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artⅡ] 비만치료제가 바꾼 식탁, 옷장 그리고 거울 | 양보다 질, 사이즈 다운, 리프팅에 주목
입력 : 2026.06.05 17:26:46
-
GLP-1(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1) 계열
약물은 뇌의 포만 중추를 자극해 원초적인 식욕을
통제한다. 배고프지 않은 소비자가 늘어난다는
건 식품 산업의 패러다임이 대용량, 가성비에서
소량, 고단백으로 전환된다는 의미다.
경기도 광주에서 서울 강남으로 출퇴근하는 이봉석(35) 씨는 자칭 평생 다이어터다. 키 178㎝에 몸무게 105㎏이던 그는 1년 전부터 ‘마운자로’ 주사를 맞고 있다. “작년에 당뇨 진단을 받고서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마운자로를 시작했다”며 “현재 78~80㎏을 유지하고 있는데, 비급여라 매달 약 35만~40만원이 들지만 외식비나 술값, 옷 등에 들어가는 비용이 줄어 큰 부담은 없다”고 전했다. 실제로 이씨가 공개한 가계부에는 마운자로를 사용하기 전 매일 등장하던 배달 음식과 음료, 술 등의 비용이 사라졌다. 큰 사이즈의 옷을 입기 위해 찾던 동대문과 이태원 대신 휴대폰 앱을 사용하며 의류비도 확 줄었다. 이씨는 “앱을 이용하니 같은 옷도 할인 받아 간편하게 살 수 있다”며 “무엇보다 식욕이나 배고픔이 없으니 무턱대고 찾던 배달 음식이나 야식을 끊게 돼 라이프스타일이 달라졌다”고 설명했다. 이씨처럼 치료가 목적인 비만 환자는 물론 다이어트가 목적인 일반인까지 비만치료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자료를 살펴보면 올 1월부터 3월까지 위고비와 마운자로의 국내 처방 건수는 총 80만96건에 이를 만큼 급증했다. 3월에만 22만8199건이 처방되며 처음으로 한 달 처방 20만 건을 넘어섰다. 이미 예고된 비만약 시장의 성장세에 식품, 패션, 뷰티 등 라이프스타일을 책임지는 산업군이 잰걸음을 시작했다. 올 초 미국 시장에 ‘먹는 위고비’가 등장하자 한 단계 더 속도를 올리고 있다.
외식 대신 집, 식탁의 미니멀리즘비만치료제 성장에 가장 먼저 변화가 거론되는 산업은 식품·외식업계다. 위고비나 마운자로 등 GLP-1(글루카곤 유사 펩타이드-1) 계열 약물은 뇌의 포만 중추를 자극해 원초적인 식욕을 통제한다. 배고프지 않은 소비자가 늘어난다는 건 식품 산업의 패러다임이 대용량, 가성비에서 소량, 고단백으로 전환된다는 의미다.
미국 코넬대의 조사에 따르면 GLP-1 사용자가 포함된 가구는 6개월 내에 패스트푸드, 커피숍, 배달음식점 지출이 평균 5.3%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고소득층으로 갈수록 감소 폭은 8.2%까지 확대됐다. 실제 주사를 맞은 이들의 평균 칼로리 섭취량은 이전 대비 약 21%나 줄었다. 글로벌 투자은행 UBS의 시장조사기관인 UBS 에비던스 랩의 설문조사를 보면 칼로리 섭취를 줄인 복용자의 70%가 ‘간식 섭취를 가장 먼저 끊었다’고 답했다.
비만치료제 열풍에 탄산음료, 베이커리, 스낵류 등 글로벌 식품 업계에선 대대적인 구조조정과 포트폴리오 재편이 이어졌다.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는 판단에 체질 개선에 나선 것이다. 글로벌 소비재 공룡 ‘유니레버’는 아이스크림 사업부를 ‘더 매그넘 아이스크림 컴퍼니(The Magnum Ice Cream Company)’로 독립 분사했다. 분사 후 첫 실적 발표에서 북미와 유럽 시장 판매량이 3.1% 감소하자 저당, 고단백 라인업을 확대하고 한 입 크기의 소형 제품을 출시하며 대응에 나섰다. 미국의 식음료 기업 ‘펩시코’는 매출 증가에도 판매량이 줄어들자 그 원인을 ‘비만치료제의 영향’이라고 콕 짚어 지목했다. 펩시코는 올 초 레이스(Lay’s)와 도리토리(Doritos) 등 주요 스낵 가격을 15% 내리고 소포장 제품을 확대하며 가격 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이와 관련해 블룸버그통신은 “가격을 낮추고 구조조정과 공장 폐쇄 등 내부 비용을 줄인 전략이 효과를 내고 있다”고 전했다.
