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패권전쟁 한국은 ‘넛크래커’ 신세] 반도체 세계대전 속 한국의 과제… 기업에만 책임 떠넘겨 글로벌 반도체 동맹서 왕따, 中 추격 따돌리고 비메모리 육성 박차 가해야

    입력 : 2021.04.28 10:18:13

  • 미중을 필두로 한 세계열강들이 미래경쟁력과 안보 차원에서 반도체 산업 경쟁에 들어갔다. 전문가들은 반도체는 단순한 부품이 아니라 일상생활이나 공공서비스, 안보에 필요한 인프라라고 강조한다. 국가의 생존이 달려있다는 것이다.

    현재 반도체 생산력의 72%는 한국과 대만,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에 집중돼 있다. 미국은 필요로 하는 반도체를 자국 내에서 생산하겠다는 의지를 다지고 있다. 대만의 TSMC나 삼성전자에 대규모 투자를 요청하는 배경이다. 박영준 서울대 전기공학부 교수는 “미국 정부는 반도체 글로벌 지배력이 중국으로 넘어가면 모든 게 끝이라는 위기감을 강하게 의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반면 중국은 자국 내 수요를 바탕으로 반도체 굴기를 외치는 동시에 삼성전자 등에 안정적인 반도체 공급망 유지를 요구하고 있다. 실제 지난해 우리나라 반도체 수출물량에서 중국이 차지한 비중은 39.6%에 달했다. 더욱이 삼성전자는 중국 시시안과 쑤저우에서 공장을 가동하고 있다.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사업장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 사업장
    ▶과제 ➊ 미중 사이 최대한 이익 확보 미국을 중심으로 한 서방권과 일본·대만은 반도체 동맹 행보를 가시화하고 있다. 애플은 독일 뮌헨시에 3년간 10억유로(약 1조4000억원)를 투자해 모바일 반도체와 소프트웨어(SW) 연구개발(R&D)센터를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세계 1위 반도체 기업 인텔은 미국 애리조나주에 200억달러를 들여 반도체 수탁생산(파운드리) 공장 두 곳을 새로 짓겠다고 밝힌 데 이어 유럽 공장 신설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

    대만은 미국의 반(反)중국 반도체 동맹에 동참 의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대만의 반도체 설계기업 알칩 테크놀로지는 중국 인민해방군을 지원했다는 의혹으로 미국의 제재 블랙리스트에 오른 중국 슈퍼컴퓨팅 기업 파이티움과 거래를 중단한다고 밝혔다. 또 TSMC는 350억달러를 투자해 미국 애리조나주에 5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급 최첨단 반도체 공장 6개를 신설한다고 밝힌 상태다. TSMC는 일본에도 반도체 R&D·후공정(패키징) 공장을 짓기로 확정하면서 반도체 협력을 공고히 하고 있다. 이와 관련해 바이든 행정부는 중국 견제를 위한 ‘반도체 민주주의’를 대의명분으로 삼아 한국에도 동참을 요구할 것으로 보인다.

    이런 가운데 중국 정부도 미국의 동맹국 가운데 ‘약한 고리’로 한국을 점찍고 반도체·5G 기술 협력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중국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등 현지에 공장을 둔 한국 기업에 추가 투자를 요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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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정부는 사실상 줄타기 분위기다. 한국 기업 입장에선 미국과 중국 어느 나라도 편들기 힘든 상황인 셈이다. 전문가들 일부는 “확실히 선택해야 할 때”라고 강조한다. 반도체 업체의 한 전직임원은 “아직 중국의 반도체 역량은 높지 않다. 반도체 분야에서 대만처럼 한미 협력이 강화되면 중국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라며 “미국의 투자 요구에 적극 응하면서 반도체 협력을 안보동맹 수준으로 격상시켜야 한다”고 토로했다.

    반면 신중론도 제기된다. 국내 반도체 업체들의 중국 의존도가 높은 만큼 섣부른 움직임이 악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이익을 최대한 확보해야 하는 상황이다. 김승주 고려대 교수는 “미국과 중국은 정부가 나서는데 한국은 기업이 대응하고 정부는 빠져 있는 모양새”라며 “정부가 외교적 대응을 통해 노선을 정리해 줄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삼성전자의 한 간부는 사견을 전제로 “결국 관건은 기술주도권과 생산능력”이라며 “메모리반도체 분야에서 1위 자리를 수성하면서 미래 먹거리인 시스템반도체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게 과제”라고 전했다.

