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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gapore] 싱가포르의 영리한 통화외교
입력 : 2011.09.15 16:5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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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촉동 전 수상은 역외거래센터 설립 합의 후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중국이 자신의 페이스에 따라 위안화를 국제화시켜 나가는 데에 싱가포르가 뭔가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 보고 금융협력을 해나가고 있다”고 겸손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그동안 진행돼 온 것들을 들여다보면 싱가포르는 국제금융센터로서 지위를 강화하기 위해 대단히 야심찬 행보를 해왔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히 금융협력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치안보협력이라는 큰 그림 속에서 진행되는 싱가포르의 21세기 금융외교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싱가포르 투자 급증
싱가포르가 중국과 각종 협력을 강화하는 것은 국제금융센터로서의 지위를 지키면서 한 단계 도약하는 데 대단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싱가포르 금융서비스에서 현재 가장 빠르게 확대되고 있는 부문이 고액자산가들을 상대로 하는 프라이빗 뱅킹(private banking)이다. 싱가포르는 최근 몇 년 동안 새로운 금융법안을 통과시키면서 스위스보다 더 강력한 고객비밀보호제도를 도입했다. 이에 따라 외국계 금융기관들의 프라이빗 뱅킹이 대거 들어와 있다. 스탠다드차타드은행은 영국 런던에 본사가 있지만 프라이빗 뱅킹 부문만은 본부를 싱가포르에 둘 정도로 싱가포르를 중시한다. 싱가포르 국내 은행의 프라이빗 뱅킹도 대폭 강화했다. 싱가포르에서 자산규모 2위인 OCBC은행이 네덜란드 ING은행의 프라이빗 뱅킹 부문을 14억 달러에 인수하자 싱가포르 정부는 이 프라이빗 뱅킹 부문이 ‘싱가포르은행(Bank of Singapore)’이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파격적으로 지원했다. 국내에서 예컨대 신한은행의 프라이빗 뱅킹 부문에 ‘한국은행’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도록 정부가 허락한 것과 마찬가지다.
싱가포르 통화청(MAS).
아시아서 두 번째 큰 외환거래 시장싱가포르 국부 리콴유(가운데)는 중국 위안화를 싱가포르로 끌어내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물론 중국의 바스켓 방식과 싱가포르의 바스켓 방식은 다소 다르다. 중국은 환율이 움직일 수 있는 범위를 좁게 두고 정부가 향후 환율 방향에 대한 사인도 보내지 않는다. 반면 싱가포르는 환율이 움직이는 범위를 넓게 주고 MAS가 주기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기를 바란다는 사인을 보낸다. 한국도 1997년 아시아 금융위기를 당하기 이전에 싱가포르와 중국의 중간 형태에 해당하는 바스켓 방식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바스켓 방식의 기본적인 철학이나 원리는 비슷하다. 이 제도는 주요 교역 상대국 통화에 일정한 가중치를 둬서 바스켓을 구성하고 이에 따라 환율이 결정되도록 한다. 자유변동환율제와 고정환율제의 중간에 있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고정환율제와 달리 경상수지, 인플레율, 국가 간 자본이동 등을 반영해 환율변동을 허용한다. 한편 자유변동환율제와 달리 외환시장이 아니라 해당국 정부가 환율 결정의 주도권을 쥔다. 정부는 바스켓을 만들고 외환시장 흐름 등을 살펴서 환율이 결정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다.
싱가포르의 바스켓 방식은 2.0~2.5% 가량으로 알려진 ‘공개하지 않은 정책밴드(undisclosed policy band)’를 줘서 그 범위 내에서는 환율이 자유롭게 움직이도록 한다. MAS가 주기적으로 발표하는 ‘MAS 통화정책성명서’는 두 가지만 명시적으로 밝힌다. 첫째는 MAS가 계산하는 명목실효환율(NEER, nominal effective exchange rate)이 그동안 어떻게 변화해 왔는가 하는 내역이다. 둘째는 MAS가 앞으로 환율 움직임을 어떻게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점이다. 어떤 때는 ‘중립적’이라고 얘기한다. 현재 수준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보다 점진적 절상’ 혹은 ‘보다 점진적 절하’라는 말이 나올 때도 있다.
