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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 교수의 인간과 신] ④ HOMO CARITAS
입력 : 2012.05.04 11:25: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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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은 왜 자신들이 살던 편안한 오스트리아에서 전혀 듣지 못한 한국, 그것도 소록도에 온 것일까? 한국에 찾아온 이유는 단순하다. 언젠가 신문지상을 통해 한센병으로 고통 받고 있는 환우들이 한국이란 땅에서 집단수용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통당하는 사람과 자신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 두 수녀는 그들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느낀 것이다. 한센병 환우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는 ‘컴패션(Compassion)’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21세기 최고의 지도자와 경영자는 나하고 전혀 상관없는 다른 사람들의 관심과 고통을 인문학적인 소양을 통해서 이해하는 단계를 넘어, 그들의 삶 전체를 온몸으로 느끼는 ‘컴패션’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마음 바로 이 마음은 자신으로부터 한걸음 밖으로 나가는 엑스타시(ek-stasis)의 단계이며 자신을 남으로 채우는 무아(無我)의 경지로 들어가는 행위이다. 우리는 인문학적인 소양을, 내가 더 강해져 남을 쉽게 이기기 위한 무기로 사용하고 있지나 않은지 다시 한 번 뒤돌아 봐야 한다. 우리는 일생 동안 내가 아닌 다른 것들을 배운다. 다른 것들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그 사람은 무식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것들을 배우는 이유는 내 자신을 벗어나 남의 입장에 서보는 연습을 하여, 인간 마음에 내재한 ‘컴패션’을 ‘밖으로 꺼내기(e-ducation)’ 위함이다. 최고의 인문학적 소양이란 이질적인 문화에 대한 암기나 이해가 아니라, 자신을 없애고 남을 내 삶의 중심으로 삼는 ‘컴패션’이다.
몇 년 전 필자는 인세반(스티브 린튼) 유진벨 재단 회장의 강연을 들었다. 린튼가(家) 선교사집안의 3대 자손으로, 그의 아버지 인휴(휴 린턴) 목사는 “성공이란 많은 사람을, 특히 가난하고 병든 사람을 도와주는 것이다”라는 가르침이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버팀목이라 말했다. 우리에게 성공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두 수녀에게 인생의 성공이란 무엇이었을까? 소록도에 도착한 두 수녀는 당시 한국에는 이들을 치료할 의료시설조차 없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에 의료품과 지원금을 신청하여, 한국의 한센인을 자신의 자녀로 품은 것이다. 이들은 한센병이 전염병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장갑도 끼지 않은 채 정성껏 43년을 하루같이 보냈다. 상상해 보라! 우리의 자녀가 43년 동안 아무런 연고가 없는 지역에서 모든 사람들이 버린 이들과 생활한다면 우리는 찬성할 수 있는가? 도대체 이들은 여기까지 와서 이런 캠패션의 행위를 할 마음을 어떻게 가졌을까? 이들은 또한 자신들의 선행이 외부에 알려지는 일을 극히 꺼려서 수백 개의 감사장과 공로패는 돌아가야만 했다. 일일 봉사랍시고 공개적으로 사진 찍은 연예인들과는 수준이 다르다. 이들에게 명예란 무엇인가?
더욱더 충격적인 것은 두 수녀가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기 하루 전 소록도 병원 측에 이별 통보를 했다. 소록도 주민들은 20대 처녀에서 70대 할머니가 된 금발 수녀들을 ‘할매’라고 불렀다. 이들은 이미 전라도 할매가 되었다. 두 수녀는 주민들에게 아픔을 준다며 편지 한 장을 남겼다. “부족한 외국인으로서 큰 사랑과 존경을 받아 감사하며, 저희들의 부족함으로인해 아프게 해드린 일을 이 편지로 미안함과 용서를 빕니다”라며 말문을 흐렸다. 이른 새벽 아무도 모르게 섬을 떠났다. 이 수녀들의 짐이라곤 43년 전에 가져온 다 해진 검은색 가방 하나뿐! 이 낡은 가방은 세상의 어떤 명품보다 훨씬 더 명품이다. 그 안에 기막힌 역사와 이야기, 그리고 감동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 감동은 전염성이 있어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지 않은가? 나는 명품의 조건으로, ‘영적인 감동’으로 ‘전염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필자가 아는 최고의 명품은 이 할머니들의 가방이다. 이들이 43년 동안 소록도에서 봉사하면서 “성당에 나오세요”라고 권유하거나 전도했을까? 필자는 그런 말을 낯간지러워서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센병 환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모마리아였기 때문이다. 사지가 녹아버린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였기 때문이다. 성서에서 예수도, 너희가 평상시 만나는 불쌍한 자가 바로 자신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한다.
종교를 가진 사람들은 그들이상정한 신을 자신들이 만든 종교시설에 가두어 놓고 가끔 보러 간다. ‘장소’의 종교가 역사를 통해 얼마나 타락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진화론자 E O 윌슨은 ‘이타주의자는 스스로 그리고 가장 가까운 동족에게 보답을 기대하며 그의 선한 행위는 종종 완전히 의식적이며 계산적이고, 그의 술책은 사회의 복잡한 승인과 요구에 따라 세밀히 조직된다’고 주장한다. 필자는 동의할 수 없다. 만일 이 수녀들의 행위를 진화론자들이 말하는 ‘호혜적 이타주의(Reciprocal Altruism)’라고 억지 주장한다면, 인간의 삶을 너무 비관적으로 시시하게 보는 것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삶의 중심에서 주위로 밀어내고 이웃을 내 삶의 중심에 위치하게 될 때 가장 인간답지 않을까? ‘톨레랑스’나 ‘호모 심비우스’라는 개념도 그 중심이 나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컴패션’으로 자신을 승화시킬 수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건너야 할 강, 그 죽음의 강을 건널 때, 우리는 어떤 가방을 가져가야 할까? 두 오스트리아 두 할머니처럼 인생을 ‘호모 카리타스(Homo Caritas)’, 즉 이웃의 희로애락을 내 희로애락으로 여기는 사람으로, ‘컴패션’이라 보기에는 보잘것없지만, 감동이 있는 ‘검은 가방’을 가지고 가고 싶다.
서울대 배철현 교수는
주요관심사는 고대오리엔트문명인 후대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간의상관관계를 규명하는일이다. 주요저서로는 <타르굼옹켈로스창세기><타르굼아람어문법><창세기, 샤갈이 그림으로 그리다>등이 있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0호(2012년 0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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