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용범 특파원의 월스트리트 인사이트] ‘고속 인플레, 저속 경기 침체’ 신음하는 美 경제

    입력 : 2022.09.29 16:34:00

  • 지난 9월 14일(현지시간) 오전 뉴욕 맨해튼 34번가를 걷다가 깜짝 놀랄 광경을 발견했다. 신발 판매 전문점인 풋록커(Foot Locker) 매장이 문을 열기 전부터 손님들이 줄을 길게 서 있는 모습을 발견해서다. 명품 매장 입장을 위해서 줄을 선 모습은 쉽게 볼 수 있지만, 신발 할인 매장에 이렇게 사람이 몰린 것은 처음 보는 일이었다. 같은 날 맨해튼 57번가 일대에 있는 샤넬, 루이뷔통 등 명품 매장에도 길거리에 줄을 선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미국 경제가 둔화되고 있다는 소식이 계속 들리고 있지만 이렇게 소비는 양극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월마트, 타겟 등의 최근 실적을 보면 의류 같은 임의 소비재 판매가 둔화되고 PB 브랜드 상품 등 저가 상품의 판매는 더 늘어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명품 매장과 할인마트에는 사람들이 여전히 몰리고 있다. 하지만 이런 두 그룹의 중간에 있는 유통체인은 갈수록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아예 비싸거나 아예 싸지 않으면 미국인들이 지갑을 열지 않는다는 뜻이다. 팬데믹 이후 기록적인 성장세를 보였던 전자제품 등 판매는 크게 감소하고 있다. 더 이상 재택근무에 따른 신규 수요가 창출되지 않는 영향이기도 하다.

    팬데믹 이후 만성적인 구인난을 겪어왔던 노동 시장에도 변화가 일고 있다. 골드만삭스를 비롯한 금융권에서 팬데믹 이전에 수시로 단행했던 해고를 재개하고 나섰다. 골드만삭스와 같은 일류 투자은행에서도 그간 구인난으로 해고를 자제해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가상화폐 거래소 등 상반기에 충격을 받았던 업종을 시작으로 이제 테크 기업뿐 아니라 금융, 유통 등 분야별로 인력 군살 빼기에 돌입했다.

    미국인들의 주거비용이 날로 상승하고 있는 이유로 주택 구매 수요보다 렌트 수요가 더 커지고 있기 때문으로 진단했다. <사진 연합뉴스>
    미국인들의 주거비용이 날로 상승하고 있는 이유로 주택 구매 수요보다 렌트 수요가 더 커지고 있기 때문으로 진단했다. <사진 연합뉴스>
    미국에서 발표되는 경제지표를 보면 아직 위기의 기온이 영하로 내려간 상태는 아니다. 매주 발표되기 때문에 다른 지표보다 더 실물경기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실업수당 청구 건수는 최근 5주 연속 하락하는 등 불황의 기온을 느끼기 어렵다. 9월 둘째 주 신규 실업수당 청구 건수는 21만3000건으로 전주 대비 5000건 감소했다. 다우존스가 집계한 전망치 22만7000건 대비 1만4000건이 적었다. 소비 역시 크게 위축되지 않았다. 소비는 미국 GDP의 3분의 2 이상을 떠받치는 기둥이기 때문에 소비 적신호는 경기 침체의 바로미터로 여겨진다.

    8월 소매판매는 전월 대비 0.3% 증가했다. 다우존스가 집계한 월가 전망치가 -0.1%였기 때문에 양호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이런 통계는 좀 더 면밀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8월 지표가 발표되면서 7월 발표 수치가 조정됐기 때문이다. 이번 발표에서 7월 소매판매는 전월 대비 0.0%에서 -0.4%로 수정됐다. 이를 고려하면 8월 소매판매가 전월 대비 0.3% 증가했다고 하더라도 6월 수준보다는 후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자동차와 부품 판매 증가율이 2.8%를 기록했기 때문에 이를 제외하면 -0.3%를 기록했다.

