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헌철 특파원의 워싱턴 워치] 美 외교 쥐락펴락하는 트럼프 사위 쿠슈너, 중동부터 北핵까지 안 끼는 곳 없네
입력 : 2019.07.05 10:08:25
-
이명박 정권 당시 여의도 정가에는 ‘만사형통(萬事兄通)’이란 유행어가 떠돌아다녔다. 대통령의 형인 이상득 전 의원을 통하면 안 되는 일도 되게 만들 수 있다는 뜻이었다. 어느 나라 어느 정권이든 2인자는 있기 마련이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2인자를 허용하지 않고 자신이 모든 결정을 내린다는 독특한 국정운영 철학을 지니고 있다.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나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은 트럼프 대통령 지시를 집행하고 지원하는 수준에 그친다. 백악관 비서실장인 믹 멀베이니는 아직도 ‘대행’ 꼬리표를 떼지 못했다. 하지만 워싱턴 정가엔 백악관의 실질적 2인자는 대통령 사위인 재러드 쿠슈너(Jared Kushner)라는 인식이 팽배해 있다. 만사형통을 미국에 적용하면 ‘사위 서’자를 써서 ‘만사서통(萬事壻通)’쯤 될 듯하다. 쿠슈너는 백악관 수석고문이라는 공식 직함을 갖고 있다. 가족이 국정에 개입한다는 시각을 희석시키기 위해 월급은 받지 않는다. 쿠슈너는 1981년 뉴저지주에서 태어나 명문 하버드대와 뉴욕대 경영대학원을 나왔다. 부친의 거액 기부 덕분에 입학했다는 소문이 파다하지만 어쨌든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걸었다.
조부모는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유대인이었고, 부친인 찰스 쿠슈너는 트럼프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부동산 개발업자였다. 부친이 세금탈루 등으로 교도소에 가자 2005년부터 쿠슈너가 부동산 회사를 물려받아 경영했다. 뉴욕 5번가 666번지에 있는 고층 빌딩을 비롯해 타임스퀘어와 볼티모어 등지에 분포된 ‘쿠슈너 컴퍼니’의 부동산 자산은 8억달러(약 9500억원)를 넘는 것으로 추정된다. 쿠슈너는 개인적으로 ‘더 뉴욕 옵저버’라는 타블로이드 신문도 소유하고 있다. 지난 2016년 미국 대선에서 가장 먼저 트럼프 지지를 공개 선언했던 언론사였다.
쿠슈너는 주로 외교정책 방향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직접 조언하는 한편 러시아 스캔들 등 각종 국내정치 현안에도 개입하고 있다. 최근 출간된 마이클 울프의 신작 <포위(Siege)>는 쿠슈너에 관해 한 챕터를 할애해 상세히 전하고 있다. 익명의 취재원과 작가 개인의 추정이 뒤섞여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이 전하는 일화를 통해 쿠슈너의 위상은 상상보다 막강하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장인이 대통령이 된 직후 미국 외교가의 거물인 헨리 키신저를 ‘사부’로 모셨다. 키신저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 시대에 미중 데탕트를 입안한 이래 지금까지도 미국 외교정책에 막후 영향력을 행사하는 인물이다. 쿠슈너와는 유대계라는 공통점이 있다. 쿠슈너는 외교정책에 문외한이었지만 키신저의 사사를 받으며 자신이 트럼프 정부의 외교 지도를 그리겠다는 야심을 품게 됐다. 두 사람을 연결해준 것은 쿠슈너와 가까운 언론계의 거물 루퍼트 머독이었다고 한다. 머독의 전처이자 사교계 거물이던 웬디 덩은 중국 스파이라는 의심을 받아 지금은 미국 정가에서 축출됐으나 쿠슈너와 이방카를 연결해준 중매쟁이로 알려져 있다.
트럼프 정부가 들어설 무렵 중동 국가들을 비롯해 중국과 러시아까지 로비스트를 총동원해 쿠슈너에게 몰려들었다. 이때부터 백악관 복도에는 “쿠슈너는 스스로 ‘현대판 메테르니히’가 되고 싶어 한다”는 말이 떠다니기 시작했다. 19세기 초반 오스트리아의 외무장관이었던 클레멘스 메테르니히는 나폴레옹 해방전쟁에서 승리한 뒤 빈회의 의장을 맡아 유럽 외교를 주도한 인물이다.
트럼프 정권 탄생의 ‘설계자’로 불렸던 스티븐 배넌과는 앙숙이었다. 배넌은 중국과 러시아를 적으로 규정하는 극우 민족주의 성향이 강했던 반면 쿠슈너와 그의 친구들은 중국에 유화적인 태도였고 중동 문제에 관심이 더 컸다. 쿠슈너와 가까운 스티븐 슈와츠먼 블랙스톤 회장 등 월스트리트의 친구들은 대중 투자에 손실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중국과의 전면전을 꺼렸다는 얘기다. 결국 스티브 배넌이 먼저 토사구팽을 당했고 쿠슈너의 외교 개입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렉스 틸러슨 전 국무장관도 지난해 3월 경질됐다. 물론 미중 무역전쟁은 트럼프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와 피터 나바로 국가무역위원장,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 등 대중 강경파에 의해 쿠슈너 뜻대로 흘러가진 않았다. 하지만 노골적인 친이스라엘 정책과 사우디아라비아를 끌어들여 팔레스타인을 압박한다는 중동 전략은 쿠슈너의 작품이었다. 사우디의 실세인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쿠슈너는 상호 이익을 위해 절친한 친구가 됐다.
재러드 쿠슈너 백악관 선임고문
쿠슈너는 내년 대선 캠프에도 자신의 최측근이자 디지털 전문가인 브래드 파스칼을 선거대책본부장으로 일찌감치 배치해둔 상태다. 막후에서 자신이 선거 전략을 총괄할 계획인 것이다. 미국 내에선 이 같은 쿠슈너의 행보에 대해 비판적 시각이 많은 편이다. 친족을 중용하는 ‘네포티즘(Nepotism·족벌정치)’의 전형이라는 비난이다. 네포티즘이란 중세시대 몇몇 교황이 사생아를 조카라 부르며 중요한 자리에 앉힌 데서 비롯된 용어다.
쿠슈너는 백악관 입성 후에도 자신이 지분을 갖고 있는 친구의 회사에 9000만달러에 대한 출처 불명의 해외 투자를 유치했다는 의혹을 사고 있다. 이 밖에 씨티그룹에서 수억달러의 특혜성 대출을 받았다거나 이스라엘 부동산 사업가와 대규모 공동 투자를 하고 있다는 등 각종 의혹이 꼬리를 물고 있다.
지난 6월 초엔 트럼프 가족들이 영국 국빈 방문에 총출동해 여론의 눈총을 산 일도 발생했다. 중학생 막내 배런을 제외하고 트럼프 대통령의 성인 자녀인 도널드 주니어, 이방카, 에릭, 티파니와 맏사위 쿠슈너, 둘째 며느리 라라 등은 버킹엄 궁에서 열린 국빈 만찬에 몰려가 ‘인증 샷’을 찍느라 분주했다. 한국 문화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미국, 특히 트럼프 시대에는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신헌철 특파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6호 (2019년 7월) 기사입니다]
[ⓒ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