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도체 AI | PartⅠ] 3대 메가프로젝트 승부수 |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 ‘제2 용인’ 되나 팹보다 어려운 생태계 조성에 달렸다

    입력 : 2026.08.06 10:51:08

  • 반도체 클러스터 부지로 지정된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광산구 군 공항에서 여객기가 이륙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반도체 클러스터 부지로 지정된 전남광주통합특별시 광산구 군 공항에서 여객기가 이륙하고 있다. <사진 연합뉴스>

    정부가 호남을 한국 반도체 산업의 새로운 축으로 키우겠다는 청사진을 내놓았다. 수도권에 집중된 반도체 생산기지를 서남권까지 확장해 국가 균형 발전과 미래 성장 동력을 동시에 확보하겠다는 구상이다. 하지만 반도체 클러스터는 부지만 확보한다고 완성되는 산업이 아니다. 초대형 팹 투자부터 전력·용수, 인재, 소재·부품·장비(소부장) 생태계까지 갖춰야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다.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는 한국 반도체 산업의 새로운 성장축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성공 여부는 기업 투자와 인프라 구축, 산업 생태계 형성이 얼마나 선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왜 지금 호남인가

    정부가 호남을 새로운 반도체 생산 거점으로 내세운 배경에는 인공지능(AI) 시대에 맞춰 반도체 산업 지도를 다시 짜겠다는 구상이 있다. 지난 6월 정부는 반도체와 AI 데이터센터(AIDC), 피지컬 AI를 국가 성장 전략의 핵심인 ‘3대 메가프로젝트’로 선정하고 향후 10년간 대규모 투자를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정부는 반도체와 AI 데이터센터, 피지컬 AI를 하나의 산업 생태계로 연결해 AI 경쟁력을 높인다는 구상이다. 반도체 분야의 핵심 전략은 ‘3S+1F’다. 수도권 생산 거점을 조기에 완성하는 ‘속도전(Speed)’, 생산기지를 전국으로 확대하는 ‘거점전(Stronghold)’, 차세대 반도체 시장을 선점하는 ‘선도전(Spearhead)’, 그리고 국가 차원의 총력 지원(Full-support)을 추진한다는 내용이다. 이 가운데 거점전의 핵심이 바로 호남권이다. 정부는 서남권을 수도권에 이은 ‘제2 생산 거점’으로 육성하고 반도체 팹 4기와 협력업체, 인력 생태계를 함께 구축한다는 청사진을 제시했다.

    정부는 후속 점검 회의에서 기업들과 함께 호남권 신규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 방안을 논의했고, 입지 후보지 가운데 광주군 공항 부지를 최적지로 선정했다. 약 250만 평 규모의 부지를 확보할 수 있고 공항 부지 특성상 평탄화가 완료돼 개발 기간을 줄일 수 있다는 점, 광주 도심과 KTX, 항만 등을 활용한 접근성이 장점으로 꼽혔다. 정부는 후보지 선정과 산업단지 지정, 전력·용수 등 기반시설 구축을 신속히 추진하겠다는 방침이다.

    전문가들은 호남권 클러스터 추진은 단순히 지역에 공장을 추가로 짓는 사업이 아니라고 입을 모은다.

    수도권에 집중된 생산기지를 전국으로 분산해 공급망 리스크를 줄이고, AI 시대 급증하는 반도체 수요에 대응할 새로운 생산 기반을 확보하려는 국가 전략의 성격이 강하다는 설명이다. 다만 정부가 제시한 청사진이 실제 산업 경쟁력으로 이어질지는 기업 투자와 인프라 구축, 산업 생태계 조성이 차질 없이 이뤄질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삼성·SK 투자, 어디까지 현실화될까
    사진설명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핵심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투자다. 반도체 생산기지 조성은 산업단지 지정이나 인프라 구축만으로는 완성되지 않는다. 수백조원을 투입하는 전 공정 팹이 실제 착공되고 생산에 들어가야 협력업체와 인력, 연구개발(R&D) 기능이 함께 집적되며 산업 생태계가 형성된다. 양사는 지난 6월 29일 청와대에서 열린 ‘대한민국 대도약 3대 메가프로젝트 국민보고회’에서 국내 대규모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삼성은 2026~2040년 국내에 총 2655조원을 투자하는 비전을 제시했고, 이 가운데 반도체 분야에 2100조원을 투입하기로 했다. SK그룹도 총 2100조원 규모의 중장기 투자 계획을 공개했으며, 반도체 분야에는 1100조원을 투자하겠다고 밝혔다. 두 기업의 국내 투자 계획을 합치면 약 4755조원에 달한다.

