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수산의 자작나무 아래서] ② 김치 그리고 불멸의 밑반찬

    입력 : 2012.10.05 17:47:40

  • 사진설명
    1988년 가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가족을 끌고 한국을 떠났다가 4년을 일본에서 보냈다.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딸아이가 삼십 대 중반이 되었으니 20여 년 전의 이야기이다. 세월이 어느새 그렇게 흘렀다. 귀국한 것이 1992년 가을, 대선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으니 내 개인사 안에서는 ‘노태우 정권’ 5년 동안의 앞뒤 6개월을 빼고 일본에서 지낸 것이 된다. 그 일본생활을 끝낼 무렵이었다. 어느 날 아침 TV 요리 프로그램을 보다가 ‘아 이건 아닌데’하며 놀란 적이 있다. 그날 방송의 주제는 김치였다. 남녀 진행자가 한국인 요리연구가라는 여성과 함께 다양한 김치의 종류를 소개하고 김치 만드는 법까지 배우는 구성이었다. 문제는 후반, 김치 만들기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어쩌자는 것인지 그 요리연구가는 김치를 만들면서 젓갈을 빼놓고 넘어가는 것이 아닌가. 김치의 맛을 일구어내는 요소 가운데서 젓갈을 빼고 나면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 부언하자면 내가 아는 일본인 가운데도 젓갈이라는 양념의 실체도 개념도 모르는 일본인들이 많다. 김치라는 것이 절인 배추에 소금과 고춧가루를 섞으면 되는 것으로 아는 그런 사람들이기에 왜 한국에서 먹는 김치는 매우면서도 단맛이 나느냐고 묻곤 한다. 발효식품이라는 것은 알지만 거기에 젓갈이라는 중요한 요소가 숨어서 맛을 내고 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드디어 프로그램의 막바지, 완성된 김치를 놓고 김치라기보다는 겉절이라고 해야 옳을 그 양념으로 버무려진 시뻘건 배추 한 통을 썰어서 접시 위에 올려놓고 시식이 시작되었다. 식탁 한가운데 마치 통닭처럼 김치를 올려놓은 진행자와 요리연구가가 접시 하나씩을 앞에 놓고 김치를 먹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 오직 김치 하나를 올려놓고 먹어보면서 “아 역시 다른데요. 본바닥 김치 맛이 이렇군요”하고 있는 모습은 어이없다는 느낌을 넘어서서 말 그대로 엽기였다. 녹화가 끝나자마자 웩웩거리며 입을 헹구러 갔을 그 진행자들을 상상하며 나는 웃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 오묘함을 상찬해도 모자라는 음식의 하나가 김치이지만 김치는 반찬이라는 족쇄를 풀 수 없는 숙명의 음식이다. 밥이 있어야 존재한다. 밥이 있어야 비로소 존재가치가 빛나는 결코 홀로서기가 불가능한 음식이다.

    그런데 요즈음 온갖 한국 것에 세계화를 갖다 붙이는 사람들이 ‘김치의 세계화’를 부르짖는다. 김치가 세계화되어 그 가치와 효능과 맛을 세계인에게 알게 한다면 더 없이 좋은 일이다. 김치는 혼자서는 결코 식탁에 오를 수 없는 음식이다. 밥은 필수이고 김치로 싸먹을 그 무엇이 있어야 하는 김치가 아닌가. 그래서 ‘김치의 세계화’만을 부르짖는 사람들에게 넌지시 묻고 싶어진다. 반찬으로서의 김치라는 전제가 없이 밥이라는 주체가 있어야 존재가치를 가지는 반찬인 김치가 저 혼자 어떻게 세계화가 가능하다는 것이옵나이까. 적절한 비유가 아닐지 모르겠지만 선수는 빼놓고 코치만 올림픽에 내보내자는 것처럼 들리기에 하는 말이다.

    우리 음식문화의 중요한 특징의 하나인 반찬을 소홀히 생각한 데서 오는 발상의 오류인 것이다. 밥이 있고 반찬이 있다. 밥이 있어야 반찬이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반찬 없는 밥도 존재할 수 없는 이 조화와 융합의 지혜가 한국인의 밥상에 있는 것이다. 반찬을 오카즈(おかず)라고 부르는 일본에서도 이 점은 우리와 다를 바가 없다.

