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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로 아세안 車시장 패권에 도전하는 韓·中, 투자 미뤘던 日, 모바일폰·가전 전철 밟을까 우려
입력 : 2021.08.27 16:2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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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기차 시대를 맞아 일본이 절대 우위를 점하고 있는 아세안의 자동차 시장의 기류가 묘하게 흐르고 있다. 운송 수단의 패러다임이 변하는 시점을 이용해 그동안 일본에 눌려 기를 펴지 못했던 후발 주자들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생기는 변화다.
글로벌 자동차 업계에서는 전기차가 아세안 차 시장의 판도를 흔들 수 있는 게임 체인저가 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일본의 아성에 가장 적극적으로 도전하는 이들은 한국과 중국이다. 한국은 현대차가, 중국은 장성자동차가 아세안 현지에 생산 공장을 세우며 시장 공략에 나섰다. 일견 3파전으로 보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본 vs 한국, 중국의 구도다. 이는 현대차와 장성자동차가 지역 거점을 각각 인도네시아와 태국으로 삼으며 정면 대결을 일단은 피했기 때문이다.
두 회사의 아세안 공략 전략도 다르다. 현대차는 해양 아세안의 거점 국가인 인도네시아를 발판으로 내륙 아세안을 공략하는 모양새를 취하고 있다. 회사는 내륙의 중심 국가로 베트남을 생각하고 있지만 인도네시아에 일단은 전력투구한다는 전략이다. 이에 반해 장성자동차는 아세안 내 일본 자동차 회사들의 심장부인 태국에서 직접 정면 승부를 걸고 있다. 태국에서 기반을 잡은 후 국경을 맞대고 있는 인근 국가로 사업을 확장한다는 것이다.
언젠가는 한국과 중국도 아세안 자동차 시장에서 대결을 피할 수 없겠지만 단기간 내 승부를 위한 대립은 벌어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막 각각 진출한 인도네시아와 태국에서 일본 자동차 회사와 맞붙기에도 상황이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두 회사가 아세안 진출로 삼은 무기는 이제 막 산업이 싹트기 시작한 전기차다.
루훗 빈사르 빤자이딴 인도네시아 해양투자조정부 장관 등 관계자들이 지난해 11월 브카시에 건설 중인 현대자동차 공장을 방문했다.
일본이 아세안 시장을 석권해 꾸준히 장기 집권할 수 있었던 것은 자동차를 파는 데 그치지 않고 차량 정비 등 사후관리까지 시스템적으로 운영되게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체 부품 공급망을 갖추는 것은 그만큼 시스템이 안정성을 갖춘다는 의미다. 가격도 아세안의 중산층이 큰 부담 없이 살 정도로 책정했다. 여기에 고속도로 등 차량이 달릴 수 있는 인프라가 일본 정부 주도로 꾸준히 아세안 각국에 제공됐다. 이런 치밀한 전략 덕분에 일본 차의 아세안 지배는 롱런이 가능했다.
이는 전기차 시대가 도래하더라도 여전히 유효한 방정식이다. 특히 전기차는 충전 설비란 기존에 없던 연료 보급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때문에 현대차는 차량을 현지에서 생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안정적 부품 공급망 구축, 충전 설비 등을 구축해 나가야 기존 강자인 일본 업체들과 제대로 된 경쟁을 벌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충전 설비 구축에 우리 정부와 현지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이 이뤄지면 금상첨화다. 이런 점에서 현대차의 인도네시아 생산 공장과 맞먹는 규모의 배터리 공장 설립 계획에 더욱 눈길이 가는 이유다.
한 현지 교민은 “배터리 공장까지 설립하려는 것을 보니 전기차로 아세안을 공략하는 현대차의 행보가 과거와는 다른 것 같긴 하다”면서 “현재 수준의 인프라로는 일본 업체와 게임이 안 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꼬집었다.
배터리 공장은 2023년 완공 계획이며, 2024년부터 생산되는 현대차와 기아의 전기차 모델에 탑재될 예정이다. 현대차는 2019년 인도네시아에 1조7700억원 규모의 생산공장을 짓기로 결정하고 현재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계획대로라면 2022년 ‘made in Asean’으로 현지에서 전기차를 생산해 선보일 예정이다.
