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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연의 비블리오필리] 불에 탄 카펫 같은 사랑
입력 : 2012.02.27 13:4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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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불에 탄 자국’ 같은 이 사랑은 중년의 터널을 이미 한참 지나간 프랑스의 유명 여성 작가이자 대학교수인 아니 에르노의 사랑이야기다. 그녀는 어느 날 남자 A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그 기억들을 살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로 시작하는 소설 '단순한 열정'(문학동네)을 발표한다. 아들의 연인을 사랑하게 된 50대 정치가의 이야기로 1990년대 초 화제가 됐던 루이 말 감독의 영화 '데미지' 마지막 장면에는 사랑의 속성을 그대로 정리해주는 장면이 나온다. 사랑 때문에 모든 걸 잃어버린 제레미 아이언스가 반바지에 샌들을 신고, 시장바구니를 든 채 허름한 자취방으로 돌아온다. 그의 방에는 그를 찾아와 모든 걸 앗아간 여인의 슬라이드가 걸려 있다. 그 슬라이드 앞에서 초로의 남자는 독백한다. 모든 문장이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사랑은 어느 날 예고 없이 나를 찾아와 모든 걸 송두리째 가져가 버렸다. 사랑은 그런 것이다. 나도 모르게 찾아왔다가 떠나 버리는.” 사랑이 위대한 건 폭발적으로 다가와서 모든 것을 앗아가기 때문이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나이가 많든 적든, 계층이 높든 낮든 사랑은 사람들의 가슴 한복판을 뚫고 지나쳐 간다. 어떻게 보면 무자비하고 어떻게 보면 평등하다.
이 소설은 프랑스 문단에 파란을 몰고 왔다고 한다. 난 이 파란이 과장이었다고 자신한다. 사랑에 관한 한 자유로운 사람은 없다. 존경받는 한 지식인이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 나눈 불륜을 소재로 한 고백소설을 발표했다고 해서 진정 프랑스 문단이 들썩였다면 믿기지 않는다. 내가 아는 한 프랑스란 사회가 그렇게 허술하지는 않다.
어쨌든 이 소설의 백미는 사랑에 빠진 한 여자의 심리묘사다. 솔직함을 넘어서 잘 그린 세밀화를 만나는 것 같다. 이런 식이다.
사랑에 빠진 다음 클래식을 좋아하는 대학교수였던 그녀가 유행가를 좋아하게 되고, 지하철역에 멍하니 서서 그 사람 생각을 하다 전철을 몇 번이나 놓치고, 그 남자가 고작 5분 정도 눈길을 줄 구두와 스타킹을 새로 사게 됐다.
이런 구절도 눈에 띈다.
“박물관에서도 사랑을 표현한 작품만 눈에 들어왔다. 남자의 나체상에 마음이 끌렸다. 그것들을 보며 A의 몸을 떠올렸다.”
사랑에 빠진 한 여자. 사실 여기서 그 여자의 나이나 직업은 아무 의미가 없다. 사랑의 보편성 안에선 아무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아니 에르노 자신도 그 사실에 놀라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의 시인 폴 엘뤼아르는 “나의 신혼시절 위에, 잠자는 아기의 편안한 얼굴 위에 나는 너의 이름을 쓴다. 자유여”라는 구절로 유명한 시 '자유'를 쓴 시인이다. 그의 시세계는 평생 동안 3번 크게 변신한다. 그 변신의 정점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새로운 사람과 사랑에 빠지는 순간 시세계가 바뀌었던 것이다. 당연하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세상을 보는 새로운 창(窓)을 하나 만나는 것이다. 아니 에르노 역시 새로운 창을 만났다. 그녀는 우선 사람들에 대하여 연민과 고통과 우정이 뒤섞인 묘한 감정을 느낀다. 그녀는 사랑에 빠지면서 일 없이 공원 벤치에 누워 있는 사람들이나, 오후시간에 은밀히 외간남자를 만나거나 통속소설에 빠져 있는 여자들까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삶의 보편성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남자와 헤어진 후 아니 에르노는 그 남자를 만날 때 입었던 옷을 다시 꺼내 입고 그와 함께 걸었던 파리의 뒷골목을 걷는다. 그리고 그가 떠난 지 두 달 후 용기를 내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다. 사랑의 열정은 소설의 제목처럼 단순하다. 그래서 아름답고 위대하다.
라이트닝 P38을 타고 떠난 어린왕자
[허연 / 매일경제 문화부 부장대우·시인·문학박사]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7호(2012년 0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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