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 연예인이 현지 미디어가 J.Y Park으로 소개하는 박진영이다.
연예 활동이 아닌 리더십으로 유명세를 얻고 있다. ‘‘절대 넌 안돼’라고 말하지 않는 모습이 훌륭하다’, ‘연습생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면서 성장을 돕는다’는 식이다. 일본 스포츠연예지에선 박진영을 ‘세계 최고의 상사’라고 평가하며 그의 리더십에 대한 전문가들의 분석을 곁들인 기사를 내놓기도 했다. 덕분에 오는 10월 7일엔 박진영의 히트곡을 수록한 베스트앨범이 일본에서 발매될 정도다.
갑작스레 리더십으로 유명세를 얻은 것은 박진영이 최대주주인 기획사 JYP와 일본 소니뮤직의 걸그룹 오디션 ‘니지(Nizi) 프로젝트’ 덕분이다. 니지란 무지개(虹)를 뜻하는 일본어로 작년 7월부터 일본 8개 지역과 하와이, LA 등 10곳에서 공개 오디션을 열어 연습생을 뽑고 올 6월 니쥬(NiziU)란 이름으로 정식 데뷔시킨 프로젝트다.
이 과정은 OTT(인터넷을 통한 동영상 시청 서비스)인 훌루저팬(hulu Japan)을 통해 일본 시청자들을 만났다. 훌루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서비스지만 일본 사업은 지난 2014년 니혼테레비(닛테레)가 100% 자회사화했다.
이달 4일 일본 넷플릭스 종합 순위를 보면 <사이코지만 괜찮아>가 1위, <사랑의 불시착>이 2위를 차지했다.
닛테레는 일본 민영방송 중 최고 시청률을 자랑하는 회사다. 넷플릭스의 거센 공세에 직면한 닛테레와 훌루저팬에서는 킬러콘텐츠의 하나로 니지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덕분에 닛테레의 주요 프로그램에서 니지 프로젝트를 대대적으로 다루는 등 지원에 나선 것도 단기간에 인기가 높아진 비결이다. 글로벌 OTT 공세가 거센 상황에서 니지 프로젝트가 인기를 얻자 닛테레에선 더 공격적으로 홍보에 나서기도 했다. 상대적으로 타 방송사 노출이 적은 것은 현실이지만 기획사별로 특정 방송사와 돈독한 관계를 기본으로 하는 일본 연예계에선 큰 문제가 되지 않는 분위기다.
코로나19로 인해 한일 간 왕래가 쉽지 않으면서 정식 데뷔에도 불구하고 니쥬 멤버들은 현재 한국에 머물고 있다.
일본인으로 구성돼 일본 내 활동을 목표로 만들어진 팀이지만 데뷔곡 뮤직비디오엔 한강변과 한글이 등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또 미디어 인터뷰 등도 한국에서 온라인을 통해 진행하고 있으며 일상을 다룬 동영상에는 이들이 주로 찾는 한국의 대형 마트나 일상적인 거리 풍경이 등장하기도 한다.
일본 시장을 목표로 했다지만 이들의 모습은 전형적인 K팝 걸그룹이다. 한국 아이돌이 세계에 진출하는 기존 패턴과 다른 방식으로도 K팝, 한류의 글로벌화가 가능함을 보여줬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니쥬와 함께 최근 일본에서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이다. 평소 드라마 등에 대해선 전혀 언급하지 않던 사람들도 <사랑의 불시착>을 봤다며 물어올 정도다.
