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Re-Japan]구조조정·엔저로 날개 단 일본 기업

    입력 : 2013.03.07 16: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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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전기·전자업계는 흔히 ‘8개 대기업’으로 대표된다. 히타치제작소와 미츠비시전기 도시바 등 3사는 종합 전기업체, 소니 파나소닉 샤프 등 3사는 가전업체, 후지츠와 NEC는 IT업체로 구분된다. 이 가운데 한국의 삼성·LG와 경쟁에서 밀려 지난해부터 ‘침몰’이란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업체들이 바로 ‘가전 3사’들이다. 이들 가전 3사는 한국과 경쟁이 치열한 TV와 냉장고 등 가전을 주력 상품으로 고집하면서 지난 몇 년 새 경영 상황이 크게 나빠졌다. 결국 실적 악화로 지난해 말 가전 3사 모두 신용등급이 투자부적격(정크)으로 강등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이에 반해 히타치와 미츠비시 도시바 등 종합 전기업체들은 일찌감치 구조조정과 사업 다각화를 통해 비교적 튼튼한 수익 기반을 다져놔 승승장구하고 있다.

    하지만 지난해 11월 시작된 엔저는 그로기 상태였던 가전 3사에게도 구세주처럼 ‘패자 부활전’의 기회를 제공했다.

    가전 3사의 3월 결산(2012년 4월~2013년 3월) 영업이익 추정치를 보면 소니와 파나소닉 2개사는 흑자 전환에 성공했다. 샤프는 전년에 비해 적자폭이 크게 줄었다.

    전문가들은 올해 일본 수출업체에 있어서 엔저 효과가 더욱 뚜렷해질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전기·전자업종은 자동차와 함께 대표적인 엔저 수혜 업종으로 꼽힌다. 다만 최근 몇 개월은 지난해부터 시작된 구조조정이 진행 중이어서 환율 효과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측면이 있다.

    가전 3사 모두 현재 TV 등 일부 가전 부문을 축소하거나 인력 감원을 추진 중이다.

    따라서 파나소닉과 소니의 흑자전환은 엔저 효과 외에도 생산설비 축소와 감원 등 구조조정에 따른 영향도 크다. 실제 지난해 4분기(10~12월) 파나소닉의 매출은 오히려 전년 동기보다 8% 줄어 본격적인 엔저 효과를 누리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종합 전기업체들은 올해 3월 결산에도 큰 폭의 영업이익이 기대되고 있다. 다만 주요 수출 대상국인 중국 등 신흥국의 경기 침체로 영업이익 증가율은 전년 동기와 비슷한 수준이다.

    미츠비시전기는 중국에 대한 공장 자동화기기 매출이 부진했으며 히타치도 중국과 신흥국에 대한 컴퓨터 수출이 줄었다. 종합전기업체 가운데는 도시바가 NAND형 플래시 메모리 사업에서 엔저효과를 톡톡히 보면서 지난해 4분기(10~12월) 영업이익이 전년 동기 대비 3.4배나 급증했다.

    종합 전기 3사, 히타치·도시바·미츠비시 일본 제조업 자존심을 지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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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타치 선택과 집중 성공… 주력사업 TV·HDD 과감히 정리 ‘히타치, 일본 제조업 사상 최대 적자’

    지난 2009년 5월 ‘제조 왕국’인 일본 열도는 당시 일본 1위 종합 전기업체인 히타치의 사상 최대 적자 소식으로 충격에 휩싸였다. 히타치는 2008회계연도(2008년 4월~2009년 3월) 결산 결과 7880억엔(약 10조2000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했다. 당초 예상한 7000억엔 적자보다 크게 늘어난 것으로 일본 제조업계 사상 가장 큰 적자 규모였다. 당시 영업이익은 1270억엔 흑자를 냈는데도 큰 폭의 순손실을 본 것은 급격한 엔고로 인한 환차손과 구조조정에 따른 특별손실이 많았던 탓이다.

    가와무라 다카시 히타치 회장은 당시 기자회견에서 “앞으로 히타치만의 강점을 부각시킬 수 있는 사업을 중심으로 ‘선택과 집중’ 전략을 추진할 것”이라며 “가격경쟁 심화로 채산성이 나쁜 LCD(액정표시장치) TV 수출은 더 이상 핵심 사업이 될 수 없다”고 강조했다.

    구조개혁은 빠르게 진행됐다. 이듬해 4월 취임한 나카니시 히로아키 사장은 가격 경쟁력이 떨어지거나 수요가 정체된 시장은 과감히 포기하고 경쟁력 있는 성장산업에 맞춰 사업구조를 개혁했다. 그는 미국·유럽의 현지 법인을 관장해오던 인물로 누구보다 히타치의 장단점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사람이다.

    구체적으로 적자의 원흉으로 주목된 일본 내 TV 생산을 접고 하드디스크(HDD) 사업도 경쟁 기업에 매각했다. 대신 물환경과 철도시스템 스마트 그리드 등 인프라 사업을 강화했다. 사업 부문 조정으로 2009년 18곳이었던 상장 자회사 수는 지난해 10곳까지 줄었다.

    이 같은 사업 구조조정의 효과는 곧 나타났다. 인프라 사업이 핵심으로 자리매김하면서 이듬해 2388억엔, 2011년 3471억엔의 흑자를 기록했다.

    지금 히타치그룹의 홈페이지를 보면 ‘물의 은혜가 감도는 거리를’이라는 문구와 함께 도심의 시원한 분수를 바탕화면으로 사용하고 있다. 또 주요 사업으로도 물환경과 철도 등 인프라사업을 소개하고 있다. 히타치는 한국에서도 대구의 3호선 모노레일 사업을 수주해 진행 중이다. 물론 아직 TV와 밥솥 등 가전제품도 생산하고 있다. 하지만 히타치의 전체 매출에서 가전이 차지하는 비중은 이제 10%에 불과하며 인프라 관련 사업이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이익의 80% 이상을 인프라 사업에서 내고 있다.