    호남권은 이 가운데 가장 주목받는 신규 투자 지역이다.

    정부와 기업이 발표한 계획에 따르면 삼성전자와 SK는 호남권에 메모리 반도체 팹 4기(기업별 2기)를 구축하고 약 800조원을 투자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정부는 이를 기반으로 수도권에 이은 ‘제2 반도체 생산 거점’을 조성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정부 집계에는 반도체 외 AI 데이터센터와 스마트가전 등 연계 투자까지 포함돼 호남권 전체 투자 규모는 약 896조원으로 제시됐다. 다만 이번 발표를 곧바로 투자 확정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는 지적이 나온다. 기업들이 발표한 수치는 대부분 2040년까지 내다본 중장기 투자 청사진이다. 기존 투자와 신규 투자, 반도체 외 AI 데이터센터·디스플레이·배터리 등 계열사 투자까지 포함된 규모라는 점이다. 실제 투자 시기와 집행 규모는 시장 상황과 반도체 수요, 인허가 진행, 전력·용수 공급 여건 등에 따라 단계적으로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정부가 제시한 1500조원 규모와 기업들이 발표한 4755조원 규모가 다른 것도 집계 기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정부는 신규 지방 투자 중심으로 산정했고, 기업들은 전국 단위 장기 투자 계획을 모두 포함했다. 업계는 AI 확산으로 메모리와 AI 반도체 수요가 구조적으로 증가하는 만큼 장기적으로 신규 생산 부지 확보는 불가피하다고 보고 있다. 다만 수백조원 규모의 팹 투자는 단기간에 이뤄지는 사업이 아닌 만큼, 향후 메모리 업황과 AI 투자 사이클, 정부의 인프라 지원 속도에 따라 투자 일정은 탄력적으로 조정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업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전력·용수 확보가 첫 관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전력과 용수다. 반도체 공장은 24시간 가동되는 대표적인 전력 다소비 시설이다. 초미세 공정으로 갈수록 생산 장비가 늘어나고 공정도 복잡해지면서 전력 사용량은 계속 증가하는 추세다. 정부도 이를 핵심 과제로 보고 있다.

    국가재정전략회의에서는 반도체와 AI 데이터센터, 피지컬 AI를 ‘3대 메가프로젝트’로 추진하면서 “기업의 시간표에 맞춰 전력과 용수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겠다”라고 밝혔다. 특히 전력은 단순히 발전소를 늘리는 것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발전 설비와 함께 초고압 송전망과 변전 시설이 적기에 구축돼야 한다. 업계에서는 생산라인 착공 시점과 전력 인프라 구축 시점이 맞지 않을 경우 투자 일정 자체가 늦어질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실제 정부가 반도체특별법과 메가특구법 추진 과정에서 전력망과 인허가 지원을 핵심 과제로 포함한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용수 확보 역시 중요한 변수다. 반도체 생산 공정에는 웨이퍼 세정과 화학 공정 등에 초순수(Ultra Pure Water)가 대량으로 사용된다. 일반 공업용수가 아니라 안정적으로 공급되는 대규모 산업용 용수 체계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용수 공급시설과 정수시설, 배관망 구축까지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만큼 공장 건설과 병행해 조기에 추진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다만 정부는 호남권 입지 선정 과정에서 전력과 용수 공급 여건을 주요 검토 항목으로 반영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향후 기업 투자 일정에 맞춰 기반시설을 구축하고, 예비타당성조사 면제와 인허가 패스트트랙 등을 통해 사업 속도를 높인다는 계획이다. 업계에서는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성공 여부도 결국 팹 착공 이전에 전력과 용수 인프라를 얼마나 적기에 확보하느냐가 첫 번째 시험대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김동수 세종대 반도체 학과 교수는 “전력·용수·환경·부지·교통 등 인프라 조건을 먼저 종합적으로 따져봐야 한다”며 “호남 클러스터의 핵심 과제 중 하나로 용인 클러스터와의 역할 분담도 중요하다”라고 짚었다. 반도체 클러스터의 경쟁력은 생산 공장(팹) 숫자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현대엔지니어링이 국내 최대 규모의 육상 태양광 발전 시설로 완공한 새만금 육상 태양광 1구역.
    현대엔지니어링이 국내 최대 규모의 육상 태양광 발전 시설로 완공한 새만금 육상 태양광 1구역.

