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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데이터 혁명·국내사례| 걸음마 시작한 코리아 빅데이터, 상품 추천 넘어 ‘데이터 드리븐’
입력 : 2019.12.27 14:5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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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인 내 딸에게 신생아 할인쿠폰을 왜 보내는 겁니까?”
미국의 대형 할인마켓 체인 타겟(Target)은 몇 년 전 한 고객으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딸에게 유아용품 할인 쿠폰을 보냈다는 것에 크게 분노한 것이다. 당시 매니저는 예비 엄마들에게 보낼 쿠폰이 잘못 갔다며 사과하고 고객의 이름을 명단에서 지웠다. 그러나 실은 잘못된 사과였다. 매니저는 다시 한 번 사과하기 위해 해당 고객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오히려 사과를 받게 됐다. 고객의 딸은 실제로 임신 중이었던 것이다. 타겟은 아버지도 모르고 있던 딸의 임신 사실을 먼저 파악하고 맞춤형 ‘타깃(Target) 마케팅’에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겟은 어떻게 고객의 딸이 임신한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 단순히 결혼 적령기, 가임기 여성을 대상으로 무차별적인 할인쿠폰 발행전략이 아닌 빅데이터 분석을 통해서였다. 타겟은 고객의 가입 정보, 구매 이력, 검색 이력 등의 데이터를 분석하고 이를 통해 임신 중인 고객이 어떤 구매 패턴에 따라 어떤 상품을 구매하는지를 알아냈다. 임신을 하면 평소에는 구매하지 않던 칼슘, 마그네슘 등의 영양제와 화학 물질이 적은 로션, 출산이 임박한 시점에는 유아용품을 구매하는 패턴을 통해 여성 고객이 영양제를 구매하면 임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점을 추론하는 식이다.
옥션, G마켓, 11번가 등 국내 주요 이커머스 업체들도 빅데이터를 활용한 개인화 서비스를 도입한 지 오래다. 회원 정보, 구매 이력, 검색 이력, 장바구니, 지면 체류 시간 등 다양한 데이터를 분석해 고객이 높은 관심을 갖는 상품, 실제로 구매하는 상품, 그리고 고객의 구매력에 맞게 개인화된 추천과 광고를 배달하는 것이다.
2019년 3월 이마트트레이더스 월계점이 오픈하며 할인행사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빅데이터 장악한 ‘테크핀’, 금융 서비스 지형도 바꾼다
중국 빅데이터 산업을 주도하는 기업 텐센트는 계열사인 인터넷 전문은행 위뱅크를 통해 빅데이터를 활용한 모바일 메신저 대출 서비스를 출시했다. 대출신청을 하면 2.4초 안에 대출심사를 완료하고 40초 만에 대출금을 입금해주는 상품도 개발했다. 아마존은 자사가 보유한 막대한 현금흐름을 바탕으로 거래기업 중 선정기업만을 대상(Invitation Only)으로 2018년 말 누적 기준 50억달러 이상의 대출(Amazon Lending)을 제공하고 있다.
최근 ‘테크핀’이라는 용어가 심심치 않게 쓰이고 있다. 금융(Finance)과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인 ‘핀테크’와 유사하지만 사업의 주도권을 금융사가 아닌 ICT 기업이 쥐고 파괴적인 혁신을 이뤄나가고 있는 기업들을 부르는 용어로 마윈 전 알리바바 회장이 2016년 처음으로 사용했다. 당시 마윈은 “핀테크는 기존의 금융 시스템 기반 위에 ICT를 접목시킨 서비스인 반면 테크핀은 ICT 바탕 위에 금융 시스템을 구축한 서비스”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테크핀 기업들은 상당한 데이터 축적이 이뤄진 상태로 고객 니즈 파악에 유리해 무엇보다 개인 맞춤형 금융 상품을 제시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경일 BNK투자증권 연구원은 “IT 기업들은 일반적인 금융사에 비해 훨씬 더 다양한 고객 포트폴리오와 방대한 고객 데이터를 보유하고 있다”며 “이들은 빅데이터, 인공지능(AI), 클라우드 등 IT 기술을 기반으로 막강한 데이터 분석 역량을 가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최근 토스, 뱅크샐러드 등 핀테크 기업들은 물론 카카오, 네이버 등 ICT 기업들은 기존 금융권사들의 상품을 추천하는 수준을 넘어 직접 고객들에게 적합한 상품을 기획해 선보이고 있다.
카카오, 네이버 등 테크핀 기업들은 기존 금융권사들의 상품을 추천하는 수준을 넘어 직접 고객들에게 적합한 맞춤형 상품을 기획해 선보이고 있다.
위기감을 느낀 기존 금융사들은 변화를 위해 사활을 걸고 있다. 국내 은행들은 통신사와 잇따라 손을 잡고 데이터 확장에 나섰다. 자사의 금융데이터와 통신사가 보유한 비금융 분야의 데이터와 앞선 인공지능(AI) 기술 등을 활용해 새로운 상품과 서비스를 발굴하기 위해서다. 실제 신용평가부터 라이프 스타일에 맞춘 금융 상품까지 통신·금융 융합의 결과물도 속속 나오고 있다. 기업은행은 SK텔레콤과 ‘5G(5세대) 기술과 빅데이터 기반 혁신금융서비스 제공을 위한 포괄적 업무협약(MOU)’을 체결하고 5G 기반으로 수집한 유동 인구 통계, 통신료 납부 내역 등 데이터를 제공받는다. 이를 기반으로 주요 고객인 중소기업에 특화한 금융 서비스를 개발하고 기업 영업 채널을 확대하는 방안도 함께 연구 중이다.
