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Storm or Slide]Ⅲ 끝없이 풀리는 돈의 위협…소리없이 다가오는 인플레이션

    입력 : 2012.12.03 17:2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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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010년 10월 튀니지의 지방 소도시에서 한 청년이 분신자살을 했다. 대학을 졸업했지만 일자리가 없어 과일 노점상을 하던 판이었다. 더 물러날 곳도 없던 청년은 경찰이 과잉단속을 하자 스스로를 태웠다. 그 이야기를 듣고 분개한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중동을 휩쓴 재스민 혁명은 이렇게 시작됐다. 역사를 바꾼 사건의 배경엔 식료품값 폭등이 도사리고 있다. 당시 국제 곡물값 폭등에 대해 대부분의 분석가들은 2007년부터 밀어닥친 가뭄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좀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거기엔 미국의 양적완화와 이후 발생한 러시아 가뭄이 커다란 몫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금융위기로 미국 경기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에서 양적완화로 자금이 풀리자 국제 투기자본은 그 돈을 경제를 살리는데 쓰는 대신에 안전하면서도 이익이 많이 날 원자재 투기에 나섰다. 그중 한 타깃이 곡물이었다.

    북미지역 가뭄이 원인이 돼 치솟았던 밀값은 사실 2008년 3월을 정점으로 수그러들었다. 한때 톤 430달러까지 치솟았다가 1차 양적완화가 끝날 무렵엔 150달러까지 떨어졌다. 이를 감안할 때 2010년 10월 재스민 혁명을 촉발시킨 밀값 상승은 그 이후에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2008년 11월부터 2010년 3월까지 이어지는 1차 양적완화 때 1조7000억달러를 풀었는데 그것으로도 미진했는지 2010년 11월부터 2011년 6월까지 이어지는 2차 양적완화를 통해 다시 6000억달러를 더 풀었다.

    여기서 2차 양적완화가 시작되면서 치솟기 시작한 밀값은 순식간에 300달러 선을 넘었고 2차 양적완화가 끝날 때까지 300달러대 중반에서 유지됐다. 특히 러시아가 가뭄을 이유로 곡물수출을 금지한 것과 양적완화가 맞물려 시장에 더 큰 영향을 미쳤다.

    양적완화는 한국의 금값도 치솟게 했다. 국내 금값은 1차 양적완화가 시작되기 전인 2008년 8월만 해도 그램당 2만9270원 선에서 머물러 당시만 해도 돌잔치에 한 돈짜리 금반지를 선물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러던 금값이 미국의 양적완화 발표 후 수직으로 치솟아 11월엔 3만8000원대가 됐다. 이후 두 차례의 양적완화가 더 있고 난 뒤 지금 금값은 그램당 6만4000원 선까지 올랐다.

    문제는 이런 인플레이션이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미치는 것도 아니고, 모든 제품에 똑같이 적용되는 것은 더더욱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미국이나 일본 EU가 대규모 자금을 방출할 때 잃는 사람과 얻는 사람의 차이가 극명하게 갈린다는 것이다.

    IMF에 따르면 미국이나 EU의 양적완화에도 불구하고 선진국엔 거의 인플레이션 압력이 없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미국이 1차 양적완화를 시작한 2008년 선진국의 물가는 2%만 올랐을 뿐이다. 이듬해는 0.7% 상승에 그쳐 너무하다고 싶을 만큼 안정됐다. 2차 양적완화의 영향을 받게 된 2010년과 2011년에도 선진국 물가는 1.1%와 1.4%만이 상승해 거의 제자리에 머무는 수준이었다.

    반면 이머징 마켓이나 개도국엔 심각할 정도의 인플레이션을 야기했다. 2008년 이머징마켓의 평균 물가상승률은 전년보다 2.8%포인트나 높은 9.3%로 집계됐다. 2차 양적완화 시기인 2011년엔 전년보다 1.1% 높아진 7.2%로 집계됐다. 개별 국가로 들어가면 이는 훨씬 심각하게 나타나 2008년에 러시아는 14.1%, 베트남은 23.1%의 물가상승을 겪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선진국이 돈을 풀어 개도국으로 인플레이션을 수출한다는 얘기까지 나오고 있다. 실제로 밀값이 폭등하면 주생산국인 미국이나 호주 프랑스 등의 주머니는 오히려 두둑해지나 틀린 말도 아니다.

    한국 역시 공식적으로 발표한 물가는 안정됐다지만 수입물가가 폭등해 서민들이 엄청난 고통을 겪어야 했다. 밀가루를 비롯한 수입품 가격이 치솟으면서 자장면값을 비롯한 외식비가 급격히 상승했다. 수입 물가를 보면 지난 2008년에 전년 동기 대비 36.2%나 폭등했다. 이듬해엔 전년 상승폭이 컸던 관계로 4.1% 떨어졌지만 2차 양적완화의 영향이 미친 2011년엔 다시 5.3%나 올랐다.

    물론 원자재가 상승이 관련 종목의 주가엔 호재가 될 수도 있다. 우리투자증권은 미국의 양적완화가 있을 당시의 원자재 가격 추이를 분석해 1차 양적완화 때는 원자재 지수 기준으로 32.4%가 올랐고 2차 양적완화 시기에는 10.3%의 상승률을 보였다고 밝혔다.

    그러나 원자재에 투자하지 않는 대부분의 시민들은 가격 상승의 부담을 고스란히 떠안게 된다. 수출을 유지하기 위해 환율을 달러화에 연동시킨 이후 달러공급 확대가 초래한 국제물가 상승은 고스란히 국내 시민들의 부담으로 전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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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환율전쟁 가능성 고조 문제는 일부 국가의 통화팽창은 외환시장의 불균형을 초래해 환율전쟁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외환을 대량으로 보유하고 있는 나라일수록 상대국이 돈을 찍어내면 그 돈의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좌시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런 면에서 3조달러가 넘는 엄청난 외환을 보유하고 있는 중국은 미국의 양적완화에 직접 대놓고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저우샤오촨 중국 인민은행장은 “미국의 양적완화는 홍수처럼 번져 온 마을을 덮칠 것”이라는 비유로 불만을 표시했다. 양적완화가 인플레이션을 초래하거나 신흥시장에 대규모 자금을 유입시켜 외환시장의 불안을 가중시킬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과도하게 돈을 찍어내기 때문에 돈값이 폭락할 수도 있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최근 미국의 대규모 양적완화가 일본의 엔화가치를 급격히 끌어올렸지만 현실적으로 일본 경제가 취약한데다 일본이 경제를 살리겠다며 추가로 돈을 찍어낼 가능성을 비치고 있어 엔화가 폭락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모건 스탠리의 수석 이코노미를 역임했던 엔디 시에는 엔화 가치가 어느 순간 40~50% 폭락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지금 세계 경제는 또 하나의 시한폭탄을 안고 가고 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그러나 거의 의식하지 못하는 폭탄이다. 시간이 해결할 수 없는….

    [정진건 기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27호(2012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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