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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덕의 한국기업 탈각의 순간들] ② 짜장면과 소고기라면
입력 : 2025.08.01 17:5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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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현덕의 <한국기업 탈각(脫殼)의 순간들>
성공한 기업들은 보면 결코 우연이란 건 없습니다. 운이 따랐다 한들 그 운을 기회로 만든 결정적 순간이 있습니다. 마치 뱀이나 매미가 껍질을 벗듯, 탈각(脫殼) 이전의 기업과 이후의 기업은 전혀 다릅니다. 담대한 변신으로 위대한 성공을 이끈 기업가의 여정을 기록합니다.라면 초창기, 그러니까 1960년대만 해도 소비자들은 면과 국물 중 면을 중시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는 먹고살기 힘든 때였다. 율촌이 라면 사업을 시작한 이유이기도 하다. 대다수 국민이 보릿고개 때마다 초근목피로 연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먹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라면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먹는 게 건강이고 배불리 먹는 게 장수(長壽)였다. 당연히 뱃속에 들어가면 국물보단 면이 든든했다.
그가 라면에 눈을 뜬 것은 일본 롯데의 무역부장 때였다. 신상품이나 소재 개발을 하는 롯데의 연구소를 자주 드나들었고 거기서 각종 식품 정보를 취득했다. 그러던 중 연구소 사람들이 당시 일본에서 한창 인기를 끌고 있던 라면을 소개하며 앞으로 한국에서도 분명히 라면을 먹게 될 것 같으니 사업을 한번 해보라고 권했다.
일본이 라면을 시작한 건 1958년.
닛신(日淸)식품이 최초의 인스턴트 라면을 개발해 보급했다. 뒤이어 에스코크 식품, 묘조(明星)식품 등이 뛰어들었다. 이 묘조식품이 한국 최초의 라면회사인 삼양라면을 탄생시킨 합작사였다. 그때가 1963년. 농심이 라면을 시작하기 딱 2년 전이었다. 라면 사업을 하기로 결심한 율촌이 큰형 신격호에게 퇴짜를 맞은 일화는 너무나도 유명하다. 라면 사업하겠다고 하니 험한 말이 돌아왔다고 한다.
“라면이라 캤나. 그거 한국에서 누가 사 묵을 끼라고 만들라 카는데. 치아라 마.”
농심 창업주인 고(故) 신춘호 회장(가운데)이 1982년 육개장 사발면 출시를 앞두고 직원들과 함께 시식하고 있다. 율촌이 장래를 보고 하는 비즈니스라며 설득을 시도했으나 “관두라카이. 장래고 뭐고 한국에서 라면 사업이 될 리가 없다”는 핀잔만 받았다. 기대했던 형의 지지를 얻지 못한 게 오히려 전화위복이었다. 형의 반대가 오기를 불러일으켰다. 오기 하면 율촌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라면 사업이었다. 율촌이 처음 만든 라면의 이름은 ‘롯데라면’. 1965년 12월 19일이었다. 무게는 120g. 가격은 10원을 조금 넘었다. 따라서 맛이고 뭐고 할 게 별로 없었다. 메인이 면이고 스프는 그냥 간을 맞추는 수준이었다.
율촌은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소비자들의 입맛이 달라지는 걸 느꼈다. 생활 형편이 나아지면서 양보다는 질을 따지는, 그러니까 보다 맛있는 제품을 찾는 추세로 바뀌고 있었다. 율촌은 라면의 맛은 스프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른 회사가 흉내 낼 수 없는 독특한 국물 맛을 내는 스프 개발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그 결과 탄생한 제품이 ‘짜장면’과 ‘소고기라면’이었다. 한국 최초의 인스턴트 짜장면은 1970년 2월 15일 시장에 나왔다. 약 7개월간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다가 중국집에서 맛볼 수 있는 손 짜장 맛을 살렸다. 율촌이 당시 서울에서 짜장면 맛있기로 소문난 아서원 주방장을 회사로 초빙해 연구원들을 지도한 결과였다. 또 다른 명작은 우리 국민이면 누구나 좋아하는 소고깃국의 깊은 맛을 재현한 소고기라면. 율촌은 주말이면 서울 구파발에 있는 한양컨트리클럽으로 골프를 하러 가곤 했는데, 오가는 길에 독립문 근처 식당에서 일행과 식사를 했다. 그 식당이 소고기국밥집이었다. 율촌은 그 맛을 살린 라면 개발에 나섰다. 개발 과정에서 서울에서 맛집이라고 소문난 부민옥, 하동관 등을 순회하면서 조리법을 눈여겨보았다. 그렇게 개발한 스프였다. 대형 무쇠솥에 통째로 잡은 소의 고기와 뼈를 넣고 여기에 간장과 양념을 가미해 푹 고아서 농축액을 만든 다음 이를 뜨거운 바람으로 건조(열풍건조)하는 방식이었다. 당시 표준어는 쇠고기였으나 고기 앞에 붙는 ‘쇠’의 어감이 좋지 않아 소고기로 지었다. 이 두 가지 제품 모두 스프에 승부를 건 율촌의 역작이었다. 아무도 가지 않은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율촌의 고집이 만들어낸 히트 제품. 그리고 이는 훗날 국내 최초의 스프 전용 공장을 만들게 되는 밑거름이 됐으니, 그게 안성공장이다.