기존에 없던 디지털 혁신 서비스도 내놓을 예정이다. SK텔레콤의 내비게이션 서비스인 티맵을 이용한 교통 정보 서비스도 그중 하나다. 영업점별 교통 상황을 실시간으로 제공하고,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점포를 알려주는 식이다. 중소기업 고객들이 스마트공장을 신속하게 도입할 수 있도록 ‘5G 모바일 에지 컴퓨팅(MEC)’ 구축에도 협력하기로 했다. 이 기술을 활용하면 공장에서 실시간 품질 검사, 자율 주행 물류이송, 생산시설 원격정비 등이 가능해질 전망이다. 이 외에 통신사 가상현실(AR)·증강현실(VR) 기술을 활용한 가상 영업점도 설치할 계획이다.
우리은행은 2018년 10월 SK텔레콤·11번가와 MOU를 맺고 소상공인에 맞는 금융 상품을 출시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SK텔레콤 데이터를 활용한 소상공인의 신용 평가 시스템을 구축 중이다. 지난 7월에는 통신사 정보를 바탕으로 소액을 대출해주는 ‘우리 비상금 대출’도 내놨다.
KEB하나은행도 SK텔레콤과 제휴를 맺고 티맵을 통해 고객의 운전습관을 분석해 안전 운전을 하면 오토론 금리를 낮춰주고 있다.
이외에 통신사 고객을 겨냥한 은행 특판 상품도 내놓고 있다. 지난 5월 대구은행이 SK텔레콤과 제휴해 내놓은 ‘T 하이 5 적금’은 연 최대 5%의 금리를 제공하면서 큰 인기를 끌었다. 부산은행은 KT 통신사를 쓰는 고객이 대출을 신청하면 추가 금리 혜택을 주기도 했다.
기업은행 한 관계자는 “은행은 금융 데이터 외에는 고객들의 생활 패턴과 이동경로 등을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다”며 “협업을 통해 은행이 고객 맞춤형 상품과 서비스를 개발하면 고객들의 편의도 더욱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넷플릭스는 사용자의 콘텐츠 성향 데이터를 축적해 완성된 빅데이터에 기반을 둔 추천 알고리즘을 활용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한 케이스다. 수백만 편의 콘텐츠 목록 중에서 사용자가 보고 싶은 영화를 적절하게 찾아 제공함으로써 고객충성도와 만족도를 높이는 방식이다. 풍성하게 쌓인 데이터는 단순히 다른 영화를 찾아주는 데 그치지 않는다. 3천만 명 이상의 시청자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선호도를 분석해 맞춤형 콘텐츠 ‘제작’에 나서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품이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사랑을 받은 미드 <하우스 오브 카드>다. 데이터는 이전까지 단순히 고객에게 맞춤형 상품을 제안하는 수준을 넘어서 기업이 새로운 상품을 만드는 의사결정의 일련의 과정에 관여하고 있다. 이렇듯 현장 인력의 감에 의존하던 방식을 탈피하여 데이터 분석을 통해 기업의 의사결정을 내리는 경영 방식을 ‘데이터 드리븐(Data-Driven)’이라고 한다.
전기차 제조 업체로 유명한 테슬라는 데이터 드리븐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있는 기업이다. 테슬라는 운전자의 모든 데이터를 테슬라 서버로 전송받는다. 이러한 데이터를 활용해 기존 제품의 성능을 업그레이드하고 다음 제품을 설계하는 자료로 사용한다. 이외에 소프트웨어 자동 업그레이드를 통해 자동차의 적절한 성능개선에 반영하고 있다.
국내 대형마트 업계의 자체생산(PB) 상품은 이러한 ‘데이터 드리븐’ 경영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지난 2013년 이마트가 업계 최초로 1000만 명 이상의 구매 이력 정보를 활용해 ‘빅데이터’를 가동한 데 이어 롯데마트와 홈플러스도 꾸준히 고객 데이터를 축적하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고객들이 선호하는 제품을 자체브랜드(PB) 형태로 내놓거나 온라인 쇼핑몰과의 시너지 효과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18년 출시 1년 만에 12배 이상 판매량이 급성장한 PB 에어프라이어, 출시 5일 만에 41만 병 판매를 돌파한 이마트 ‘국민워터’ 등 ‘피코크’·‘노브랜드’를 포함한 이마트 PB 상품은 꾸준한 판매 성장세를 이어오고 있다. 홈플러스가 최근 선보인 프리미엄 PB ‘시그니처’ 역시 바이어가 상품의 품질, 차별성, 사용 만족도 등의 데이터를 분석해 선보인 제품이다. 현재 도입된 상품만 600여 종으로 신선식품 카테고리를 강화할 계획이다.
유통업계 한 관계자는 “대형마트들은 광범위하게 축적된 자사의 판매 데이터를 분석하면 어떤 지역에 어떤 상품군을 어떤 가격대에 출시하면 잘 팔릴지 예측이 가능하다”라며 “입점 업체들에게는 상당한 위협이 될 수 있지만 고객의 입장에서는 메리트 있는 상품군이 추가되는 셈”일고 밝혔다.
[박지훈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2호 (2020년 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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