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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욱 특파원의 일본열도 통신] 코로나19로 드러난 아날로그 일본의 현실
입력 : 2020.05.27 16:0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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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군이 좋고 생활 편의시설 등이 잘 갖춰져 있어 도쿄의 23개구 중 가장 많은 92만 명이 살고 있는 세타가야구.
일본 전 국민을 대상으로 인당 10만엔(약 115만원)의 코로나19 극복 지원금 온라인신청이 시작된 후인 5월 13일 찾은 세타가야구 구청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요청하는 표지판 등이 곳곳에 붙어있었지만 마이넘버 신청 창구엔 민원인들이 적지 않았다. 마이넘버는 한국의 주민등록번호에 해당하는 11자리 개인 식별번호다. 한국처럼 모든 국민에 부여된 개인번호가 없어 전산화 및 행정처리에 불편함이 커지자 2015년 도입된 제도다.
2016년부터 사진과 마이넘버, 주소 등이 기재된 ‘마이넘버카드’ 발급이 시작됐다. 공식 신분증으로 사용할 수 있고 각종 민원처리도 매우 간략해진다고 일본 정부에서 적극 홍보에 나섰다. 발급이 시작된 지 올해로 5년째에 접어들었지만 여전한 거부감 때문에 5월 초까지도 발급률은 16.4%에 그쳤다. 일본 정부에서 권고는 하지만 강제하지 않다보니 지난해 가을 조사에선 공무원들 중에서 마이넘버카드를 발급받은 사람이 25%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나 화제가 되기도 했다.
지지부진한 보급에 무용론까지 퍼지고 있다. 자신과 관련한 모든 정보가 하나의 번호로 묶일 경우 개인정보가 통째로 정부 관리 하에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이나 자산 등이 그대로 노출된다는 점 등이 저항으로 작용하고 있다. 굳이 발급 받지 않아도 사는 데 불편함이 없다는 것도 한몫했다.
일본 정부가 10만엔 지급을 밝히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일본 정부에선 접수를 우편과 온라인 2가지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다. 우편의 경우 서류를 각 가정에 보내 이를 다시 우편으로 회수한 뒤 현금을 지급하는 식이다. 온라인의 경우 마이넘버카드를 가진 사람에 한해 신청할 수 있다. 우편 배송에 걸리는 시간 등으로 온라인 신청이 지급까지 훨씬 빠르게 진행될 것이란 기대감이 퍼지면서 마이넘버카드 신청이 쏟아졌다.
세타가야구청에서 만난 50대 남성은 “수입이 급감하던 차에 하루라도 빨리 받고 싶어 마이넘버카드부터 신청하러 왔다”고 말했다. 구청 측에선 “마이넘버카드 신청이 폭주해 지금은 더 걸릴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돌려보내는 상황”이라며 “불과 얼마 전까지 신청을 사정했었던 것이 옛날 얘기 같다”고 토로했다.
온라인으로 이뤄진 신청 역시 구청에는 예상치 못한 부담으로 돌아오고 있다. 5월 2일부터 온라인 신청이 시작된 후 11일까지 이미 2만4000여 건의 신청이 이뤄졌다. 온라인의 경우 신청자가 가족 인적사항 등 필요 정보를 직접 입력해야 한다. 아직 가구별 정보가 들어있는 주민기본대장과 온라인 신청 시스템이 연계가 안 됐기 때문이다. 그만큼 구청에선 모든 온라인 신청자가 필요 사항을 제대로 입력했는지 확인해야 한다. 세타가야구청 측에서는 “담당 직원을 늘릴 예정이지만 코로나19 상황이라 구청 직원들을 대거 투입하는 것도 쉽지 않은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에선 긴급재난지원금 신청 때 너무 간편해서 오히려 본인도 모르는 식으로 기부가 되고 있는 것과 정반대 상황이 일본에선 벌어지고 있는 것. 여전히 아날로그식 업무 처리가 일반적인 일본 사회의 현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도쿄 시나가와 역이 마스크를 쓴 통근자들로 붐비고 있다.
국내 대기업 A사의 일본법인은 긴급사태가 선언된 지난 4월 초부터 현지 채용 직원들은 모두 재택근무토록 하고 있다. A사 법인장은 “매일 직원들이 적지 않게 출근하고 있어 이유를 물어보니 서류에 도장을 찍어야 해서 나온다는 답을 들었다”고 말했다. A사는 모든 사내 서류는 전자결제가 이뤄진다. 문제는 거래처 관련 서류다. 간단한 샘플을 요청하더라도 도장을 찍은 서류를 보내고 또 물품이 도착하면 다시 확인증에 도장을 찍어줘야 하는 식이다.
아베 신조 총리까지 나서 원칙 재택근무를 요청한 긴급사태 선언 후에도 출근자들 감소폭이 예상보다 적은 것도 이 때문이었다. 전자결제 시스템 구축 등을 하는 스마트HR란 회사에선 주요 역에 “재택근무 시작했다. 도장 찍으러 출근했다”란 문구의 광고를 내놓아 큰 화제를 몰고 오기도 했다. 총리나 장관들은 “개별 기업들이 빨리 제도를 개선하길 바란다”고 말했다가 정부 관련 문서는 모두 도장을 찍어야 하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일본 정부에선 부랴부랴 전자정부 추진에 나서겠다고 각종 대책을 쏟아내기 시작했지만 잘 진행될 수 있을지 의심스러워하는 시선이 더 크다.
코로나19의 큰 파도가 지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원상회복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각종 이익단체들의 목소리가 여전히 크다는 점도 한몫했다. 전자정부 담당 장관인 다케모토 나오카즈 과학기술·IT(정보기술) 담당상은 ‘일본의 인장제도·문화를 지키는 의원연맹(도장의원연맹)’ 회장이다. 도장의원연맹은 31명의 의원이 소속돼 있으며 아베 총리의 친동생인 기시 노부오 의원도 참여하고 있다.
도장의원연맹은 일본 정부의 디지털서명 관련 법안 처리를 지연시킨 배후로 지목돼 비판을 받았던 조직이다. 코로나19 대응을 위한 전자결제 확대 요청에도 다케모토 장관은 “도장과 전자결제는 병행가능하다”는 식의 발언을 내놨다가 거센 역풍에 직면하기도 했다. 다케모토 장관은 이후 “도장의원연맹 회장직을 그만두라면 그만두겠다”며 머리를 숙였지만 악어의 눈물이 아니냐는 의심은 여전히 남아있다.
하루가 다르게 변화가 이뤄지는 한국 입장에서 보면 일본의 현실에 한숨부터 나오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관점을 달리하면 다른 모습도 보인다. 국가권력 비대화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경계심이 깔려있다. 정부와 군의 폭주가 결국 전쟁이란 참담한 결과로 이어졌던 역사의 기억이 여전히 일본사회에 일정 정도 브레이크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껏 주민번호와 같은 제도가 없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한국이 이태원발 코로나19 확산을 막겠다며 신용카드 사용내역은 물론 휴대전화 기지국 접속 기록까지 활용하는 것을 두고 일본사회가 염려하는 목소리가 큰 것도 이런 맥락이다. 아날로그 대국 일본을 단순히 시대에 뒤처졌다는 시각으로만 보기 힘든 이유다. 역으로 한국의 빠른 대응에 숨겨진 위험은 없을지 곱씹어 보게 되는 대목이다.
[정욱 특파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7호 (2020년 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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