바이탈 퍼슈트의 냉동식품. 글로벌 식품가공업체 ‘제너럴 밀스’는 단백질 함량을 높인 치리오스 프로틴과 애니스 슈퍼 맥을 출시하며 건강 마케팅에 주력하고 있다. 미국의 음료기업 ‘큐리그 닥터 페퍼’는 올해부터 음료와 커피 사업부를 분리해 제로 슈가와 미니 사이즈 제품군을 강화할 계획이다. 그런가 하면 ‘네슬레’는 아예 ‘GLP-1 사용자를 위한 식품 브랜드’를 표방하며 지난 2024년 5월, 비만치료제 사용자를 겨냥한 소용량 냉동 밀키트 브랜드 ‘바이탈 퍼슈트(Vital Pursuit)’를 론칭했다. 네슬레가 약 30년 만에 미국에서 출시한 신규 브랜드다. 출시 초기에는 ‘GLP-1 Friendly’라는 문구가 없었지만 이 표기를 추가한 후 판매가 눈에 띄게 늘었다는 후문이다. GLP-1 전용 식품에 대한 소비자의 니즈가 확인된 셈이다. 바이탈 퍼슈트 제품군은 전곡류 볼, 단백질 파스타 볼, 콜리플라워 크러스트 피자, 샌드위치 멜트 등으로 구성됐다. 모든 제품이 ‘1인분’으로 만들어졌고, 가격은 개당 4.99달러로 책정됐다. 네슬레는 올 3월 단백질 음료 라인도 추가했다. GLP-1 사용자를 위한 전용 영양 정보 플랫폼 ‘GLP-1 Nutrition’도 운영 중이다. 네슬레가 냉동식으로 시장 선점에 나섰다면 ‘다논’은 냉장 유제품으로 시장 공략을 시작했다. 다논은 지난해 자사 브랜드 ‘오이코스’에 ‘GLP-1 사용자의 근육량 유지를 돕는’ 요거트 음료를 추가했다. 고단백 그릭 요거트 음료 형태로 살과 함께 근육도 빠진다는 우려에 대응한 제품이다. 올 2월 미국의 식품 전문 매체 푸드다이브는 “식품 대기업들이 GLP-1의 영속적 영향(Lasting Influence)’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이들 기업의 전략을 ‘단백질과 식이섬유 함량 강화’ ‘1인 소용량 포장’으로 요약했다.
매일유업의 셀렉스 프로핏 스포츠. 이러한 흐름은 국내 식품업계도 마찬가지. ‘매일유업’은 최근 350㎖ 한 병에 단백질 45g을 담은 ‘셀렉스 프로핏 스포츠 와일드 초코’를 내놨다. 체중 60㎏ 성인의 하루 권장 단백질 섭취량(60g)의 70% 이상을 한 병으로 보충하도록 설계한 제품이다. ‘남양유업’도 ‘테이크핏 몬스터’의 단백질 함량을 기존 43g에서 45g으로 높여 리뉴얼했다. 초기 10~20g 수준이던 단백질 함량이 4배나 늘어난 셈이다. 업계의 한 관계자는 “롯데칠성의 1분기 매출을 살펴보면 탄산수는 6.1%, 스포츠 음료는 11.5% 늘어난 반면 커피나 주스는 1% 증가에 그쳤다”며 “당 함량이 높은 주스류에서 저당 스포츠 음료로 소비 흐름이 이동하고 있다”고 전했다.
체형 변화, 사이즈 다운
몸무게가 줄면 입는 옷이 바뀐다. 패션·유통 업계는 비만치료제가 가져올 소비자의 체형 변화를 새로운 비즈니스 기회로 포착하고 있다. 특히 플러스 사이즈(빅 사이즈) 시장의 축소와 미디엄(M), 스몰(S) 사이즈 수요의 증가에 방점을 찍고 있다.
비만치료제가 패션 시장에 미치는 영향은 데이터로도 확인된다. 올 1월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서카나의 조사에 따르면 GLP-1 사용자의 80%가 ‘체형 변화로 인해 새 옷이 필요할 것’이라고 답했다. 55%는 이미 ‘새 옷이나 신발을 구매한 경험이 있다’고 밝혔고, 그 이유는 단연 사이즈 변화였다. 자산운용사 버스타인은 “GLP-1 비만치료제 시장이 2030년까지 950억 달러(약 128조원) 규모로 급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하며 이와 관련해 “옷장 교체 수요가 연간 최대 130억 달러의 추가 의류 지출을 만들어낼 것”이라고 추정했다. 이러한 변화는 실제 시장에서 확인되고 있다.
