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헌철 특파원의 워싱턴 워치] 한 해 4만 명 사망… 그래도 머나먼 美 총기규제, 총기면허제·위험인물 사전회수 등 규제 논의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대선서 누가 총대 멜까

    입력 : 2019.07.29 17:08:54

  • 전 세계 선진국 가운데 총기사고 사망자가 가장 많은 나라는 두말할 것도 없이 미국이다. 한 해에만 4만 명이 총기에 의해 목숨을 잃는다. 거의 한 해도 빼놓지 않고 공공장소에서 총기를 이용해 다수를 살상하는 증오 범죄가 발생하지만 세계 최강국 미국은 속수무책이다. 총기와 함께 써내려간 역사 탓만 하기엔 좀처럼 이해하기 힘든 무대응이다.

    시민단체 ‘브래디’가 미국질병통제센터(CDC) 통계(2013~2017년 기준)를 분석한 자료를 보면 미국에선 하루 평균 310명이 총에 맞고 이 가운데 매일 100명가량 사망한다. 총에 맞는 1~17세 청소년이 하루에만 21명에 달한다. 연평균으로 따지면 매년 11만3000여 명이 총에 맞고, 3만6400여 명이 죽는다.

    가장 최근 통계인 2017년 기준으로는 사망자가 3만9773명에 달했다. 통계를 집계한 1979년 이후 최고치이고, 20년 전인 1999년에 비해 무려 1만 명이 늘었다.

    그렇다면 미국인들은 얼마나 많은 총을 소유하고 있을까. 미국 인구는 3억2700만 명인데 민간인이 등록한 총기만 3억7100만 정(2014년 기준)이다. 전체 인구보다 총기 수가 더 많은 것이다. 총기를 보유한 가구가 약 40%에 달한다고 한다. 물론 정식으로 등록되지 않은 채 불법으로 유통되는 총기 수는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범죄에 사용되는 총기의 60%가량이 무등록 상태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열린 총기규제 집회에서 목말을 탄 한 소녀가 팔을 벌리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미국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열린 총기규제 집회에서 목말을 탄 한 소녀가 팔을 벌리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미국 여론조사 기관인 ‘갤럽’ 조사에 따르면 여성보다 남성, 유색인종보다 백인, 민주당보다 공화당 지지자들이 총기를 더 많이 보유하고 있다.

    올해 발생한 대형 총기사고만 해도 벌써 여러 건이다. 5월 말엔 해고에 불만을 품은 공무원이 버지니아비치 시청에서 총기를 난사해 11명이 사망했다.

    지난해에는 유대교 교회당에서 발생한 총기 테러로 미국 사회가 공포에 빠지기도 했고, 플로리다주 한 고등학교에서는 17명이 사망했다.

    뉴질랜드는 지난 3월 50여 명이 사망한 총기 테러 후 불과 엿새 만에 대대적인 총기규제 정책을 발표했다. 뉴질랜드는 자동·반자동 소총 판매를 금지하고 이미 판매된 총기는 정부가 되사기로 했다. 하지만 미국은 대형 사건이 발생했을 때만 총기 규제 주장이 반짝 주목을 받을 뿐 매번 제자리걸음이다. 마지막으로 연방 차원의 규제가 도입된 것은 1994년이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재임 중 피격을 받자 반자동 소총 판매를 금지하는 법안이 한시적으로 시행됐지만 2004년 일몰됐다.

    1791년 제정된 미국 수정헌법 2조는 국민들에게 ‘무장할 권리’를 인정한다. 2조의 문구는 ‘잘 규율된 민병대는 자유로운 주의 안보에 필수적이며 무기를 소유하고 휴대할 권리는 침해되지 않는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헌법이 민병대와 무관한 개개인의 총기 휴대까지 완전히 보장하는지에 대해선 법 해석상 논란이 여전하다.