    이처럼 경쟁력이 떨어지는 사업은 정리하는 한편 성장산업 분야에서는 적극적인 인수합병도 나서고 있다. 지난해 영국 원전업체 호라이즌뉴클리어파워를 인수한 것도 이 같은 사업 변화 노력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

    히타치는 2012회계년도(2012년 4월~2013년 3월) 영업이익은 전년보다 소폭 늘어난 4200억엔(약 5조원)에 달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2010년 이후 3년 연속 승승장구하며 흑자 행진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구조조정의 노력은 멈추지 않고 있다. 지난해 히타치는 오는 2015년까지 연간 9조엔(약 124조원)에 달하는 영업비용을 5% 줄일 것이라고 발표했다.

    비용 절감으로 아낀 돈으로 성장 산업인 인프라건설과 해외 정보통신 사업에 더 많이 투자하기 위해서다. 또다시 ‘사상 최대 적자’의 수모를 당하지 않으려면 기술뿐만 아니라 비용 경쟁력에서도 앞서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것이다. 지난해 히타치의 영업이익률은 3.6%로 제너럴 일렉트릭(9.6%)이나 지멘스(12.4%)와 같은 경쟁사에 비해 크게 뒤진다.

    에바타 마코토 부사장은 ‘왜 이렇게 비용 절감에 집착하냐’는 질문에 “주요 글로벌 기업의 영업이익률은 10% 이상”이라며 “히타치의 다음 목표는 영업이익률을 높이는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끊임 없이 변신하는 기업, 히타치의 다음 목표는 일본 시장을 넘어 글로벌 시장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넘버 1’ 인프라 기업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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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바 한국의 해외 원전수주 ‘단골 경쟁자’ 1875년 창업한 도시바는 일본 제조업계 가운데서도 역사가 오래됐다. 2012회계연도(2012년 4월~2013년 3 월) 영업이익은 2600억엔(약 3조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28%나 크게 늘었다. 반도체에 쓰이는 플래시 메모리의 일종인 낸드플래시의 판매가 늘었기 때문인데, 메모리 반도체 사업은 지난해 4분기(10~12월) 동안 15% 안팎의 높은 영업이익률을 달성했다고 한다.

    최근 마코토 코보 전무는 실적 발표장에서 “앞으로도 두 자릿수 이익률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다. 자신감의 배경은 엔저로 인해 삼성전자 등 경쟁사 대비 가격 경쟁력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바는 다리미와 진공청소기, 전자렌지, 세탁기, TV와 같은 가전제품과 노트북, 사무기기, 반도체, 원자력 발전소까지 만드는 종합 전기·전자업체이다. 특히 핀란드와 터키 등 해외 원전수주 사업에서 한국과 경쟁하는 단골 일본 기업으로 늘 등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과 화력발전 설비의 개발과 판매 부문을 통합하기로 발표했다. 지난해 말 미츠비시와 히타치가 화력을 중심으로 한 발전설비 사업을 통합하기로 한 데 따른 조치였다.

    GE는 가스화력발전소 설비의 핵심인 가스터빈 생산에서 기술력이 뛰어나며, 도시바는 터빈의 회전을 전기 생산으로 바꾸는 발전기 제조에 강점을 지니고 있다. 두 회사는 앞으로 중국과 인도 등 신흥국 시장을 겨냥해 고출력의 천연가스용 터빈을 공동 개발할 예정이다. 이처럼 일본 3대 종합 전자회사들은 사업 다각화를 하면서 특히 발전·에너지 부문을 강화하고 있다.

    글로벌 시장에서는 일본 3대 종합 전기회사 외에 독일 지멘스와 프랑스 알스톰 등이 경쟁하고 있다. 높은 기술력을 필요로 하는 분야인 만큼 가전 사업에 비해 경쟁자가 적은 편이다. 반면 덩치가 큰 B2B 사업이다 보니 한 건을 수주했을 때 매출과 이익에 기여하는 정도가 크다.

    현재 신흥국을 중심으로 화력·원자력 발전소 건설 수요가 급격히 늘고 있다. 한 조사에 따르면 세계 발전설비 시장은 2035년 850조엔(약 1경원)까지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한다. 도시바를 비롯한 일본 3대 종합 전기회사들이 앞 다퉈 눈독을 들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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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츠비시 전자밥솥부터 인공위성까지 미츠비시전기는 안 만드는 게 없을 정도로 많은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가전에서는 특히 부엌용 제품에 특장점을 갖고 있다. 냉장고를 비롯해 빌트인 식기세척기, 오븐, 전자렌지, 전기밥솥 등을 생산한다. 이외 세탁기 건조기 에어컨 가정용 태양광설비 등도 만들고 있다.

    최근에는 자동차와 철도, 빌딩, 인공위성 등에 들어가는 전기·전자부품과 시스템 등 B2B 사업으로 강화하고 있다. 서울 잠실에 짓고 있는 롯데슈퍼타워 등 국내 대형빌딩의 상당수 엘리베이터도 미쓰비시전기가 설계와 제작을 맡은 것이다. 인공위성은 관계회사인 미츠비시중공업이 제작하는데 미츠비시전기는 전기·전자 부문을 담당해 참여하고 있다.

    2012회계연도는 중국 등 신흥국의 수요 감소로 영업이익이 전년 대비 33% 줄었지만 올해도 예년과 비슷한 수준으로 실적이 회복될 것으로 보고 있다.

    [서찬동 매일경제 국제부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30호(2013년 0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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