군부 쿠데타 세력의 주동자였던 후안 도밍고 페론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성공한 쿠데타의 주역이었던 후안은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 됐고, 에바는 자연스럽게 영부인이 된다. 하지만 에바의 앞길이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대농장주들을 중심으로 한 부유층과 보수 세력들은 에바의 전력을 부풀려 ‘창녀’라고 떠들어댔다. 사람들은 에바가 빈민을 위해 성녀 행세를 했지만 사실은 사치와 방탕에 빠진 악녀였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기득권 세력들은 에바에게 흠집을 내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운명일까. 그녀가 죽은 지 50년이 지난 지금도 에바 페론을 둘러싼 뒷이야기들은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서양사학자 정기문 씨가 쓴 <내 딸들을 위한 여성사>에는 에바에 관한 흥미로운 진실이 담겨 있다. 저자는 에바가 배우가 되기 위해 도시로 간 것이 아니라 지주 자식들의 성폭력을 피해 도망간 것이라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한다. 농장주의 아들들은 미모의 에바를 납치해 욕보이려다 실패하자 발가벗긴 채 길거리에 버렸고, 자신들의 악행을 감추기 위해 온갖 악의적 소문을 마을에 퍼뜨린다. 평생 에바를 따라다닌 소문들은 대부분 이때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기득권층이 그녀를 싫어했던 건 당연했다. 그녀는 태생적으로 민중이었고 실제로도 민중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책임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스페인을 방문했을 때 왕궁을 보면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야, 방이 많기도 하네. 고아원을 만들면 좋겠다.”

    그녀는 부자와 보수층에는 늘 도도했으나 민중들과는 친구처럼 지냈다. 소문처럼 포퓰리즘에 영합한 머리 나쁜 퍼스트레이디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여성들에게 참정권을 준 진보적 정치가이자 운명에 맞서 싸운 열정적인 여인이었다.

    케네디와 재클린
    재클린
    재클린
    “나는 재클린 케네디와 함께 프랑스에 다녀온 그녀 남편입니다.” 프랑스 방문을 마치고 미국에 돌아온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공항에 마중 나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프랑스 방문에서 프랑스인들을 열광시킨 건 케네디가 아닌 부인 재키였다. 당시 미국과 프랑스는 무역마찰 등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불편한 심기 속에서 이루어진 프랑스 방문에서 발랄한 재키는 무뚝뚝하기로 이름난 드골 대통령 얼굴에서 미소를 이끌어냈다. 유창한 프랑스어, 미국인답지 않은 격조 있는 매너, 절세미인은 아니지만 눈을 뗄 수 없는 상큼한 미소와 몸동작, 품위를 지키면서도 경쾌한 패션 등 재키는 가는 곳마다 사람들을 몰고 다니며 성공적인 정상회담을 이끌어냈다. 이때부터 ‘재키 스타일(Jackie style)’이라는 용어가 나왔다. 패션 전문 저술가인 패밀러 클라크 키어우는 <재키 스타일>이라는 책에서 20세기를 상징하는 한 아이콘으로 남은 여인에 주목한다. 재미있는 건 결혼 전 케네디가 상당히 촌스러운 남자였다는 사실이다. 재키는 철이 지난 소재에 짝이 안 맞는 양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신고 국회에 등원하던 케네디를 변화시켰고, 졸지에 케네디는 의사당의 패션리더가 됐다. 심플함과 절제 그리고 독창성은 재키 스타일의 핵심이었다. 훌륭한 패션은 매 순간순간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재키가 20세기 아이콘이 될 수 있었던 건 그녀가 모든 상황에서 자신을 주인공으로 만들 줄 알았기 때문이다.

    릴케와 루 살로메
    루 살로메
    루 살로메
    무거운 마차를 끌면서 채찍을 맞는 말의 눈이 너무 슬퍼보여서 말의 목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렸다는 철학자 니체. 그는 평생 한 여인을 사랑했다. 이지적이고 오묘한 매력을 지닌 여인 루 살로메가 그 대상이었다. 로마 여행길에 루를 만난 니체는 루에게 청혼을 한다. 하지만 루는 콧수염을 기른 신비스럽고 고독한 이 남자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루지 못한 사랑의 고통을 끌어안고 고뇌와 씨름하던 니체는 일주일 만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썼다. 실연이 창조의 신비로 연결된 순간이었다. 루에게 헌신적 사랑을 바친 인물은 니체 이외에도 시인 릴케와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가 있었다. 릴케는 루에 대해 “루는 나의 맑고 순수한 샘물이다. 나는 그녀를 통해서 세상을 보고 싶었다”는 헌사를 바쳤고, 프로이트는 “루는 여자로서 최고 운명을 가졌다”고 찬사를 보냈다. 우리가 루를 이들의 연인으로만 기억하는 건 세 사람의 남자가 모두 워낙 유명한 인물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뿌리에 남성중심주의가 존재하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프랑스 최초 여성장관이자 작가인 프랑수아즈 자루는 이 같은 시각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인간 루 살로메를 분석한다. 그 결과물이 <루 살로메, 자유로운 여자 이야기>다. 그녀에게는 남자의 의식세계를 파고드는 비범한 매력이 있었다고 전한다. 왜 그녀는 남자의 의식을 흔들 수 있었을까. 루는 자유인이었다. 루는 세 명의 지성 모두에게 매력을 느꼈고 그들과 지내는 시간을 즐거워했다. 그러나 그들과 사는 것을 선택하지는 않았다. 19세기 말 여성에게 결혼은 영혼을 반납하는 일과 동일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로부터 10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우리는 루를 ‘당대 최고 지성이었던 니체, 릴케, 프로이트의 연인’으로만 기억하는 경향이 농후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인식이 크게 변하지 않은 모양이다. 안타깝지만 말이다.

    [허연 매일경제 문화부 부장대우·시인·문학박사]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창간 제25호(2012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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