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옐런의 세계 돈의 흐름이 바뀐다
입력 : 2014.02.28 17:3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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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취임하는 날 뉴욕증시는 미 공급관리협회 제조업 지수가 8개월 만에 최저로 나타난 지표를 재료로 삼아 2% 이상 급락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옐런이 들어서면서 테이퍼링 축소가 과도하게 진행될 것이란 섣부른 전망을 쏟아내 시장의 낙폭을 키우는 데 일조했다. 월가의 펀드매니저나 자산운용 전문가들은 시장이 당초 예상했던 것과 다른 방향으로 요동을 치자 갑자기 대응책을 마련하느라 적지 않게 당황했다. 버냉키 전 의장 때 시작한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이 시장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약간의 금리상승을 예상해 채권을 제쳐놓고 주식 위주로 투자의 포트폴리오를 짰는데 시장이 그것과는 반대로 움직였기 때문이다.
당시 월가 전문가들은 미국 경기가 회복되는 것을 전제로 해서 FRB가 추가 테이퍼링에 나서면 시중금리가 상승하고 채권 값은 떨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세계 경제가 동반 상승하면 기업들의 실적이 향상될 것이고 그러면 주가도 상승할 것으로 전망했는데 돌출변수가 생긴 것이다.
월가가 기침을 하자 세계 증시가 함께 몸살을 앓았다. 한국의 코스피는 지난 2월 3일 1.09% 포인트가 하락한 데 이어 4일에도 1.72% 포인트가 하락하며 1800대 후반으로 내려앉았다. 3일 일본의 닛케이225는 295.40포인트(-1.98%) 하락한 1만4619.13으로 마감했다. 같은 날 싱가포르와 필리핀, 뉴질랜드 증시도 각각 1.0%와 0.4%, 0.5%가 떨어졌다. 전문가들은 미국의 양적완화 축소가 빨라질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신흥국의 위기를 촉발시킬 수도 있다는 불안심리가 확산된 게 주가 하락을 초래했다고 분석했다.
외환시장도 일시적으로 비슷한 양상을 보였다. 터키나 아르헨티나 등 일부 신흥국 통화에는 투매 양상까지 벌어졌다. 일부 언론은 신흥국 발 외환위기 가능성까지 제기했다. 일각에선 신흥국 금융시장이 불안하게 움직이는데도 미국 FRB가 과도하게 추가 테이퍼링을 시도하고 있다며 비판을 쏟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시장의 어설픈 움직임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한국 증시의 코스피는 그날 이후 나흘 연속 상승하며 옐런 취임 전 수준을 회복했다.
재닛 옐런
이는 최근 유로존의 경기가 소폭이나마 회복세를 타고 있다는 분석과 맞물린 것으로 보인다. 다만 지난 달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4년여 만에 최저치로 떨어져 디플레이션 우려가 불거지기도 했다.
특히 시중금리가 상승 조짐을 보이는데다 중국을 비롯한 일부 신흥국의 경기둔화 가능성이 제기돼 ECB가 금리를 추가로 내릴 것이란 전망이 나오기도 했다. 시장이 이런 전망을 한 것은 마리오 드라기 ECB 총재가 물가상승률이 1%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위험지대”라고 지목한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ECB는 디플레이션 조짐은 일부에서 나타나는 것이고 전반적인 경제는 소폭이나마 상승할 것으로 판단해 추가적인 금리인하를 유보했다. 그런데도 일부 전문가들은 ECB가 이번엔 동결했어도 다음 번 회의에선 금리를 내릴 것이라는 주장을 여전히 되풀이하고 있다.
