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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LUXMEN·현대경제연구원 공동기획 한국경제 위기 大진단| 외환위기보다 무서운 D의 공포… 급락보다 침체 오래가는 일본식 불황 더 고통
입력 : 2019.09.23 16:4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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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경제의 불안으로 수출이 감소하고 기업 투자와 민간소비 부진이 겹치면서 성장률은 빠르게 떨어지고 있다. 게다가 지난 8월 사상 처음으로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등 디플레이션(잠깐용어 참조) 조짐마저 보인다.
실제 우리나라의 올해 1~8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 초중반에 머물면서 연간 기준으로 최저치를 세울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일부 해외 기관들은 올해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0.5%에도 못 미칠 것이라는 전망도 내놓고 있다. 경제의 전반적 물가 수준을 보여주는 ‘국내총생산(GDP) 디플레이터’는 지난해 4분기부터 올해 2분기까지 3개 분기 연속 마이너스다.
그러면서 한국 경제가 ‘저성장·저물가’ 함정에 빠지는 것 아니냐는 목소리가 나온다. 일시적인 경기 침체를 넘어 디플레이션(Deflation: 가격의 전반적 하락)을 목전에 뒀다는 이른바 ‘D의 공포’다.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총체적인 수요의 급격한 감소에 의해 디플레이션이 초래되면 경기는 회복하기 어려운 침체에 빠질 수 있다.
하지만 시장 일부와 전문가들의 의견은 다르다. 당장 유가와 농산물 가격 등의 영향을 배제한 근원물가도 외환위기 때를 제외하면 사상 최저 수준이라는 점에서 정부의 설명은 한계가 있다. 세 분기 연속 마이너스를 기록한 국내총생산(GDP) 디플레이터도 저물가 상태가 심각함을 보여준다. GDP 디플레이터는 소비자·수출·수입물가지수 등을 종합 반영한 거시지표로, 이 수치가 음수(陰數)라는 것은 명목GDP 성장률이 실질 GDP 성장률보다 낮음을 의미한다. 물가를 반영한 명목지수는 실제 국민이 체감하는 경기를 나타낸다. 실제 국민이 손에 쥐는 금액 자체가 줄었다는 의미다.
강성진 고려대 경제학과 교수는 “경제성장률·수출 등 경제 전반에서 활력을 상실한 것이 물가 하락의 가장 큰 원인”이라며 “투자와 수출 부진이 지속되는 상황에서 미중 무역갈등 악화 등 대외충격이 갑자기 커질 경우 경기침체 속에서 물가가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디플레이션 위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고 평가했다. 국책연구원의 한 관계자도 사견을 전제로 “이미 우리경제가 수년 째 저성장 저물가가 이어지면서 디플레이션 가능성을 보여왔다”며 “이런 상태가 장기화되고 생산인구 감소, 부동산 침체 등이 더해질 경우 한국 경제가 최악의 상황으로 접어들 수 있다”고 지적했다.
디플레이션이 현실화하면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과 서비스 가치 하락으로 기업의 생산과 투자가 위축된다. 물가가 계속 하락하면 돈 가치가 오르고 재화에 투자할 매력, 즉 소비 매력이 준다. 결국 기업의 수익성이 나빠지고 투자가 줄어든다. 기업이 어려우니 근로자의 임금이 오르지 않고 가계도 어려워진다. 이른바 일본식 장기 불황이다.
실제 일본 근로자의 1인당 명목임금은 1997년 360만엔에서 2014년 313만엔으로 12.9% 감소했다. 1997~2008년 일본 민간 소비는 0.6% 증가에 그쳤다. 이전 5년 동안 2.0% 늘어난 점을 고려하면 급락 수준이다. 이런 영향으로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1990년대 1.5%에서 2000년대 0.6%로 반토막 났다. 디플레이션이 나타났던 일본의 1990년대 말~2000년대에 벌어진 일들이다.
