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SA]이진우 특파원의 ‘워싱턴 워치’…양적완화와 양극화 피해갈 수 없는 딜레마

    입력 : 2012.11.12 11: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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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 아무리 경제용어라지만 딱딱하기 그지없다. 실제로도 우악스러운 의미를 담고 있다. 중앙은행이 나서서 시중에 차고 넘칠 만큼 돈을 넉넉히 푼다는 뜻이다. 이렇게 돈을 뿌려놓으면 경제는 어떻게든 돌아가기 마련이다. 신용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은행으로부터 대출받기가 쉬워진다. 또 금리가 매우 낮아지기 때문에 저축을 하기보다는 당장의 소비를 늘리게 된다. 다 죽어가는 경기도 살릴 수 있는 고단위 처방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궁지에 몰린 미국이 세 차례에 걸쳐 양적완화 조치를 취한 이유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가 지난 9월 발표한 세 번째 양적완화 조치는 매달 400억달러의 모기지(주택담보대출) 채권을 무기한 매입한다는 것이다. 또 사실상 제로(0%) 수준인 초저금리 기조도 2015년 중순까지 연장한다고 밝혔다. 경기가 좋아져 실업률이 만족할 만큼 떨어질 때까지 마냥 돈을 풀겠다는 선전포고다.

    3차 양적완화 조치에 대해서는 유난히 많은 ‘뒷말’이 나오고 있다. 가장 심각한 걱정은 물가다. 이미 돈이 충분히 풀린 상황에서 추가로 돈을 풀어봐야 효과도 그다지 없을뿐더러 물가 급등만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다. 벌써부터 금값, 식료품값 등에서는 물가 급등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하지만 물가 불안은 어느 정도 예상했던 현상이기도 하다. 미 연준 입장에서는 실업률을 7%대로 끌어내릴 수만 있다면 3%대의 물가도 감수하겠다는 입장이다.

    최근 미국에서 떠오르고 있는 걱정거리는 따로 있다. 양적완화가 부익부 빈익빈, 양극화의 주범이 되고 있다는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에서 ‘양적완화=양극화 심화’ 공식이 가능한 이유는 과거에 비해 엄청나게 높아진 저축 성향 때문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막대한 손해를 입은 미국의 보통 가정들은 위험회피적인 투자 성향이 매우 강해졌다. 그래서 초저금리에도 불구하고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경우가 많다.

    공식통계에 따르면 지난 2분기 미국 가계 및 비영리단체의 저축액 총액은 6조9000억달러에 달한다. 이는 2000년 1분기 2조9000억달러의 2배가 넘는 규모다. 현재 미국의 6개월 CD 금리는 0.18% 수준으로 명실상부한 ‘제로금리’ 상황이다. 그러나 물가상승률은 2%에 달하는 만큼 은행에 돈을 맡긴 일반 가정으로선 재산이 허공으로 증발되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투자와 관련된 각종 지식과 정보로 무장된 부자계층은 사정이 다르다. 유동성 팽창으로 주가가 오르면 주식투자가 가능한 부자계층에게 경제적 이익이 집중되는 결과를 낳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의 주식투자 비중은 전체 국민 가운데 소득 수준이 높은 20%선에 불과하다. 이런 지적이 잇따르자 지난 10월 1일 벤 버냉키 미 연준 의장은 “양적완화는 저축자에게도 좋은 일”이라며 “저축자의 대부분은 주택을 소유하고 있고 양적완화로 경기가 살아나면 집값이 오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밝혀 논란에 불을 지폈다. 앞뒤가 안 맞는 궤변으로 자신의 양적완화 정책을 옹호했다는 지적이다. 버냉키 의장의 말대로라면 저축을 할 것이 아니라 있는 예금도 인출해 주택을 사들여야 정말 ‘좋은 일’이 생기게 된다. 무지막지한 양적완화로 경제가 지속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가계의 대부분이 상당 수준의 부채를 짊어지고 사는 한국 가계의 경우에는 금리인상이 가처분소득의 감소와 주택가격 폭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공감대’가 어느 정도 형성돼 있다.

    그러나 양적완화 또는 초저금리의 장기화는 저축률의 과도한 둔화와 이에 따른 잠재성장률 하락으로 경제 전반을 왜곡시킬 수 있다. 무엇보다도 가계부채를 계속 불려나가 서민 계층을 위기에 빠뜨릴 수도 있다. 양적완화가 양극화 심화로 이어지는 미국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6호(2012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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