테이퍼링 = 시장에 맡기기 옐런의 취임을 전후해 세계 시장이 이상반응을 보인 것은 두 가지 잘못된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옐런이 전임자인 버냉키가 시도한 긴축정책을 강화해나갈 것이라고 본 것이며 다른 하나는 테이퍼링을 중앙은행의 긴축으로 해석한 점이다. 일각에선 이런 시각에 따라 옐런이 취임하면서 올해 안에 테이퍼링을 마감하고 내년부터는 통화 증발을 중지할 것으로 천명할 것 같다는 예상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옐런은 버냉키의 정책을 유지하겠지만 잘 ‘계산된 단계(measured steps)’에 따라 양적완화 축소를 이어갈 것이라고 아주 잘 계산된 발언을 했다. 또 정책결정자들이 오직 “경제 전망에 주목할 만한 변화(notable change in the outlook)”가 보일 때에만 테이퍼링의 속도를 늦출 것이라고 했다.
버냉키가 시동을 건 양적완화 축소의 기조를 이어가되 시장에 충격을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속도조절을 하겠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옐런은 단지 주식시장이 요동을 치는 것만 갖고 경제를 판단하지는 않을 것이란 점도 강조했다. 금융시장의 혼란이 미국 경제의 전망에 주요한 리스크는 아니며 자산 매입은 “미리 설정된 경로(pre-set course)”를 가는 것도 아니라고 했다.어디까지나 자기 판단에 따라 유연하게 대응하겠다는 것이다. 시장이 안도한 것도 이 대목에서다.
옐런은 특히 연준이 세계 증시의 변동성을 “예의주시하고 있다”면서도 “현 단계에서 이러한 발전이 미국 경제 전망에 상당한 위험을 제기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는 게 우리의 생각이다”고 설명했다. 시장의 반응을 참조는 하되 너무 얽매이지는 않을 것이란 얘기다. 그런데 이를 뒤집어 보면 말은 부드럽게 하지만 실제 테이퍼링은 예정대로 해나간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 최근 공개한 연준의 1월 공개시장위원회 회의록도 이 점은 분명히 하고 있다. 연준 이사진 상당수가 버냉키의 테이퍼링을 지지하고 있다는 의미다.
이는 양적완화 축소가 긴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란 점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다시 말해 테이퍼링이란 FRB가 시장에서 채권을 사주는 것을 줄인다는 말이지 시장에 있는 돈을 환수해 가는 것은 아니란 얘기다.
연준은 2008년 리만 브라더스 사태로 대변되는 금융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시중에 대규모 자금을 지원하는 1차, 2차 양적완화를 단행한 데 이어 2012년에 종료된 이전 양적완화 프로그램(오퍼레이션 트위스트)을 보완하기 위해 2013년부터 매달 850억달러의 국채를 사들여 시중에 추가로 자금을 공급키로 한 바 있다.
버냉키 전 의장은 양적완화의 성과가 어느 정도 달성됐다고 판단하자 퇴임을 앞두고 매달 사들이는 국채 매입 규모를 점차적으로 줄여가겠다고 밝혔고 실제 실행에 옮겨 현재 월 650억달러로 국채매입 규모를 줄였다. 3월 중에 연준은 이를 550억달러로 또 줄일 계획이다. 이처럼 ‘점차적으로’ 국채매입 규모를 줄인다는 의미에서 나온 게 테이퍼링이다.
버냉키는 테이퍼링을 단행하면서 시장에 꼭 전해야 할 메시지 하나를 빠뜨렸다. 3차에 걸친 양적완화로 이미 시장엔 넘칠 만큼 돈이 풀렸으니 이제부턴 시장이 경제를 끌어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더라면 세계 경제가 받는 충격이 훨씬 줄었을 것이란 얘기다. 실제 전문가들은 양적완화 이후 시장의 자율성이 상당히 퇴보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금융위기 전엔 시장 참여자들이 적극적으로 리스크 테이킹을 해 가면서 투자를 해 시장 기능이 제대로 작동했는데 금융위기 이후 지나칠 정도로 리스크를 회피하느라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는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도 마찬가지며 한국 또한 예외가 아니다.
이와 관련해 달라스 연준은행의 선임 이코노미스트와 HSBC의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역임한 레이시 헌트 박사는 최근 양적완화가 경제를 둔화시키고 있음을 논리적으로 제시했다. 양적완화 이후 통화승수가 100년 만에 최저로 떨어지는 등 금융시스템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 42호에서 계속... [정진건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42호(2014년 0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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