이 제도가 시장 참가자들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명료하다. 정부가 생각하는 ‘적정환율범위’ 내에서는 자유롭게 외환거래를 하고 환투기도 하지만 그 범위를 넘지는 말라는 것이다. 외환거래에서 4~5% 가량의 변동폭은 상당히 큰 것이다. 개인들이 선물환거래를 할 때도 증거금을 2~3%만 예치하면 된다. 2% 증거금을 예치했는데 환율이 1% 움직이면 50%의 수익을 올린다. 금융기관들은 증거금을 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수익률이 무한대다. 실제로 싱가포르에는 외환거래를 활용한 금융상품이 대단히 많다. 예금 금리가 현재 연 0.1%에 불과하기 때문에 다른 고수익 금융상품을 찾는 수요가 많고 이에 부응해 연 10~15%의 수익률을 제공해주는 외환거래활용 구조화상품(structured product)이 다양하게 판매되고 있다. 시장이 자유롭게 판단하고 환투기 수익도 올릴 수 있는 여지는 폭넓게 만들어놨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 자유는 정책밴드 내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밴드를 넘어서는 시장 움직임에 대해서는 강력한 ‘경고’와 ‘응징’이 따른다. 우선 시스템 자체가 지속적인 경고 메시지를 보낸다. 밴드 내에서 움직여도 수익 올릴 기회가 많은데 구태여 밴드를 넘어서면서까지 돈을 벌려고 무리하지 말라는 것이다. 한편 밴드를 건드리는 세력을 응징하기 위해 막강한 자금력을 동원한다. 공식적으로 2400억 달러에 달하는 외환보유액이 있지만 국부펀드인 정부투자공사(GIC) 등이 동원할 수 있는 외환 규모는 베일에 가려 있다. 환투기 세력 입장에서는 상대방의 ‘실탄’이 얼마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함부로 달려들 수 없다.
또 싱가포르달러에 대한 공매도(short-selling)를 사실상 금지하고 있다. 이를 위해 외국 금융기관들이 일정 규모 이상의 싱가포르달러를 빌릴 때는 신고하는 것을 의무화하고 있다. 이것은 달리 표현하면 싱가포르달러의 ‘국제화’를 어느 정도 포기했다는 말이다.
싱가포르 통화외교 우리도 배워야싱가포르 통화외교를 이끄는 사람 중 한 명인 리셴룽 싱가포르 총리.
그래서 ‘양적완화(quantitative easing)’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면서 달러를 찍어내도 큰 문제가 없다. 그런데 한국은 이런 통화 헤게모니가 없다. 어떻게 힘도 없는 한국이 환율을 미국처럼 시장에 맡겨서 원화가치가 제대로 유지되기를 기대할 수 있나.
싱가포르와 한국 간에 통화외교 능력의 차이는 환율에 그대로 반영돼 있다. 원화는 1970년대 초에 미 달러당 310원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달러당 1200원에 달해 있다. 그동안 ‘경제기적’을 달성했어도 원화가치는 미 달러화에 대해 75% 가량 절하됐다.
미국은 종이돈 찍어내면서 물건을 샀지만 한국은 똑같은 값에 갈수록 더 많은 물건을 공급하며 경제성장을 했다. 반면 싱가포르달러는 1970년대 초 미 달러당 3싱달러였다. 지금은 미 달러당 1.2싱달러에 근접했다.
싱달러는 지난 40년 동안 미달러에 대해 2.5배가량 절상됐다. 2010년 말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2만 미 달러를 간신히 넘은 반면 싱가포르의 1인당 국민소득은 4만7000달러였다. 싱가포르는 ‘경제 기적’을 이루면서 ‘통화 기적’도 달성했다고 할 수 있다.
싱가포르가 한국에 비해 금융 발전에 여러 가지 유리한 여건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싱가포르가 현재의 기적을 일군 데는 통화외교를 잘 펼쳤다는 점을 무시할 수 없다. 중국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싱가포르의 통화외교 역량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는 것 같다.
[신장섭 / 싱가포르국립대 경제학과 교수 ecssjs@nus.edu.sg]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0호(2011년 07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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