미국의 남성 빅 앤드 톨 전문 브랜드 ‘DXL(Destination XL Group, DXLG)’은 올 3월에 진행된 2025년 4분기 실적 콘퍼런스콜에서 신규 매장 오픈 일시 중단 등 보수적인 운영 전략을 발표했다. 이날 현장에서 하비 캔터 CEO는 “고객의 25%가 GLP-1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며 “이들은 목표 체중에 도달하기 전 까지 옷을 구매하지 않으려 한다”고 밝혔다. DXL의 2025년 4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6% 감소했다. 순손실은 2960만 달러로 130만 달러였던 전년 대비 20배 이상 늘었다.
북미 지역의 여성 플러스 사이즈 전문 브랜드 ‘토리드’ 역시 사정이 다르지 않다. 지난해에만 미국 전역에서 151개 매장을 닫은 토리드는 올 상반기에도 30개 매장을 추가 폐점할 계획이다. 그렇다면 수혜를 보는 브랜드는 어떤 곳일까. 서카나의 자료를 살펴보면 GLP-1 사용 후 첫 1년 동안 구매가 증가한 카테고리는 ‘액티브웨어’ ‘데님’ ‘드레스’ ‘이너웨어’였다. 뉴욕에 본사를 둔 소비자 인사이트 전문기업 컨슈머 에지는 지난해 상반기에 “GLP-1 관련 결제를 한 소비자들의 포멀웨어 구매가 전년 동기 대비 80% 폭증했고, 스포츠용품은 24% 증가했다”고 발표했다.
볼륨·리프팅, 안티에이징 전선비만치료제가 바꾼 가장 극적이고 역설적인 지형은 뷰티 시장이다. 최대 화두는 일명 ‘오젬픽 페이스(Ozempic Face)’. 급격한 지방 감소로 갑자기 노화가 찾아온 것처럼 얼굴 볼륨이 빠지고 피부가 처지는 현상이다. 화장품 트렌드가 단순한 미백이나 보습 중심에서 피부 밀도를 채워주는 볼륨과 탄력 케어로 범위를 넓히고 있는 이유다.
오젬픽 페이스가 처음 언급된 건 약 2년 전. 임상 데이터와 제품 개발 사이클을 감안하면 2025~2026년이 처음 GLP-1 전용 스킨케어 제품들이 시장에 나오는 시기가 된다. 우선 로레알 산하의 ‘스킨수티컬즈’가 GLP-1 사용자들의 임상실험을 거친 ‘A.G.E. 인터럽터 울트라 세럼’을 출시했다. 스킨수티컬즈 측은 “체중을 줄이는 건강한 생활 방식을 선택했지만 피부 처짐이라는 새로운 고민에 맞닥뜨린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제품”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미지 스킨케어’는 ‘Vol.U.Lift GLP-1 4D 스킨 리바운드 콤플렉스’를 내놨다. 제품명에 아예 GLP-1을 명시한 스킨케어 제품이다. 이미지 스킨케어는 “GLP-1로 인한 얼굴 볼륨 감소와 피부 질감 저하, 탈수, 주름 등 외관을 개선하는데 시너지 효과를 낸다”고 소개하고 있다. ‘라로슈포제’도 GLP-1 사용자를 대상으로 테스트한 피부 탄력 크림과 세럼을 출시했다. 업계 한 관계자는 “올리브영 등 국내 H&B 스토어에서 유통되는 브랜드란 점에서 국내에서도 GLP-1 관련 수요가 있을지 주목하고 있다”고 전했다.
K-뷰티 브랜드의 선전도 기대된다. 직접 GLP-1을 거론하진 않지만 오젬픽 페이스 개선에 영향을 미치는 콜라겐 합성 촉진, 히알루론산 보습, 레티놀 리뉴얼, 피부 탄력 강화 등의 기능은 이미 K-뷰티의 강점이다. 전문가들은 ‘설화수’의 자음생 라인, ‘아모레퍼시픽’의 프리메라, ‘이니스프리’의 히알루론산 앰풀 라인, ‘LG생활건강’이 생산하는 ‘후’ ‘숨’ 브랜드의 한방 복합 안티에이징 라인 등은 오젬픽 페이스 케어에 적합한 성분 구성을 이미 갖추고 있다고 평가한다. 마케팅 메시지의 전환만으로 관련 수요를 충분히 흡수할 수 있다는 의미다.
[안재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