    어쨌든 무장할 권리는 독립전쟁, 서부개척, 남북전쟁 등을 거친 240년 미국 역사의 산물이다. 여전히 다수의 미국인들이 총기 소유권을 일종의 건국정신으로 받아들인다. 광활한 영토로 인해 공권력에 의한 치안 유지에 한계가 있다는 점도 이 같은 사적 방어권을 뒷받침한다.

    그런 미국에서도 2020년 대통령 선거는 총기규제가 뜨거운 이슈로 떠오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물론 아직 갈 길은 멀고도 험하다. 공화당은 여전히 총기 소지는 미국인의 권리라는 인식에서 한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가장 큰 변화는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서서히 번지고 있는 총기 혐오다. 지난 5월 퀴니피악대가 미국인 1078명을 상대로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0%가 지금보다 엄격한 규제에 찬성했다. 특히 총기 구매자의 범죄전력 조회에는 무려 94%가 지지를 나타냈다. 지난 2월 민주당이 다수당인 하원은 연방 차원에서 전력 조회를 의무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지만 공화당이 장악한 상원 문턱에 걸려있는 상태다.

    이와 함께 미국 최대 로비단체로 알려진 미국총기협회(NRA)의 위상이 예전만 못하다는 점도 변수다. 1871년 창설돼 500만 회원을 거느린 NRA는 올해 들어 회계 비리와 내부자 거래 등으로 내홍을 겪고 있다. 연방 정부 차원의 움직임이 더딘 반면 주별로 총기 규제 움직임이 빨라지는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가장 최근에 대형 총기사고를 겪은 버지니아주는 지난달 의무적 신원 조회, 탄창에 10발 이상이 들어가는 공격용 총기 제한 등을 담은 규제 입법을 시도했으나 공화당의 반대로 논의조차 하지 못했다. 버지니아 리치몬드의 주청사 앞에선 총기 찬성과 반대 단체들이 각각 집회를 벌였다. 버지니아주는 2007년 한국계 조승희가 벌인 버지니아 공대 총기 테러의 상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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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밖에도 미국 내 20여 개 주에서 각종 규제 법안이 추진되고 있다.

    또 다른 규제 방안은 극단적 위험인물에게서 총기를 회수하는 이른바 ‘ERPO (Extreme Risk Protection Orders)’다. 매사추세츠주, 델라웨어주 등에서 2017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정책으로 총기 소유자의 가족이나 지인이 경찰에 위험성을 보고하면 판사가 판단해 총기를 미리 회수하는 것이다. 위험을 미리 표시한다는 뜻에서 ‘적기법(Red Flag Law)’이라고도 한다.

    지난해 플로리다주, 메릴랜드주, 뉴저지주 등에 이어 올해 뉴욕주와 콜로라도주 등이 이 방안을 추가 도입해 10여 개 주에서 시행되고 있다.

    민주당 대선 주자들은 다수가 총기규제 강화를 외치고 있지만 획기적인 아이디어는 없는 상태다. 코리 부커 상원의원 정도가 전면적인 ‘총기 면허제’ 도입을 주장하고 있다. 부커 의원은 자동차 운전면허처럼 총기를 구매하거나 소유한 사람은 모두 면허를 취득하게 하겠다는 공약을 내놨다. 소유자의 사진과 지문 제출은 물론 범죄와 병력 조사, 안전 교육 등을 의무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만약 민주당 당내 경선에서 총기 규제가 이슈화되면 조 바이든 전 부통령 등 유력 주자들도 규제 강화 쪽으로 점차 옮겨갈 가능성이 높고, 본선에서도 논쟁에 불이 붙을 공산이 크다. 일각에선 총기 규제에 소극적인 트럼프 대통령도 여론 분위기에 따라 부분적인 규제 도입을 약속할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실제로 백악관은 한때 범죄 경력 조회 제도를 전면적으로 실시하는 방안을 내부 검토한 바 있다.

    해마다 4만 명이 총기로 목숨을 잃어도 총기 규제에는 미온적인 미국이 내년 대선을 계기로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에 성공할 수 있을지 관심이 쏠린다.

    [신헌철 특파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7호 (2019년 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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