    ▶과제 ➋ 흔들리는 메모리 주도권 공고화 문제는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국내 업체들의 메모리 ‘초격차’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삼성전자는 1993년 D램 시장 점유율 1위에 오른 이래 29년간 세계 시장에서 압도적 메모리(D램·낸드) 1위를 지켜오고 있지만 최근 수년간 점유율이 꾸준히 하락하고 있다. 2016년 삼성전자의 연간 D램 점유율은 48%였으나 5년간 계속 감소해 지난해 43.1%로 떨어졌다. 이미 지난해 4분기에는 42.1%(트렌드포스 집계) 수준까지 내려갔다. 반면 마이크론은 같은 기간 20.4%에서 23.5%로 ‘은근히’ 시장을 키웠다. SK하이닉스도 같은 기간 25.6%에서 29.4%로 영토를 확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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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낸드플래시도 사정은 비슷하다. 삼성전자는 2017년 38.7%까지 올랐다가 지난해 33.9%까지 빠졌다. 일본의 키옥시아는 같은 기간 16.5%에서 18.9%로, 마이크론은 10.9%에서 11.4%로 각각 몸집을 키웠다. 더군다나 지난해 11월 미국 마이크론이 세계 최초로 176단 이상 3차원(3D) 7세대 적층(V) 낸드를 세계 최초로 출시한다고 밝혀 충격을 안겼다.

    마이크론은 삼성전자와 동급의 10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급 D램을 양산하고 있고, 최첨단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활용한 10나노 초반대 차세대 D램 개발에도 몰두하고 있다. 올 상반기 중에는 EUV D램을 생산한다는 목표다.

    여기에 마이크론은 낸드 시장 2위(점유율 약 19%)인 키옥시아(옛 도시바 메모리) 인수에도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마이크론이 실제 인수에 성공하면 단숨에 삼성전자와 맞먹는 낸드 시장 강자가 된다. 마이크론뿐 아니라 대만 난야도 대규모 투자 계획을 내놓으면서 EUV D램 개발에 속도를 내며 기술 격차를 좁히고 있다. 중국 역시 메모리 국산화를 포기하지 않았다. 시진핑 중국 정권은 주요 메모리 기업을 국유화해 국가 차원에서 메모리 개발에 동력을 보태고 있다.

    SK하이닉스 관계자는 “메모리반도체 기술이 고도화하면서 선발주자들의 개발 속도는 더뎌지는 반면, 후발주자들의 추격은 빨라지고 있다”면서 “흔히 말하는 ‘초격차’가 좁혀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우려했다.

    안기현 한국반도체산업협회 전무는 “반도체 미세공정과 생산 효율 등 기술 분야에서 뒤처져선 안 된다”면서 “메모리반도체 분야에 과감하고 공격적인 투자를 통해 연구개발 속도를 높여야 한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는 이재용 부회장과 핵심 경영진이 2016년 말부터 수사와 재판, 수감을 거듭하면서 차량용 전자장비 기업 하만인터내셔널(2016년 9월) 이후 이렇다 할 전략적 투자를 단행하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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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제 ➌ 파운드리 시장 잡아야 우리나라는 메모리 분야에서는 글로벌 최강자지만 전체 시장의 70%를 차지하는 비메모리(시스템반도체) 분야는 약자다. 우리도 가만히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해마다 반도체 시설 투자에 30조원 안팎을 쏟아붓고 있는 삼성전자는 2030년까지 시스템반도체 연구개발에 133조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정부도 시스템반도체 등 차세대 반도체 생태계 조성에 애를 쓰고 있다.

    비메모리 반도체 위탁생산은 대만의 TSMC가 55% 점유율로 압도적 1위이며 삼성전자는 16%대로 2위다. 최근 부족사태를 겪고 있는 자동차용 반도체 점유율은 2%에 불과하다. 미래 먹거리인 시스템반도체 경쟁력을 끌어올리는 것이 과제인 셈이다.

    최근 가장 주목받는 분야는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이다. 반도체 품귀 현상으로 TSMC에 일감이 쏠리자 다른 업체들이 시장 공략에 나선 것이다. 인텔은 최근 파운드리 사업 재진출을 선언했다. 인텔은 200억달러(약 22조원)를 들여 애리조나에 공장 2곳의 건설을 발표했다.

    중국에서도 세계 5위 파운드리 업체인 SMIC가 최근 선전시와 손을 잡고 23억5000만달러(약 2조6000억원)를 들여 반도체 공장을 설립하겠다고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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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SMC도 속도를 내고 있다. 지난 1월 제시했던 연간 31조원(약 280억달러) 투자 규모를 지난 15일 33조원(약 330억달러)으로 높여 잡으며 응수했다. 올해 채용 인원은 역대 최대인 9000명으로 잡았다. TSMC는 지난해 120억달러(약 13조원)를 투입해 애리조나에 공장 2곳을 짓겠다고 예고도 했다.

    대규모 투자를 단행하는 TSMC의 자신감은 실적에서 나온다. TSMC는 지난 1분기 매출이 1년 전보다 25.4% 증가한 129억달러(약 14조4000억원)를 기록했다. 순이익은 전년 동기 대비 19.4% 늘어난 49억달러(약 5조5000억원)를 기록했다. 자동차·서버용 반도체 판매가 크게 늘어 역대 최대 분기 실적을 달성했다. 이런 실적은 중국 대형 고객사와 거래를 포기하면서도 최대 실적을 거뒀다는 의미가 있다. TSMC는 지난해 화웨이가 미 정부의 블랙리스트(제재 명단)에 오르자 반도체 공급을 중단한 바 있다. 반면 TSMC는 애플·엔비디아·AMD·퀄컴 등 미국 기업에 대한 공급 규모를 대폭 늘린 것으로 알려졌다.

