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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니얼 갤러허 미 증권거래위원회(SEC) 상임위원…기업은 투자자에 합리적 판단할 정보 제공해야
입력 : 2013.09.03 09: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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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투자자가 투자 판단에 필요한 기본 정보를 갖고 있어야 합리적 투자를 할 수 있다는 게 미국 공시제도의 정신이자 출발점이란 얘기다. SEC 역시 이런 커다란 방향에 따라 기업공시 규정을 다루고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갤러허 상임위원은 공시제도는 투자자에게 상장사에 대해 알려진 모든 정보를 받을 수 있도록 보장하거나 어느 기업의 투자 위험을 모두 제거하기 위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보다는 중요한 투자 정보에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하는 게 제도의 목적이라고 했다.
그는 특히 기업이 어떤 자세로 공시를 해야 하는지는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이 미 의회에 보낸 메시지에 담겨 있다고 했다.
“의무공시 제도는 ‘매수자가 위험을 부담한다(Caveat Emptor)’는 고대로부터 내려온 규칙에다 ‘판매자 또한 조심하도록 해야 한다’는 후대의 교리를 추가한 것이다. (의무공시 제도는) 판매자에게 모든 진실을 말해야 하는 부담을 지우고 있다. 그래야 정직한 증권거래를 고무할 수 있고 이를 통해 공공의 신뢰를 확보할 수 있다.”
지구상에 기업공시 제도가 어떤 연유로 태어났고 기업들이 어떤 각오로 공시를 해야 하는지를 밝힌 것이다. 한마디로 기업이 정보를 제시하지 않아 투자자가 잘못된 판단을 해선 곤란하다는 얘기다.
갤러허 상임위원은 발행자가 제대로 공시를 하면 주주들은 그 정보에 입각해 의사결정을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이사회와 경영진에게 자금을 잘못 분배했거나 오용할 경우 책임을 물을 수 있다고 했다. 또 불만이 있다면 주주총회에서 의결권을 행사하거나 주식을 매각하는 방식으로 경영진의 행동이나 기업의 방향을 변경할 수 있다고 했다.
중요 정보만 공개하면 나머지 판단은 투자자 몫 그렇다면 기업들은 어느 정도 공시를 해야 할까.
갤러허 상임위원은 “80년 전 의회가 만든 멋진 공시제도는 정부의 규제 관료들이 특정 회사의 장점이나, 이사진과 경영구조, 비즈니스 관행 등을 심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고 찬양했다. 중요 정보만 공개하면 나머지 판단은 그 정보를 바탕으로 투자자가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규제가 남용되면서 공시제도가 전체 주주의 이익을 고려하는 대신 특수 이익집단에만 도움을 주는 부작용도 나타났다고 했다. 특정 상장사에 대해 특정한 지배구조나 비즈니스 관행을 유지하도록 압박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 2012년 콩고를 비롯한 분쟁지역에서 채굴한 ‘분쟁광물(자원)’ 사용내역을 공개하도록 강제한 공시 규정이 나오면서 기업들은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비싼) 원유나 광물을 사야 하는 문제가 생기기도 했다.
갤러허 상임위원은 이와 관련해 “지난 7월 초 존 베이츠 연방판사가 SEC의 ‘임의적이고 변덕스러운’ 자원 추출 규정에 무효를 선언했다”며 “베이츠 판사는 위원회가 ‘두 개의 상당한 오류’를 범했다고 지적했다. ‘위원회에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의 공시를 위임하는 법령을 잘못 해석’했고 또 ‘공시 요구사항에 어떠한 예외도 허락하지 않은 것’을 지적했다”고 밝혔다.
예를 들어 ‘분쟁광물’ 규정은 인도주의 목적에서 도입했는지는 몰라도 투자자들이 특정 기업의 성능과 가치를 평가하는 데 중요하다고 말하기는 힘들다는 것. 미 대법원은 이와 관련해 ‘어떤 입법도 모든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입법의 목적을 추구하지는 않는다’는 말로 정부 규제의 한계를 정해야 함을 명시하고 있다.
갤러허 상임위원은 “공개되는 정보가 객관적으로 투자자들에게 중요할지, 그리고 공개에 의한 이익이 비용보다 큰지를 판단할 것”이라며 SEC의 방침을 밝혔다. 공개 비용은 결과적으로 투자자들에게 전가된다는 게 그의 논리다.
SEC는 특히 지나치게 많은 공시는 투자자들에게도 부담만 되고 효용이 떨어진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상장사들이 중요도가 낮은 정보를 수백 페이지씩 공시해댈 경우 투자자들이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유용한 정보를 찾는 게 오히려 어려워진다는 것.
“과도한 정보 공개로 인해 투자자들이 정보를 해석하는 데 영향을 받는다면, 그것은 공시제도의 유용성을 근본적으로 저해하는 것이다. 투자자들이 어떤 정보를 유용하고 이롭게 생각하는지를 파악해야 하지만, 점점 더 세분화된 정보를 요구하는 요즘의 경향대로 갈 경우 정보 공개로 인한 비용 또한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결국 기업들은 자발적으로 투자자에게 유용한 정보를 공개해야 하지만 적정한 공시 범위를 정하는 것은 감독당국의 과제라는 얘기다.
의결권 자문사 역할 확대 한편 의무공시가 확대되면서 펀드를 운용하는 기관투자가들은 과도한 공시 자료 때문에 신탁의무(펀드 가입자들의 이익을 지켜야 하는 의무)를 제대로 이행하기가 쉽지 않게 된다고 했다. 이 때문에 미국의 기관투자가들은 요즘 주주총회에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지 의결권 자문사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수천 개 회사에 투자했다면 수천 개 회사의 자료를 일일이 다 확인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기관들은 주총에서 어떤 의견을 낼지 의결권 자문사에 묻고 그들이 하라는 대로 따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 의결권 자문사의 위상이 점점 높아진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해 갤러허 상임위원은 SEC가 의결권 자문사의 역할을 규정하고 어떻게 규제할 것인지 본격적으로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만 자문 결과는 반드시 주주 가치를 높이는 것이어야 한다는 게 그의 논지다. 한편 유럽에서도 이미 의결권 자문사 규제 논의가 본격화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정진건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6호(2013년 0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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