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진우 특파원의 ‘워싱턴 워치’]대리운전비 빼곤 다 싼 미국… 저물가가 걱정

    입력 : 2013.09.03 09:1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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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리운전비 빼고는 모든 게 미국이 한국보다 싸다.”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무역업을 하고 있는 재미교포 사업가 A씨의 말이다. 미국에서 생활하다 보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닌 게 아니라 미국에선 극히 일부 품목을 제외하면 뭐든지 한국보다 싸다. 한국의 절반 수준인 휘발유값을 비롯해 식료품값, 옷값은 물론이고 심지어 전기료, 수도료 등 공과금까지 한국보다 훨씬 저렴하다. 도대체 그 비결은 무엇일까.

    A씨의 말처럼 대리운전비의 사례를 들여다보면 그 비결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DC 인근에 한국인을 상대로 한 대리운전 서비스가 등장한 지는 꽤 오래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실제 대리운전 서비스를 이용하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가격이 비쌌기 때문이다. 한국 식당이 밀집한 애난데일에서 한국인이 많이 사는 매클린이나 비엔나까지 대리운전 비용은 한때 70달러(7만7000원)에 달했다.

    미국에서 대리운전비가 비싼 데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미국은 한국의 대도시처럼 대중교통이 발달하지 않은 탓에 대리운전기사를 태우고 돌아올 별도 차량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만큼 추가 비용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해 신속하게 이동하는 것은 한국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한국식 대리운전 서비스를 요구하는 수요가 늘어나면서 더 많은 업체가 시장에 뛰어들었고 경쟁이 심해지다 보니 가격도 내려갔다. 지금은 같은 거리의 대리운전비가 40달러(4만4000원) 선으로 떨어졌다. 심지어 일부 대리운전기사는 ‘마일(약 1.6km)당 2달러’라는 요율을 정해놓고 있다. 이 요율이 적용되면 요금은 30달러대로 낮아지게 된다.

    결론적으로 풍부한 수요와 치열한 경쟁이 고객에게 더 많은 선택권을 제공하고 가격마저 낮췄다는 얘기다.

    여기에 추가할 또 다른 비결은 저렴한 수입품 가격과 이민이다. 공산품의 경우 전 세계에서 가장 값이 싸고 질(質) 좋은 제품이 미국 시장에 모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말한 대로 미국 시장은 수요가 워낙 풍부하기 때문에 업체 입장에서도 박리다매(薄利多賣)가 가능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민을 통해 끊임없이 수혈되는 양질의 노동력이 생산성을 높이고 물가를 낮춘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이민법 개혁에 목을 매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물론 경제학적으로는 낮은 물가가 무조건 좋은 일은 아니다. 독(毒)이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요즘의 미국은 ‘저물가’가 걱정인 나라다. 자칫 잘못하면 물가 하락과 경제활동 침체가 동시에 진행되는 디플레이션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는 이르면 올 9월부터 채권 매입 규모를 줄이는 방식으로 출구전략(양적완화 축소)에 나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그러나 물가상승률이 목표치인 2.0%에 못 미치게 되면 연준의 출구전략도 주춤해질 수밖에 없다. 일본이 디플레이션 때문에 겪었던 ‘잃어버린 20년’을 미국이 경험하지 말란 법이 없기 때문이다. 낮은 물가가 미국 경제의 정상화에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의미다.

    사실 저물가는 거시경제 차원에서만 독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일반 개인에게도 미국의 저물가는 심각한 고통이 될 수 있다. 미국에서는 업체 간 경쟁이 워낙 치열하다 보니 한국처럼 유통단계가 길고 복잡했다가는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유통단계에서 창출되는 일자리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다.

    근로자 개개인에게 돌아오는 몫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우선 물가가 낮다 보니 회사가 월급을 올려주지 않아도 근로자들이 불평을 하기 어렵다. 게다가 2008년 경제위기 이후에는 경기침체와 과당경쟁의 영향으로 저임금 파트타임 일자리의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미국 근로자들의 실질소득은 제자리걸음이거나 오히려 뒷걸음질한 경우가 많다.

    외국인 입장에선 마냥 부러운 미국의 ‘낮은 물가’도 정작 미국인들에게는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함께 가지고 있는 셈이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6호(2013년 0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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