    더욱이 대만 정부는 TSMC 외에 글로벌 점유율이 낮은 2~4위 기업도 본격 육성해 대만을 반도체 생산 중심으로 만들겠다는 전략을 펴고 있다.

    파운드리 2위의 삼성전자도 대규모 투자에 나설 계획이지만 상황이 녹록지 않다. 미국에 파운드리 공장 증설을 상반기 중에 확정짓고, 하반기에는 경기 평택 제3공장에 투자 계획도 내놓을 전망이지만 연간 기준으로 TSMC의 투자액을 상회하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삼성이 머뭇거리는 사이 TSMC는 신속한 투자 결정으로 파운드리 독주 체제를 굳히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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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서 인텔의 진입 또한 중장기적인 위협이다. TSMC를 따라잡기 위해 분투하고 있는 상황에서 강력한 경쟁자의 추격까지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다. 인텔은 파운드리 시장에선 대형 발주처다. 인텔이 자사 물량만 소화해도 삼성전자로선 수주할 수 있는 물량이 줄어들게 된다. 팻 겔싱어 인텔 최고경영자(CEO)는 투자 계획을 내놓으며 “모바일용 칩 등을 다양하게 제조할 것이며 고객사로 아마존과 구글, MS, 퀄컴, 애플 등을 끌어올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인텔은 든든한 지원군도 있다. 인텔이 대대적인 투자를 결정한 데는 미국 정부의 정책 행보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한국의 경우, 민간의 노력에 비해 국가 차원의 장기 전략이나 투자가 경쟁국과 비교해 너무 허술하다는 지적이 많다. 시스템반도체 중에서도 미래 신사업으로 각광받는 AI 반도체 역시 삼성전자 등 국내 주요 기업의 기술 향상이 늦어지고 있다.

    생산과 공정 기술이 중요한 반도체와 달리 시스템반도체는 생태계가 중요하다. 전문가들은 설계 전문기업인 팹리스와 만들어진 반도체를 칩으로 만드는 후공정 경쟁력이 필수라고 강조한다. 대만 파운드리 업체들이 강세를 보이는 배경에는 팹리스와 후공정 등 생태계가 선순환 구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내 반도체 기업 중에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빼면 글로벌 대기업 수준의 AI 반도체 역량을 보여주는 기업이 전무하다시피 하다. 이런 가운데 이재용 부회장 구속으로 총수 부재 상태인 삼성전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삼성전자 최고경영진은 바이든 행정부의 압박을 받고서도 오스틴 공장 증설 결단을 아직 내리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삼성이 TSMC를 따라잡으려면 반도체 공급 부족이 심화하고 있는 지금이 투자 적기”라면서 “격변의 시기에 국내 업체들이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정부의 지원이 신속하게 이뤄져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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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문가들 “위기이자 기회”… 이재용 부회장 부재 아쉬워 전문가들은 반도체를 둘러싼 국제적 흐름은 우리나라에 부담이기도 하지만 기회라고 본다. 중국이 미국의 견제를 받는 4~5년 동안 기술 격차를 유지하고, 동시에 시스템반도체 등 비메모리 분야를 육성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앞서 SK하이닉스 관계자는 “산업 측면서 보자면 반도체 강국인 우리나라 기업들이 세계 각국에서 사업을 확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 동시에 그동안 소홀했던 반도체 분야를 육성할 수 있는 찬스라고 본다”고 했다.

    무엇보다 반도체 업계는 국내 첨단 반도체 인력풀의 확대를 요구하고 있다. 안기현 전무는 “수도권 대학의 반도체 관련 학과 정원을 대폭 늘려줄 것을 기업들은 요구했다”고 말했다. 정부가 전체적으로 반도체 산업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 큰 그림을 그리고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는 것이다.

    각종 규제 완화도 중요하다. 제조·R&D 시설에 대한 인허가를 신속하게 처리하고 각종 규제 법령을 유연하게 적용해달라는 것이다. 반도체 업계는 현재 화학물질관리법·화학물질평가법·산업안전보건법·중대재해기업처벌법·근로기준법처럼 노사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규제법들의 적용을 받고 있다.

    안기현 전무는 “미국, 중국, 유럽 모두 반도체 내재화에 총력을 쏟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면서 “이번에 반도체 글로벌 공급망 자체의 위험성을 경험한 만큼 시스템반도체 등 우리 산업에 필요한 반도체는 모두 자체 생산한다는 각오로 정부 차원에서 개발을 지원해야 한다”고 했다.

    [김병수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8호 (2021년 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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