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현덕의 한국기업 탈각의 순간들] 세아상역 | ① “도전하는 사람만이 운명을 바꾼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도전한다”
입력 : 2025.12.08 15:26:53
-
▶ 손현덕의 <한국기업 탈각(脫殼)의 순간들>
성공한 기업들은 보면 결코 우연이란 건 없습니다. 운이 따랐다 한들 그 운을 기회로 만든 결정적 순간이 있습니다. 마치 뱀이나 매미가 껍질을 벗듯, 탈각(脫殼) 이전의 기업과 이후의 기업은 전혀 다릅니다. 담대한 변신으로 위대한 성공을 이끈 기업가의 여정을 기록합니다.
김웅기 글로벌세아그룹 회장이 재봉틀 전시대 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한국에 외환위기의 먹구름이 몰려오기 1년 전쯤인 1996년 여름, 세아상역은 미국의 속옷 브랜드로 유명한 ‘빅토리아시크릿’으로부터 오더를 받는다. 니트 내의를 만들어달라는 주문이었다. 세아상역 창업자인 김웅기 현 글로벌세아그룹 회장은 이 오더를 본인의 자식과도 같은 사이판 공장에 투입한다.
그가 사이판 공장을 자식처럼 생각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본인 손으로 처음 지은 공장이기 때문이다. 그가 의류산업에 뛰어든 건 1986년. 중견 의류업체를 그만두고 직접 직원 2명과 함께 520만원 들고 창업한 게 지금의 세아상역, 당시 세아교역이었다. 520만원은 그의 전 재산이었다. 자체 공장이 있을 리 없었다. 김 회장은 재주가 남달랐다. 특유의 신뢰와 성실성을 바탕으로 한 주문 수주가 주특기였다. 그 주문을 소화하려면 옷 만드는 봉제는 물론 편직 염색 등 중간 공정도 필요해 이 공장 저 공장 떠돌면서 빈 생산라인을 잡아야 했다. 그런 고달픈 시절을 보내다가 중국 칭다오에 있는 공장을 합작으로 운영하게 됐고 이어 그곳에서 임대 공장을 얻었다. 그러나 모두 남의 공장이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사이판에 직접 땅을 사고 터를 다져 공장을 지었다. 그에겐 세 번째 공장이었으나 본인 손으로 만든 첫 공장이었다. 그가 사이판 공장을 자식처럼 여기는 이유다. 창업 10년 차인 1995년의 일이었다.
공장 이름을 사이판 위너스(WINNERS)로 지었다. 승리의 함성이 아쉬운 김 회장이기도 했지만 남들이 다 “이길 수 없는 도박”이라며 말리는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김 회장은 “어떤 시련도 기필코 이겨내겠다는 마음으로 지은 이름”이라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의류 제조업체들은 미국 시장에 수출해야 돈을 벌 수 있었던 때였다. 문제는 쿼터(Quota) 제도라는 일종의 무역 장벽. 쿼터 제도란 특정 국가나 특정 기업이 일정 기간 동안 수출할 수 있는 수량이나 금액을 제한해 놓는 제도인데 2005년이 돼서야 없어졌다. 요컨대 쿼터가 돈이었던 시절. 신생 기업 세아의 입장에서는 주문을 따와야 먹거리가 생기고, 그 주문을 받아 수출하려면 쿼터가 남는 곳에 가서 쿼터를 가져와야 하는 이중 영업을 해야만 했다. 수수료를 물어야 하는데 그걸 쿼터 차지(Charge)라고 했다. 그러고 나면 이제 옷을 만들 공장을 알아봐야 하는데 사이판이라는 곳은 미국령이었기 때문에 쿼터가 필요 없었다. 그래서 1980년대 초부터 너도나도 의류 제조를 위해 사이판에 진출하기 시작해 세아가 이곳에 들어온 1995년에는 34개나 되는 기업이 난립했다. 경쟁도 경쟁이지만 문제는 인건비. 미국 정부에서 매년 최저임금을 인상해 한계에 달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많은 기업들이 초기 단물만 빼 먹고 철수에 나서고 있었는데 그 시점에 세아가 이곳에 들어왔으니 남들이 다들 도박이라고 할 만했다.
김 회장은 여기에 한 술 더 떴다. 사이판에 가장 훌륭한 공장을 짓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지금도 사이판을 말 그대로 전 세계 통틀어 최고의 공장이라고 자부한다. 진정 종업원을 위한 공장.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우리는 후발 주자다. 남들이 실패할 것이라고들 한다. 비용이 올라서 그렇다는데 생산성을 높이면 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동안 중국에서 같이 일한 숙련도가 높은 근로자들이 있다. 그들을 데려오면 될 것’이라고.
그래서 그는 최고의 기숙사를 지었다. 1000명 이상 들어갈 규모였다. 특별히 공을 들인 것은 샤워 시설. 더운 나라라서 근로자들이 조금만 일을 하면 땀을 비오듯 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청결한 환경은 생산성에 직결된다고 판단했다. 휴게실과 세탁실도 쾌적하게 만들었다. 여성 근로자들이 가장 신경 쓰는 곳이기도 했다. 식당은 한 번에 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로 지었다.
