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헌철 특파원의 워싱턴 워치] 신종 마약 오피오이드에 병드는 美, 오남용 사망자 年 5만 명… 총기 사망보다 많아

    입력 : 2019.10.04 15:16:51

  • 미국 정부는 지난 9월 둘째 주를 ‘오피오이드(opioid) 경각 주간’으로 정하고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포고문에서 “오피오이드 위기는 미국 전역을 파괴하고 소중한 생명을 앗아가고 있다”며 “매일 130명의 미국인이 오피오이드 과다 복용으로 사망한다”고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21세기 들어 오피오이드 사망자 수는 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미국인 수와 비슷하다”며 “오피오이드와의 전쟁을 위해 18억달러(약 2조1500억원)를 추가로 투입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지난 7월엔 프로야구팀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의 투수 타일러 스캑스가 오피오이드 복용으로 인해 사망하는 사건도 발생했다. 그러자 메이저리그 사무국은 선수들에 대한 무작위 검사를 검토하기로 했다. 마약성 진통제인 오피오이드는 아편을 뜻하는 ‘오피엄(opium)’에 어원을 두고 있다. 과거엔 모르핀이 대표적이었고 지금은 옥시코돈, 하이드로코돈, 하이드로몰폰, 메타돈, 펜타닐 등 종류도 다양하다.

    대개는 통증 완화를 위해 복용하기 시작하지만 빠르면 일주일 안에 중독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위험하다. 한 번 중독되면 급격히 사용량을 늘리게 되고 급기야 불법 제조된 싼 값의 오피오이드까지 손을 뻗치는 경우가 다반사다.

    28세의 나이로 사망한 미국 메이저리그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의 좌완투수 타일러 스캑스의 임시 추모 공간이 마련된 미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에인절스타디움 앞.
    28세의 나이로 사망한 미국 메이저리그 로스앤젤레스 에인절스의 좌완투수 타일러 스캑스의 임시 추모 공간이 마련된 미 캘리포니아주 애너하임에인절스타디움 앞.
    미국 연방질병통제예방센터(CDC)에 따르면 지난해 미국에선 6만8557명이 각종 약물중독으로 사망했다. 이 가운데 5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오피오이드 오남용으로 목숨을 잃은 것으로 추산된다. 미국에서 연간 총기 사고 사망자가 3만9773명(2017년 기준)이니 총보다 오피오이드가 더 파괴적인 셈이다. 최근 CDC 보고서에 따르면 1999년부터 2017년까지 약물중독 사망자 70만2000여 명 중 68%인 47만7300명이 오피오이드 중독이었다. 오피오이드는 1990년대 말부터 서서히 확산되기 시작했다. 기존 마약보다 가격이 훨씬 저렴하고 처방전이 있으면 주변에서 손쉽게 구할 수 있었다. 기존 진통제가 약효가 없다고 하면 중독성에 대한 별다른 경고 없이 처방전을 써주는 의사들이 부지기수였다. 게다가 범죄 조직과 연계된 일부 의사들은 하루 수백 장씩 가짜 처방전을 남발하다 적발되기도 했다. CDC에 따르면 2012년 한 해 동안 무려 2억5900만 장의 오피오이드 처방전이 발급됐다. 미국 전체 인구가 3억3000만 명이니 얼마나 많은 처방전이 뿌려졌는지 알 만하다.

    일단 처방전만 손에 쥐면 누구나 대형 약국체인인 월그린이나 CVS, 심지어 월마트에서도 합법적 경로로 마약성 진통제를 구매할 수 있었다. 주부들과 청소년들까지 오피오이드 중독에 빠져든 배경이기도 하다. 이로 인해 1999년 불과 3400여 명이던 오피오이드 사망자 수가 20여년 만에 5만 명에 육박하게 된 것이다.

    특히 헤로인 등 기존 마약이 대도시를 병들게 했다면 오피오이드는 시골을 망친 주범이었다. 미국 50개 주 가운데 오피오이드의 1인당 소비량이 가장 많은 주는 대표적인 시골인 웨스트버지니아주였다. 오래전 가수 존 덴버의 노래에 나왔던 두메산골이 오피오이드 소비량 1위라는 점이 놀랍다.

