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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범 특파원의 월스트리트 인사이트] 잡히지 않은 美 물가에 바이든 리더십 휘청 테이퍼링 조기 종료 부상… 내년 하반기나 안정
입력 : 2021.11.30 10:5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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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몰이 밀집해 있는 미국 뉴저지주 패러무스(Paramus)에 있는 이케아 매장. ‘위드 코로나’ 시대가 열린 후 늘 쇼핑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곳이다. 가구 매장 등에서 샘플을 구경하고 온갖 고민 끝에 주문을 하려다보면 황당할 때가 적지 않다. 재고가 없는 경우가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온라인 가구 쇼핑몰로 유명한 ‘웨이페어(Wayfair)’도 마찬가지다. 미국 최대 유통체인인 월마트에서도 가구를 주문하면 수개월 뒤에나 받을 수 있는 경우가 많다. 가장 큰손인 월마트조차 이렇다면 다른 유통체인은 말할 것도 없다. 아마존이 3분기에 시장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실적을 거둔 것도 이런 공급난 때문이다.
‘미국판 다이소’로 불리는 ‘달러트리(DollarTree)’는 모든 제품을 1달러에 파는 곳이다. 북미 지역에 1만5000여 개 매장을 갖고 있어 미국 어디서나 맥도날드만큼 흔하게 볼 수 있는 유통체인이다. 이곳은 최근 ‘신성불가침’처럼 여겼던 1달러 정책을 최근 포기했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공급망 대란과 원가 상승으로 더 이상 1달러에만 물건을 팔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이 1990년대 이후 1~3%의 낮은 물가상승률을 기록한 것은 이런 유통체인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코로나19 사태 이후 역사가 달라졌다.
소비 천국인 미국에서 최근 가장 어려운 것이 소비다. 물건을 사기가 너무 어렵다. 집, 자동차도 마찬가지다. 극심한 공급난이 계속되고 있지만 수요는 진정되지 않고 있다.
이제 인플레이션은 경제 문제가 아니라 조 바이든 대통령을 위태롭게 하는 정치 이슈로 확산하고 있다. 10월 물가상승률이 발표되자 바이든 대통령은 “물가 상승 추세를 뒤집는 것은 나의 최우선 순위”라고 선언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에너지 가격을 물가 급등의 주된 원인으로 지목하면서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NEC)와 미 연방거래위원회(FTC)에 관련 대책과 조치를 주문했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대응이 늦었다는 점에 실망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워싱턴포스트와 ABC방송은 11월 7~10일 미국 성인 1001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바이든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이 41%를 기록했다고 밝혔다. 취임 이후 최저치다. 이같이 지지율이 급락한 것은 경제 문제 때문이다. 응답자의 70%는 경제에 대해 비관하고 있다고 답했다. 지난 10월 중순 정치전문 미디어인 폴리티코가 한 여론조사에서는 62%가 인플레이션에는 바이든 행정부가 책임이 있다고 평가했다.
바이든 정부가 인프라 예산법안에 이어 역점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사회복지 및 기후변화 예산안 통과에도 악역향을 미치고 있다. 무디스 애널리틱스는 1조달러의 인프라 예산에 이어 2조달러의 사회복지·기후 예산은 2022년부터 2024년까지 물가상승률을 평균 0.3%포인트 더 높일 것으로 추산했다. 민주당 내에서도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민주당 내 중도파로 예산안 협상에서 쓴 소리를 내고 있는 조 맨친 상원의원은 “누구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기록적인 인플레이션이 미국인들에게 미치는 위협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11월 소비자물가상승률 7% 육박 다른 품목보다 미국인들이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유가다.
지난해 6월 기자가 미국에 뉴욕에 부임했을 때 뉴욕주 일대 휘발유 가격은 갤런당 1.99달러 안팎이었다. 1갤런이 약 3.785ℓ이므로 1ℓ당 600원꼴이었다. 최근에는 휘발유 가격이 갤런당 3.6달러 안팎이다. 거의 두 배 수준으로 올랐다. 팬데믹 직후 국제유가 선물 시세가 마이너스를 기록하기까지 했지만 이제 국제유가는 배럴당 80달러를 넘어 90~100달러를 향해 가고 있다. 나날이 오르는 휘발유 가격을 보면 인플레이션이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 16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에서 중국 당국이 보유한 비축유 방출을 요청했다. 국제 유가를 안정시켜 미국 내 인플레이션을 해소하려는 포석이다. 미중 간 첨예한 자존심 대결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인플레이션 앞에서는 바이든 대통령도 자존심을 버린 셈이다.
재닛 옐런 재무장관은 미중 정상회담 직전 중국 측이 끈질기게 요청했던 관세 인하 문제를 고려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미국 내 물가 안정을 위해 대중 관세 인하 카드까지 미국이 꺼내든 것이다.
연준은 지난해 6월부터 매월 1200억달러 규모 채권(국채 800억달러, 주택저당증권(MBS) 400억달러)을 매입해 시장에 유동성을 공급해왔다. 이를 매월 150억달러씩 감축하는 것이 테이퍼링의 기본 계획이다. 이런 목소리가 시장에서는 많이 나왔지만 이제는 연준 인사들이 동조하고 있다.
제임스 불러드 세인트루이스연방준비은행 총재는 “테이퍼링은 내년 6월이 아니라 3월까지 끝내서 금리 인상 여지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불러드 총재는 내년부터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FOMC(연방공개시장위원회: 한국 금융통화위원회에 해당) 위원이 된다. 이런 매파적(통화 긴축 선호) 성향의 위원이 많아질수록 금리 인상이 앞당겨질 가능성이 높다.
제임스 나이틀리 ING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기존 전망보다 3개월 빠른 2022년 1분기 내 테이퍼링 일정이 마무리되고 적어도 내년 말까지 0.25%포인트 정도의 금리 인상이 있을 것”이라 말했다. 일부 연준 인사들은 테이퍼링 와중에 금리 인상을 해도 무방하다는 매우 급진적인 노선을 주장하고 있을 정도다. 같은 민주당 정부에서 재무장관을 지낸 래리 서머스 전 하버드대 총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인플레이션을 경고하고 나섰다.
제롬 파월 연준 의장, 재닛 옐런 재무장관을 향해 직격탄을 날렸지만 이들은 “인플레이션은 일시적일 것”이라고 반박해 왔다. 시간이 갈수록 서머스 전 장관의 예측이 더 현실에 가까워지고 있다.
민주당 정부와 관계를 맺었던 인사들의 충언은 쏟아지고 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당시 백악관 경제자문위원회(CEA) 위원을 지낸 제이슨 퍼먼 하버드대 교수는 “인플레이션이 ‘일시적’이라고 했던 연준이 궁극적으로 틀렸음이 입증될 경우 쉬운 해결책은 없을 것”이라며 “이미 인플레이션이 많은 사람의 예상을 뛰어넘었다”고 말했다.
지금이 가장 어려운 시기이고, 내년 하반기부터는 안정될 것이라는 견해도 나온다. 골드만삭스를 비롯한 주요 투자은행은 내년 7월부터는 공급망 혼란이 안정되고 물가가 팬데믹 이전 수준으로 안정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극적인 변화가 찾아올지 지켜볼 일이다.
[박용범 특파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5호 (2021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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