33인 사이판 출장 기념 사진 모두가 위기를 볼 때 나는 기회를 본다김 회장은 근로자를 채용하기 위해 중국 옌지로 갔다. 거기서 숙련공 선발 테스트를 했다. 세아가 사이판에서 근무할 공장 근로자들을 채용한다는 소문이 나자 지린성은 물론 헤이룽장성에서도 지원자들이 찾아왔다. 테스트 결과 숙련도에 따라 A·B·C 등급으로 구분해 A급부터 사이판으로 불렀다. 한 번에 200명씩. 김포공항을 거쳐 사이판으로 여섯 번에 나눠 비행기를 띄웠다. 대부분 조선족. 계약기간은 2년이었다. 한 푼이라도 돈을 더 벌기 위해 이역만리 타국으로 온 근로자들. 근로자들은 남성이 20%, 여성이 80% 정도였는데 2년 정도 열심히 일하면 중국에 집 한 채 구입할 돈을 마련할 수 있었다. 생활력 강한 사람들은 2년 계약기간을 마치면 중국에 휴가를 다녀와서 다시 2년을 근무하기도 했다. 그는 “여성 근로자들의 경우 미혼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기혼자들이어서 자녀를 남편이나 친정 또는 시집에 맡기고 사이판으로 왔다”며 “애틋한 마음에 친동생 친조카처럼 대했다”고 말한다.
사이판 근로자들에게 빅토리아시크릿 오더를 맡긴 건 일종의 모험이었다. 초보 근로자들이 감당하기엔 부담되는 오더였다. 그러나 김 회장은 나름 자신이 있었다. 이제 어느 정도 훈련이 됐다고 봤다. 그런데 웬걸, 본작업을 시작하니 속도가 나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김 회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정확한 수량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약 세 종류가 되는 오더가 4만~5만 장 정도였을 겁니다. 이게 정해진 시간을 맞추려면 날짜별로 완성해야 할 수량이 있습니다. 한 단계를 마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데 손발이 안 맞으면 예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결국 그러다가 도저히 납기를 맞추지 못하는 상황까지 오게 됩니다. 납기를 1주일 정도 남기고 사이판 공장에서 긴급 상황 보고가 올라왔습니다.”
김 회장에게 납기는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건 신뢰의 문제였다. 하나 더 생명과 같은 건 품질. 그는 “좋지 않은 품질의 제품으로 납기를 준수하는 것은 미래가 없고, 정상적인 품질의 제품으로 납기를 못 지키는 것도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면서 “납기와 품질은 세아의 생명줄”이라고 말한다.
4년 전 김 회장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신뢰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세아가 바이어들 거래를 단절하고자 했던, 또 단절했던 그런 기억은 있습니다. 그러나 바이어 쪽으로 부터 거래를 단절하자는 통보를 받은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비즈니스는 신뢰입니다. 세아와 거래를 하면 뭐든지 실패하지 않는다. 저는 그런 기업을 만들고자 했습니다.”
그는 중대 결단을 내린다. 당시 본사 직원은 총 34명.
“연락 직원 한 명만 남기고 모두 내일 밤 사이판으로 가는 비행기를 탄다. 다들 준비하라.” 그렇게 김 회장을 포함한 33명의 본진 정예부대가 사이판으로 날아갔다. 사이판으로 가는 비행기는 저녁 8시에 김포공항에서 출발해 그다음 날 새벽 0시 20분 사이판 국제공항에 도착했다. 통관을 마치자 버스 한 대를 타고 공장으로 갔다. 공항에서 공장이 위치한 샌 안토니오까진 20분 정도밖에 안 됐다. 숙소에서 눈을 붙이고 아침에 바로 출근. 그렇게 작업을 도왔다.
“사실 본사 직원들이 재봉틀 돌리는 일을 한 건 아니었습니다. 원단을 옮겨주고 주변 정돈하고 근로자 1000명 뒷바라지를 한 겁니다. 저도 팔을 걷어붙이고 일했습니다. 2교대로 나눠 3박4일 철야로 일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납기를 지켰습니다. 마지막 날 우리는 낮에 해수욕을 즐기고 저녁에는 아리랑이라는 한정식집을 빌려 참치회와 소주로 회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밤 비행기로 서울로 돌아왔는데 다들 초죽음이었지요.”
이 사건이 세아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사이판 근로자들의 로열티가 수직 상승했다. 김 회장이 얻은 건 직원들의 열정. 최고경영자의 솔선수범이 기업의 분위기를 어떻게 바꿔놓을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 사례이다. 그 뒤 사이판의 생산성은 수치로 입증됐다. 1999년 11월 30일 무역의 날, 세아상역은 700만달러 수출의 탑을 수상한다. 사이판 공장 덕분이었다. 사이판 공장의 이름 승리의 ‘위너스’는 이후 건설되는 과테말라,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 총 8개 공장의 간판으로 쓰이게 된다.
(다음 회차에서 이어집니다.)
[손현덕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