    밥에 곁들여 먹는 온갖 음식을 이르는 말인 ‘반찬’이란 부식(副食)은 동양의 몇 나라에나 있는 독특한 상차림이다. 반찬은 밥에 곁들여 먹는 음식이지 그것만을 따로 먹는 것이 아니다. 서양음식에는 이 개념이 거의 없다. 쌀과 같은 곡류로 지은 밥이 주식이 되고 생선, 육류를 비롯한 식물성 식품이 반찬이라는 부식이 되어 다양한 영양과 맛을 섭취하는 ‘함께 먹는 음식’으로 발전해온 것이다. 서양의 주 음식 재료가 우리에게는 반찬이 되어 밥과 함께 먹는 부수적인 것으로 변한다. 이것 또한 지혜이다. 다양한 먹거리를 함께 먹을 수 있는 상차림인 것이다.

    사전에 보면 반찬을 ‘Side Dish’라고 해 놓았는데 이처럼 어이없는 일이 또 있을까. 서양음식의 ‘Side Dish’와 반찬은 엄연히 다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반찬이라는 말은 그대로 ‘Banchan’이라고 고유명사로 적어야 한다고 믿는다. 안방과 사랑을 연결하면서 나무가 깔린 독특한 주거공간인 우리의 마루가 결코 ‘Floor’라고 번역될 수 없듯이 말이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만 생각해도 그렇다. 같은 뜻으로 일본에서는 ‘배고픈데 맛없는 건 없다(空き腹にまずいものなし)’라고 한다. 식생활이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로 옮겨가면 다르다. 흔히 이 말을 영어로 ‘Hunger is the Best Sauce’라고 하지만 의미나 느낌에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도 ‘Side Dish’란 우리의 반찬처럼 함께 먹는 것이 아니라 그것 또한 따로 먹는다. 무언가를 먹기 전에 혹은 먹은 후에 먹는 것이 ‘Side Dish’인 것이다.

    야만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샐러드와 수프, 스테이크와 후식까지 한국적으로 한 상에 푸짐하게 그득 벌여놓고 이것저것 섞어가며 먹는 식당이 생겨도 장사가 곧잘 되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오히려 한식이 서양음식처럼 하나씩 나오는 한식당이 퓨전이라는 이름으로 늘어나서 나를 짜증나게 한다. 반찬을 생각하며 나는 늘 사회를 떠올린다. 북한에서는 ‘새우도 반찬’이라는 속담이 쓰인다고 한다. 작고 보잘것없는 새우도 반찬이 될 수 있다는 뜻으로 어떤 보잘것없는 것도 다 우리의 삶에서 필요하고 요긴한 것임을 드러낸다. 사람도 사회도 이와 같지 않은가. ‘상다리가 부러지게’ 반찬의 가짓수가 골고루 다양한 것처럼 사회도 다양한 개체와 역할이 공존해야 한다. 반찬이 고루고루 갖춰진 그래서 상다리가 부러지는 사회가 될 때 비로소 건실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새우도 반찬이듯이 어떤 계층의 어떤 직업의 어떤 사람도 다 사회의 한 틀을 움직이는 중요한 요소이며 가치라는 인식이 사라지는 사회가 안타깝다. 법조인 혹은 군인이라는 자리가, 언론인 혹은 대학교수라는 역할이 단지 다음에 정치를 하기 위한 과정처럼 되어 버린 우리 사회에 지금 필요한 말은 바로 반찬의 미학이며 덕목인 것이다. 밥을 위해 필요한 반찬들처럼 다양한 반찬들이 먹음직스레 풍성할 때 우리 사회도 풍요로운 사회가 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자주 가는 슈퍼마켓에는 요리책을 진열하는 코너가 있다. 거기서 <불멸의 밑반찬>이라는 책을 본 적이 있다. 어느 편집자의 아이디어가 이다지도 빛나는가. 내용은 별거 아니었지만 나는 책 이름의 황홀함 때문에 그 책을 사고 말았다. 내용이 별거 아니란 것은 그 책에 대한 비하가 아니라 밑반찬을 두고 하는 말이다. 밑반찬이라는 것이 실상 별거 아닌 그런 게 아니던가. 있으면 더 좋지만 없어도 좋은, 없다고 해서 밥을 못 먹는 것도 아닌, 그렇고 그런 반찬의 한 가지가 밑반찬이 아닌가. 그렇지만 그게 없으면 또 얼마나 허전한가. 그래서인가. 그게 있어야 그래도 여러 반찬을 아우르고 뒷받침한다고 반찬이라는 말에 밑이라는 접두사를 살짝 붙여 놓은… 한국인의 지혜여. 밥이 있어야 김치가 존재하듯, 김치 옆에 또 밑반찬을 살포시 놓는 한국인의 이 오묘한 상차림이여.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창간 제25호(2012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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