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over StoryⅠ]가을 대표대회 앞둔 중국 지도부…인민의 눈을 가볍게 보지 마라

    입력 : 2012.04.25 14:5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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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억 인구를 가진 세계 2위 경제 대국 중국이 올가을 권력 교체를 앞두고 요동치고 있다. 새로 구성될 공산당 지도부에 입성하기 위한 정치인들 간의 물밑 경쟁이 가열되면서 정치판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 공산당 고위 지도층 간 밀실 협의를 통해 권력자를 가려내는 중국의 독특한 정치제도 탓에 이런 다툼은 사실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마오쩌둥에서 시작해 덩샤오핑, 장쩌민, 후진타오로 이어져온 정치권력의 변화 과정에는 어김없이 권력 투쟁이 자리 잡고 있었다. 승자는 권력의 상층부에서 장기간 천하를 호령했고, 패자는 조용히 대중의 눈길에서 사라져갔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 권력 교체기에 나타나고 있는 지도층간 권력 다툼의 양상은 과거와는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어 더욱 관심을 끈다. 그동안 수면 아래에서 은밀히 진행되던 지도층 간 권력 투쟁의 일면이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그렇다. 바로 ‘왕리쥔 사건’이 그 계기였다.

    왕리쥔 충칭시 부시장이 미국 총영사관에서 망명을 시도하는 뜻밖의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다면 보시라이 전 충칭시 당서기가 그렇게 빨리 낙마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후진타오 국가주석으로부터 ‘반역자’라는 말까지 들은 왕 부시장의 미국 망명 기도는 보시라이가 추진하던 이른바 ‘충칭모델’의 허상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평소 충칭모델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있던 현 지도층이 이런 기회를 놓칠 리 만무했다.

    사실 현 지도부의 충칭모델에 대한 반감은 보시라이가 자초한 측면이 많다. 충칭모델은 정치적으로 정부의 개입을 중시하고, 경제적으로는 적극적인 분배를 강조한다. 사회적으로는 조직폭력배 일제 소탕을 외치며 공안정국을 조성하고, 문화적으로는 홍색(紅色)가요 부르기 등을 통해 마오쩌둥을 추모한다. 후진타오 지도부가 주창하는 과학적 사회주의 발전론과는 거리가 아주 먼 정책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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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동산 대책만 놓고 봐도 보시라이는 중앙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차기 총리로 유력한 리커창 상무부총리가 전국 3000만호 보장방(서민주택) 프로젝트를 추진하면서 민간 건설사 참여 지분을 늘리는 방안을 추진했지만 보시라이는 사업 진척 속도가 느리다는 이유로 지방 정부 참여 폭을 대폭 확대했다. 그 덕분에 다른 지역에서는 지지부진한 보장방 사업이 유독 충칭시에서만 잘나가는 사실에 기뻐할 중앙의 지도자는 없었다. 이런 묘한 분위기 속에서 왕 부시장이 보시라이 낙마의 결정적인 구실을 만들어준 것이다.

    앞으로 벌어질 중국의 정치 지형도 변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왕리쥔 사건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보시라이가 낙마한 것을 두고 중국 내 정치권력을 삼분하고 있는 계파(공청단파·태자당·상하이방) 간 다툼으로 이해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뜻이다. 그보다는 개혁개방을 신봉하는 우파(개혁파)와 옛 사회주의 이념을 강조하는 좌파 간 이념 대립의 산물로 바라보는 것이 정확하다.

    중국내 권력 서열 3위이자 중국의 집단지도체제를 이끌어가는 9명의 공산당 상무위원 중 가장 개혁 성향을 가진 원자바오 총리가 3월14일 제11기 5차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폐막 기자회견에서 그동안 금기시되던 문화대혁명까지 언급해 가며 좌파 움직임에 경고를 보낸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원 총리는 “문화대혁명의 잔재가 아직도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며 “공산당과 국가의 영도 제도에 대한 개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심지어 그는 “문화대혁명과 같은 역사적 비극이 다시 발생할 수도 있다”며 “책임 있는 당 지도자들과 당원들은 긴박감을 느껴야 한다”고 좌파에 서슬 퍼런 경고장을 날렸다.

    원 총리의 기자회견 바로 다음 날 보시라이가 전격 경질된 것은 ‘문화대혁명’ 발언이 원 총리 개인의 소신 발언이 아니라 전체 상무위원들 간 합의에 의한 경고였음은 어렵지 않게 유추해낼 수 있다. 후진타오 주석을 필두로 하는 공청단파가 상하이방과 연대하고 있는 태자당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모종의 ‘작업’을 했다는 가설은 팩트에 어긋난다는 것이 중국 정치에 정통한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이념 투쟁의 1라운드는 일단 개혁파의 승리로 돌아갔다. 그러나 끝난 것은 아니다. 중국의 권력 교체는 올가을 공산당 대회는 물론 내년 봄 전인대까지 이어지는 길고 험난한 절차를 통해 이뤄진다. 더구나 중국 정치권의 이념 스펙트럼은 아주 넓다. 보시라이보다 더 강경한 좌파 세력도 정치권과 학계에 다수 포진해 있다. 또 같은 개혁파라고 하더라도 주장의 농도에 따라 여러 갈래로 파벌이 나뉜다. 이런 복잡한 구도 속에서 최종적으로 어떤 이념이 승리를 거둘지는 섣불리 예단하기 어렵다.