일본의 장기 불황 초입과 현재 한국의 상황은 여러모로 닮았다. 경제성장률의 지속적인 저하, 마이너스 물가상승률, 급속한 고령화에 따른 인구구조의 변화 등이 대표적인데 이 같은 요인들이 우리 경제에서도 하나둘씩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일본 경제가 장기불황 초입에 들어선 1990년대 경제의 기초체력을 보여주는 잠재성장률이 지속적으로 하락했다. 한국도 비슷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잠재성장률은 2000년대 초반 5% 수준이던 것이 2010년대 들어 3.4~3.7%로 떨어졌고 2016년 이후엔 2.8% 수준까지 떨어졌다. 양국 경제성장률도 비슷한 하향 추세를 그리고 있다. 일본의 실질 GDP 증가율은 1970~1980년대 평균 4.5%에서 잃어버린 20년이 시작된 1990년대 1.3%대로 하락한 뒤 2000년대는 0.7% 선, 2010년대는 1.0% 선을 기록했다. 한국도 올 성장률이 2%를 넘기 힘들다는 전망도 다수 나오고 있다. 성장률이 1%대에 머무르는 저성장이 고착화될 수 있다는 전망이 나온다. 일본의 경제 활력을 급속도로 떨어뜨린 인구구조 변화 역시 판박이 흐름을 보이고 있다. 오히려 우리의 고령화 속도가 더 빠르다.
경기 침체→물가 하락→지속적인 저금리→설비투자 부진→소비 위축의 메커니즘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차이점도 있다.
일본은 강한 거품 붕괴를 통해 장기불황에 접어들었다. 또한 한국의 저물가는 국제 유가 하락 등 공급 쪽 요인이 강하다는 점도 상황이 다르다.
디플레이션 우려가 현실화하면 실물경제는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진다.
문제는 경기 침체를 벗어나기 위한 정책 수단들의 효과가 크게 낮아진다는 점이다.
경제주체들이 이처럼 움츠러들면 한은이 더 완화적 통화정책을 펼쳐도 투자·소비를 진작하기 어려운 ‘유동성함정’에 빠져들 우려도 크다. 경제주체들이 물가 하락을 예상해 현금을 계속 보유하고 소비·투자는 줄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은 무한정 양적완화란 극약 처방을 내놓고도 여전히 물가상승률 목표치(연 2%) 달성에 실패하고 있다. 경기 침체와 물가 하락의 만성화를 바꾸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준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의 한 관계자는 “디플레이션이 심해지면 정책 효과가 확 떨어진다”고 말했다. 디플레이션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이와 가까운 상황이 계속되면 당장 세수 확보가 어렵고 기업도 수입이 감소한다. 소비와 투자 등 주요 지표가 하락하면서 총체적 위기 상황에 처할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디플레이션에 대한 부인보다는 이를 차단할 방책이 더 시급하다는 주장이 나온다. 한국의 각종 지표들이 20년 전 일본과 닮은꼴 형태를 보이는 만큼 시급한 대응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다.
박상준 와세다대 교수는 “일본처럼 강한 거품 붕괴를 통한 불황은 아니란 차이가 있지만 개인적으로 이미 한국이 일본식 불황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하고 있다”면서 “일본식 불황을 여전히 미래 일로 얘기하고 대응책을 마련하려는 경향이 있지만 현재진행형으로 생각하고 당장 대응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은 장기불황 초입에서 전무후무한 상황을 겪다 보니 1998년까지도 일시적 상황이라고 판단해 대응이 늦어지면서 장기불황의 골을 벗어나는 데도 더 많은 노력이 필요했다는 설명이다.
노동비용을 높이는 소득주도성장을 수정하고 재정통화 정책 등도 전방위적으로 완화하는 대책도 필요하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정책과 경기에 대한 경제주체가 느끼는 불확실성이 매우 크다”며 “일관성 있는 통화·재정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물론 규제를 완화하는 방안을 동시에 꺼내드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병수 기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9호 (2019년 10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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