    워싱턴포스트 보도에 따르면 2006~2012년 웨스트버지니아주 주민들은 연평균 1인당 67정을 복용했다. 이어 켄터키주(63정), 사우스캐롤라이나·테네시주(58정), 네바다주(55정), 오클라호마주(52정), 오리건주(51정) 순으로 1인당 소비량이 많았다. 워싱턴포스트는 “플로리다부터 조지아, 켄터키, 웨스트버지니아, 오하이오로 이어지는 ‘블루 하이웨이’를 따라 오피오이드가 급속히 퍼졌다”고 전했다. 파란 알약에 빗대 오피오이드 유통 경로를 ‘블루 하이웨이’로 칭한 것이다. 플로리다주의 클리닉과 제약공장들은 지난 20년간 오피오이드 공급의 허브 역할을 했다. 마약단속국(DEA)이 육로를 통한 불법 유통을 단속하기 시작하자 딜러들은 아예 개인 비행기를 이용해 오피오이드를 실어 날랐다. 기록을 분석한 결과 2010년 당시 전체 옥시코돈 처방전의 85%가 플로리다주에서 발급됐고 5억 정의 알약이 플로리다에서 팔려나갔다고 최근 AP통신이 전했다.

    마약성 진통제 ‘옥시콘틴’을 판매해온 퍼듀제약 사옥
    마약성 진통제 ‘옥시콘틴’을 판매해온 퍼듀제약 사옥
    수십 년간 오피오이드 생산으로 배를 불렸던 제약사들은 줄줄이 파산 위기에 직면했다. 미국 전역에 걸쳐 주요 제약사를 상대로 2000여 건의 손해배상 소송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지난 2007년부터 몇 개 주에서 소송이 시작됐으나 제약사들의 로비로 인해 10여 년이 속절없이 흘렀다. 그러나 트럼프 정부 들어 ‘오피오이드와의 전쟁’이 선언되고 시민단체와 국민 여론이 법원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지난 8월 오클라호마주 클리블랜드 법원은 존슨앤드존슨에 5억7200만달러(약 7000억원)를 배상하라고 판결했다. 1심이긴 하지만 오피오이드 제조와 관련한 미국 내 첫 손해배상 판결이었다. 글로벌 거대 제약사인 존슨앤드존슨은 자회사 얀센을 통해 진통제 ‘듀로제식’과 ‘뉴신타’ 등을 판매해왔다.

    이 제품은 국내에서도 판매되고 있다. 존슨앤드존슨 측은 식품의약국(FDA)이 허용한 수준에서 소량의 오피오이드만 사용했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중독성을 숨긴 채 대대적인 마케팅을 해왔다고 판단했다. 클리블랜드 법원은 판결문을 통해 “기업의 탐욕이 부른 사태”라 준엄하게 꾸짖었다. 또 다른 제약사인 인시스는 이미 파산신청을 냈다. 마약성 진통제 ‘옥시콘틴’을 판매해온 퍼듀제약도 100억달러 이상의 소송 합의금에 떠밀려 조만간 파산할 것으로 예상된다. 퍼듀제약은 지금까지 옥시콘틴 판매로 350억달러를 벌어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퍼듀제약의 오너 일가는 자신들의 사적 재산은 배상금으로 사용할 수 없다며 완강히 버티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선 미국 11개 주에서 합법화된 마리화나가 마약 대체재로 악용되는 오피오이드 수요를 줄일 수 있을 것이란 주장도 내놓고 있다. 마리화나가 일부 주에서 합법화되자 생산유통업자들은 차제에 전국적으로 판매를 허용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면서 중독성이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알려진 마리화나가 오피오이드 오남용을 반감시킬 수 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최근 비영리 연구기관인 ‘해젤든 베티 포드 재단’은 연구보고서에서 마리화나가 오피오이드나 다른 중독성 약물의 사용을 줄인다는 과학적 증거가 없다고 강조했다.

    [신헌철 특파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9호 (2019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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