현대차가 인도네시아를 전기차의 아세안 진출 거점으로 삼은 것은 인도네시아 정부와의 적극적인 교감도 한몫했다. 인도네시아는 첨단 산업 유치의 일환으로 전기차를 육성키로 하고 그 파트너로 현대차를 점찍어 공을 많이 들였다. 유치 과정에서 법인세 및 합작공장 운영을 위한 각종 설비 및 부품에 대한 관세 면제 혜택 등 다양한 인센티브를 줬다. 인도네시아가 전기차에 관심이 많은 것은 자국의 고질적 문제인 환경오염 문제를 해결하고, 이를 통해 경제 체질을 바꾸려는 속내가 들어있다. 여기에 현대차가 전기차로 아세안 시장 공략에 성공한다면, 인도네시아는 베트남이 하이퐁에 진출한 삼성전자 덕에 스마트폰 수출 강국으로 거듭난 것처럼 역내 대표 전기차 수출국이라는 타이틀을 확보할 수 있다는 계산도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도네시아는 아세안의 전기차 허브국이라는 야망을 숨기지 않고 있다.
태국을 거점으로 삼은 중국의 장성자동차는 이미 현지 시장에 제품을 선보이고 있다. 가솔린차와 전기차의 중간단계인 하이브리드 차량(Haval H6)을 앞세워 시장을 먼저 공략하고 있다. 순수 전기차는 향후 3년 내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는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 첫 전기차는 장성자동차의 주력 분야인 SUV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연간 8만 대의 전기차 생산을 계획하고 있으며, 이 중 60%를 태국 내에서 판매한다는 구상이다. 태국은 2030년까지 자국 자동차 생산의 30%를 전기차로 채운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는데, 장성자동차의 이 같은 구상이 보탬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태국 역시 아세안의 전기차 허브국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
장성자동차가 이처럼 빨리 태국 시장에서 자사 제품을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지난해 11월 현지에서 철수한 GM 공장을 인수해 시장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태국 정부는 장성자동차가 내연기관차보다는 전기차 생산에 더 주력해주기를 바랐는데, 장성자동차의 행보는 이에 적극 화답하고 있는 모양새다.
태국 역시 인도네시아처럼 아세안 전기차 허브국이란 목표를 가지고 있어 8년간 법인세 면제 등 장성자동차의 전기차 행보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코트라 방콕 무역관은 “업계에서는 태국 정부에게 구매자에 대한 가격 인센티브를 부여할 것을 수차례 제안하였지만 태국 정부는 태국을 ‘동남아시아 전기차 허브’로 도약시키기 위해 생산 측면의 인센티브 부여에 중점을 두고 있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말했다.
태국의 문을 두드리는 회사는 장성자동차뿐만 아니라 미국의 테슬라와 대만의 폭스콘도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특히 대만의 폭스콘은 태국 국영 석유회사인 PTT Plc와 이미 현지에서 전기차 부품을 생산키로 협력키로 했다.
이 같은 한중 양국의 아세안 전기차 행보는 일본 자동차 업체들을 잔뜩 긴장시키고 있는데, 일본 내에서는 자국 업체들의 자업자득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기존 맹주였던 일본 업체들이 아세안 각국의 전기차 투자 확대 요구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닛케이 아시아는 “태국과 인도네시아 정부가 전기차 현지 생산 확대를 위한 정책에 드라이브를 걸자 일본 자동차 업계는 탐탁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가 만연했고, 이에 현지 관련 투자를 주저했었다”면서 “이 때문에 양국은 한중으로 눈길을 돌렸고, 결국 공간이 열리고 말았다”고 전했다.
태국의 경우 전기차 확대를 위해 보급형을 절실히 원했지만 일본 업체들은 그동안 이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인기 있는 하이브리드 차량의 경우 수입되는 모델 중 합리적인 가격의 차량은 별로 많지 않았다. 고가의 차량은 대중이 타기에는 부담스러웠다.
이런 상황에서 장성자동차는 비싸지 않은 전기차를 내놓겠다는 목표로 시장 공략 계획을 짜고 있다. 노무라 연구소는 “중국 업체의 이 같은 전략은 수요와 공급 간의 괴리를 채우기에 충분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닛케이 아시아는 “일본 자동차 업체들이 현대차와 장성자동차의 투자 규모를 따라가지 못한다면 아세안서 입지가 추락한 모바일 폰과 가전제품의 전철을 그대로 답습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일본 업체 중에서는 미쓰비시가 2023년 태국 현지에서 전기자동차 생산에 나선다.
[문수인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32호 (2021년 9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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