니지(Nizi) 프로젝트의 걸그룹 ‘니쥬’
아사히신문 등에선 ‘4차 한류붐이 시작됐다’는 평을 내놓는다. <겨울연가>가 인기를 끌었던 2004년(1차), 동방신기·카라·소녀시대가 주도한 2차(2011년), 트와이스와 치즈닭갈비가 인기를 끈 3차(2017년)에 필적할 만한 한류붐이란 것. <사랑의 불시착>이 넷플릭스를 통해 일본에서도 시청이 가능해진 것은 2월 23일이다. 처음엔 사실 넘쳐나는 한국 드라마의 하나 정도로만 여겨졌다. 인기가 급상승하게 된 것은 코로나19로 인해 재택근무가 늘어나기 시작한 지난 4월부터다. 8월 셋째 주에도 넷플릭스 일본 시청률에서 1~2위를 오가고 있다. <사랑의 불시착> 외에도 상위 10위 프로그램 안에 <이태원 클라쓰> <사이코지만 괜찮아> 등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6~7월에는 넷플릭스 일본 인기 콘텐츠 상위 10개 중 5개가 한국 콘텐츠인 경우도 있었다. 특히 <사랑의 불시착>은 북한에 대한 내용이란 점 등이 알려지면서 더 인기를 끌고 있다. 평소 한국에 대해선 강경한 입장을 고수해온 모테기 도시미쓰 외상이나 유명 시사평론가인 하시모토 도루 전 오사카부지사 등도 <사랑의 불시착>을 봤다고 밝히기도 했다.
잇따른 한국 드라마의 인기를 두고 일본 내에서도 많은 분석이 이뤄지고 있다. 일본 언론과 엔터업계에서 주목하는 것은 대기업 CJ의 역할과 넷플릭스의 투자다. CJ의 미디어산업 투자를 통해서 산업 생태계가 마련됐고 넷플릭스의 대규모 투자로 꽃을 피우게 됐다는 것이다. 한국에서도 잘 알려진 얘기다.
자본력과 함께 눈길을 끄는 것이 한국발 콘텐츠 자체의 강점에 대한 평가다. 한국만이 말할 수 있는 ‘지역(로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
현빈이 표지 모델로 실린 ‘슈칸아사히(週刊朝日)’ 6월호
일례로 <사랑의 불시착>의 경우엔 북한에 대한 섬세한 묘사와 일본과 다른 성역할을 인기 비결로 꼽는 평가가 많다. 제작과정에서 탈북자들을 대상으로 인터뷰를 통해 상세한 고증을 진행했다는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벌써부터 북한에 대해 잘못된 이미지를 심어주는 것 아니냐며 문제라고 지적하는 의견이 나올 정도다. 야마다 다카오 마이니치신문 논설위원은 ‘불시착 주의’란 제목의 칼럼을 통해 “한국 드라마의 전개는 침을 삼키며 몰입하게 되지만 현실과는 구분해야 한다”고 비판했다. 그는 제작진들이 북한 묘사 과정에서 정치적 문제가 될 수 있는 내용들은 모두 제외했다는 언급 등을 전하기도 했다. 논란이 일수록 드라마에 대한 관심은 더 높아졌다.
한국 드라마 속 남녀 주인공이 보여주는 성역할을 주목하는 의견도 나온다. <사랑의 불시착>의 경우 주도적인 인물이 여주인공이라는 것. 남자 주인공의 역할은 보조적 역할이란 얘기다. 일본 드라마에서 남성이 주도하고 여성이 순종하는 식으로 그려지는 경우가 많다보니 한국 드라마 속 성역할이 신선하게 다가왔다는 지적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지난해 이후 일본에서 한국 여성작가들의 작품들이 강세를 보이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82년생 김지영>(조남주 저)을 비롯해 <나는 나대로 살기로 했다>(김수현 저) 등 여성작가가 여성의 목소리를 낸 작품들이 큰 인기를 끌었다. 일본의 대표적인 문예잡지인 분게이(文藝)가 지난해 한국 페미니즘 관련 작품을 주제로 내놓은 가을호 ‘한국, 페미니즘, 일본’은 주문이 급증하며 3쇄까지 찍었다. 분게이의 86년 역사상 3쇄를 찍은 경우는 창간호 이후 처음이었다. 한 대형 방송사 고위경영자는 “드라마 등에선 한국을 따라갈 수가 없다”며 자조적인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정욱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