    보시라이의 낙마로 이념 투쟁의 일면이 드러났지만 그보다 몇 배 더 격렬한 권력 투쟁은 이제 막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다.

    공산당 중앙정치국 위원 25명에 누구를 새로 뽑을 것인지, 그리고 이 중 핵심 9명의 상무위원은 누구로 결정할 것인지를 놓고 각 계파 간 정면승부가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더구나 차기 상무위원 진입이 가장 유력한 쪽에 속하던 보시라이의 예기치 않은 낙마로 한 자리가 더 생김에 따라 경쟁의 강도는 더 높아질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각 계파 입장에서 상무위원 자리를 하나 더 차지하느냐 못하느냐는 그 결과에 따라 어마어마한 권력상 차이를 낳는다.

    예컨대 중국의 최고 지도자는 공산당 총서기와 중앙군사위 주석, 국가주석을 겸임하는 후진타오임이 분명하지만 중대 사안을 결정할 때는 반드시 상무위원의 협의를 거쳐야 한다. 상무위원 9명은 똑같이 1인 1표씩 행사할 수 있다. 후진타오라고 혼자서 2표를 행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후진타오가 하고 싶어도 상무위원의 절반이 넘는 5명이 반대하면 무릎을 꿇어야 하는 것이 바로 중국 정치의 생리다.

    지금 후진타오가 바로 그런 위치에 서 있다. 현재 9명 상무위원 중 후진타오와 같은 공청단파는 원자바오 총리를 억지로 끼워 넣는다 해도 자신을 포함해 3명밖에 안 된다. 나머지는 전부 상하이방과 태자당이다.

    (왼쪽부터) 시진핑, 리커창, 왕양, 왕치산, 장더장
    (왼쪽부터) 시진핑, 리커창, 왕양, 왕치산, 장더장
    10년간 소수파의 설움을 겪어온 후진타오가 이번엔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차기 상무위원 후보군 중 차기 주석과 총리가 확실한 시진핑 국가부주석과 리커창 상무부총리 이외에 유력권에 드는 후보자 5명 중 2명, 그리고 경합권에 드는 5명 중 3명이 공청단파 소속이다. 경합권에 드는 3명 중 2명이 상무위원 진입에 성공할 경우 공청단파는 총 5명으로 늘어날 수 있다. 후진타오가 리커창을 자신의 후임으로 밀다가 결국 시진핑에게 뺏기긴 했지만 그를 견제할 수 있는 권력구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셈이다. 더구나 보시라이의 낙마로 그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공청단파의 왕양 광둥성 서기가 유력 후보로 급부상하고 있다. 후진타오는 장쩌민이 그랬던 것처럼 올가을 공산당 대회에서 총서기는 시진핑에게 넘겨주되 중앙군사위 주석직은 내년이나 후년에 이양하는 것을 목표로 할 가능성이 높다. 여기에다 상무위원까지 공청단파가 다수를 점한다면 후진타오는 장쩌민을 대신할 권력의 막후 실세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장쩌민 전 국가주석을 필두로 하는 상하이방과 쩡찡훙 전 부주석을 좌장으로 하는 태자당이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장더장 부총리(상하이방)를 보시라이의 후임으로 충칭시 당서기를 겸임하도록 한 것에서도 드러나듯 이들 계파의 영향력은 여전히 막강하다. 권력 투쟁이 최종 결말을 맺을 때까지 3대 계파 간 불꽃 튀는 물밑 대결은 올 한 해 내내 흥미진진한 얘깃거리를 양산해 낼 것으로 보인다.

    주목해야 할 대목은 권력 투쟁은 사실 수단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더 중요한 것은 차기 권력자인 시진핑이 어떤 통치 이념을 만들어 낼 것이냐는 것이다. 권력 투쟁의 결과에 관계없이 공산당 정치국 위원 25명을 중심으로 하는 신진 공산당 중앙 간부들은 후진타오의 과학적 사회주의 발전론을 대체할 새 통치 이념을 찾아야 한다. 갈수록 커지는 빈부격차 속에서 고조되고 있는 인민의 불만을 달랠 새로운 통치 이념을 마련하지 못하면 권력층 전체가 송두리째 위기에 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새 통치 이념의 일단은 이미 지난 전인대에서 살짝 드러났다. 경제 정책의 방점은 성장보다 안정에 찍히고, 사회분야에서는 분배와 민생을 강조할 것으로 예상된다. 정치적으로는 부정부패를 해소할 수 있는 각종 개혁조치가 실행될 것으로 보인다. 이런 변화를 한마디로 집약해 인민들에게 호소할 수 있는 이념적 슬로건 찾기가 올해 내내 중국 정치권의 숙제가 될 전망이다.

    [정혁훈 매일경제 베이징 특파원 moneyjung@mk.co.kr]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19호(2012년 0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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