    ▶초고가, 초저가 아니면 안 팔려 실물 경제에서도 경기둔화의 흐름이 나타나고 있다. 글로벌 물류기업인 페덱스는 아시아, 유럽 등 주요 시장에서 수요 감소로 분기(6~8월) 이익이 시장 절반 수준으로 추락하는 등 대폭 악화될 것으로 예고했다. 라즈 수브라마니암 페덱스 CEO는 “전 세계에 걸쳐 모든 분야에서 운송량이 광범위하게 감소하고 있다”며 “글로벌 경기침체를 예상한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항공기로 운송을 하는 고부가가치 제품의 운송 수요가 감소하고 있는 점에 주목했다. 팩트셋에 따르면 S&P500 기업들의 3분기 순이익 증가율은 3.7%에 그칠 전망이다. 이는 6월 말 전망치(9.8%) 대비 6.1%포인트 하락한 것이다. 연간 단위 순이익 증가율은 같은 기간 9.5% 에서 7.9%로 하락했다.

    더 큰 문제는 물가다. 7월부터 하락 기조로 돌아설 것으로 예상됐던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이 8월에 다시 고개를 드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8월 소비자물가지수 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8.3%를 기록, 시장 전망치보다 0.3%포인트 높았다. 전월 대비로는 0.1%가 상승하면서, 0.1% 하락할 것이라는 전망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더 큰 문제는 변동성이 큰 에너지, 식료품 가격을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가 잡히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근원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6.3% 오르면서, 전월 대비 0.4%포인트 높아졌다. 전월 대비로는 0.6% 상승하면서 0.3% 상승할 것이라는 전망의 두 배를 기록했다. 이 같이 근원 소비자물가가 잡히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주거비 때문이다. 소비자물가지수에서 약 3분의 1 비중을 차지하는 주거비는 지난 8월 전년 동월 대비 6.2% 상승했다. 전월 대비로는 0.7% 상승했다. 주거비용 상승 폭은 1990년대 초 이후 가장 큰 폭이다.

    팬데믹 이후 과열 양상을 보이던 부동산 시장이 이제 서서히 안정되어 가고 있지만 렌트 시장은 성격이 다르다. 그간 가파르게 올랐던 매매 시세 여파로 렌트 시장은 여전히 상승 압박을 받고 있다. 기자가 살고 있는 뉴저지주 버겐카운티 주택 단지의 경우 2년 전 대비 주택 렌트비가 20~40% 오른 곳이 대부분이다. 최근 수리를 해 상태가 양호한 집은 시장에 내놓기가 무섭게 사라지는 현상이 계속되고 있다. 부동산 정보망에 공식 매물로 등재되기 전에 알음알음 물밑에서 거래가 끝나는 경우도 다반사다. 미국의 주택담보대출(모기지) 금리가 6%를 넘어서며 매매 시장은 옥석 가리기가 시작됐지만 렌트 시장에는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다.

    뉴욕의 한 부동산 중개인은 “모기지 금리가 뛰다보니 집을 사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렌트를 구하려는 수요가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팬데믹 이후 모기지 금리가 역사상 최저 수준으로 하락하며 집을 사는 것이 렌트비를 내는 것보다 유리해지자 집을 사들이던 수요가, 이제 다시 렌트를 구하려고 하자 렌트 시세가 진정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물가를 잡기 위해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보다 공격적인 긴축정책에 돌입할 가능성이 커졌다. 파월 의장은 잭슨홀 연설 등을 통해 “가계 기업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물가를 잡겠다”고 공언한 상태다. 이 때문에 ‘고속 인플레이션, 저속 경기침체’ 현상은 당분간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전망된다. 연준이 인플레이션의 여파를 과소평가했다는 비판이 봇물을 이루자 파월 의장은 시장 예상을 뛰어넘는 매파적 통화정책을 펴고 있다. 뒤늦게 발동이 걸려, 식어가는 경기의 불을 아예 꺼버릴 수도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신현송 국제결제은행(BIS) 조사국장은 잭슨홀에서 매경과 가진 인터뷰에서 “강달러 현상이 당분간 지속될 것”이라며 “과거에는 각 국가들이 수출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 자국 화폐 가치 약세를 유도하는 환율 전쟁을 벌였지만 이제는 인플레이션을 차단하기 위한 ‘역환율 전쟁’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연준의 매파적 행보가 계속되는 한 ‘킹달러 현상’을 가중시켜 원화 가격을 비롯해 세계 주요국 통화의 약세를 지속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박용범 특파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45호 (2022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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