    업계에서는 팹 건설보다 더 어려운 과제로 인재와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 기반 구축을 꼽는다. 세계 주요 반도체 클러스터도 단기간에 조성된 것이 아니라 수십 년에 걸쳐 기업과 연구기관, 대학이 함께 집적되며 경쟁력을 키워왔다. 국내 반도체 산업 역시 수도권을 중심으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생산시설 주변에 장비·소재·부품 기업들이 밀집해 성장해왔다. 장비 설치와 유지·보수, 공정 개선, 시제품 검증 등이 생산라인과 긴밀하게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첨단 공정은 장비업체 엔지니어가 수시로 생산라인을 방문해 대응하는 경우가 많아 물리적 거리가 경쟁력으로 이어진다는 평가가 나온다.

    전문 인력 확보도 중요한 과제다.

    반도체 공정 엔지니어와 장비 전문가, 연구개발(R&D) 인력은 물론 협력업체 인력까지 안정적으로 공급돼야 생산 거점이 지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 정부는 3대 메가프로젝트를 통해 미래 반도체 전문 인력 10만 명 양성을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실제로는 대학과 연구기관, 기업이 함께 참여하는 장기적인 인력 양성 체계가 필요하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정주 여건도 빼놓을 수 없다. 대규모 반도체 클러스터는 연구 인력과 가족이 장기간 거주하는 도시를 함께 만들어야 한다. 정부가 광주 군 공항 부지를 ‘기업형 첨단 도시’로 조성하고 주거·교육·의료·문화시설을 함께 구축하겠다고 밝힌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기업 역시 우수 인력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생산시설뿐 아니라 생활 인프라가 함께 갖춰져야 한다는 입장이다. 전문가들은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의 성패 역시 팹 건설 자체보다 산업 기반을 얼마나 빠르게 형성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보고 있다. 대기업 생산시설이 들어오더라도 협력업체와 연구기관, 대학이 함께 성장하는 구조를 만들지 못하면 수도권 의존도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반대로 선도 기업을 중심으로 소부장 기업과 인재가 집적되는 선순환 구조를 구축한다면 호남이 새로운 반도체 생산기지로 자리 잡을 가능성도 충분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김용석 성균관대 교수는 “반도체 전문 인력을 얼마나 확보할 수 있느냐가 성공의 핵심이다. 이는 결국 정주 여건과 직결된다”라면서 “전력과 용수는 자금을 투입하면 해결할 수 있지만, 인재는 돈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라고 설명했다.

    정치 논리 넘어 산업 거점 되려면

    호남 반도체 클러스터는 국가 균형 발전과 첨단산업 육성을 동시에 겨냥한 대형 프로젝트다. 그러나 업계에서는 지역 안배만으로는 세계적인 반도체 클러스터를 만들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기업이 실제 투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전력·용수와 교통망, 인재, 소부장 기업이 함께 성장하는 산업 생태계를 구축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단기적인 성과보다 장기적인 산업 경쟁력 확보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조언한다. 투자 계획이 정권이나 경기 변화에 흔들리지 않고 일관되게 추진되고, 기업의 투자 일정에 맞춰 기반시설과 제도 개선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호남은 ‘제2 용인’을 넘어 한국 반도체 산업의 또 다른 성장축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다는 평가다.

    김현재 연세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기본 인프라와 산업 기반이 충분한지 면밀한 검토가 선행돼야 한다”라면서 “자칫 정치적 논리가 산업 경쟁력이나 경제성보다 앞서 성급하게 추진될 경우 성공 가능성을 담보하기 어렵다”라고 말했다.

    [박소라 기자]

매일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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