김재훈 전 소장은 “율촌은 모든 열정을 스프에다 쏟았다”면서 “라면의 핵심은 건강과 맛을 같이 잡을 수 있는 스프라고 확신했다”고 회고한다. 김진구 농심 안성공장 공장장(상무)은 “면을 만드는 사람에게 나름 자부심이 있는 것도 부인할 수는 없는 사실”이라면서도 “면은 식감 차원에서 스프보다는 드라마틱하게 느끼지 못한못한다”며 율촌이 그에게 한 말을 상기시켰다.
“면과 스프 중 뭐가 중요한 것 같으냐? 면은 누구나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스프는 아무나 못 만든다.”
안성 스프공장의 탄생안성스프전문공장 짜장면은 시중에 내놓기가 무섭게 팔렸다. 일반 중국집에서 먹는 가격보다 훨씬 싸고 위생적이었기 때문이다. 인스턴트 식품이라 맛은 진짜 짜장면과는 차이가 날 수 있지만 소비자에 따라 인스턴트를 선호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공장을 풀가동해 하루 9000박스를 내보내는데도 소매상들의 수요를 맞출 수 없었다. 한 박스라도 더 가져가려는 소매상들의 아우성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도 신바람 나는 일이었고 직원들의 사기도 충천했다. 라면 시장에서 만년 2위, 그것도 1등과 격차가 어마하게 나는 롯데공업의 위상도 크게 높아졌다. 그러나 경쟁업체들이 곧바로 따라왔다. 인기가 높다 보니 유사 제품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회사명을 얘기하지 않고 “그냥 짜장면 주세요” 하면 가게에서 아무 제품이나 팔았다. 그러다 보니 품질이 떨어지는 제품에 실망한 소비자들이 인스턴트 짜장면 자체를 기피하는 현상까지 빚어졌다. 소고기라면 역시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는데 유사 제품이 쏟아지면서 발목을 잡았다. 짜장면 때는 그래도 한 달 정도 관망기가 있었으나 소고기라면은 즉시 유사품이 나왔다. 일부 경쟁사의 제품명은 ‘쇠고기라면’이었다.
율촌은 소중한 경험을 얻었다. 아무나 모방할 수 없는 제품으로 차별화해야겠다는 것. 중대 결심을 하게 되는데 그게 스프공장 건설이었다. 공교롭게도 당시 1970년대 말은 라면 소비가 정체기를 맞고 있을 때였다. 라면 피크가 아니냐는 분석도 나왔다. 율촌은 이 이론을 믿지 않았다. 김 전 소장의 증언.
“1970년대 말 한국은 오일쇼크로 휘청거릴 때였습니다. 나라 전체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율촌은 이때야말로 투자의 적기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는 평소 이미 라면은 면 중심에서 스프 중심이 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과거와는 전혀 다른 맛으로 차별화를 꾀하는 것은 결국 스프에 있고 그러려면 스프 전용 공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공장은 안성 읍내 초입에 자리한 공단으로 정했다. 그때만 해도 한국은 전반적으로 기술 능력이나 설비 수준이 선진국에 비해 크게 뒤처진 때인지라 외국의 앞선 기술과 시스템을 들여와야 했다. 그러나 율촌은 턴키베이스로 기술 설비를 도입하지 않고 한국적 맛을 내는 농심의 노하우와 결합된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다. 그래서 시스템은 독일의 휘글리사, 설비 디자인과 제작은 독일 기계 전문 메이커인 비간트사에 의뢰했다.
공장 완공은 시스템 선정 후 2년이 지난 1982년 4월.
예상보다 늦어졌다. 이유는 설비가 들어온다 해도 이걸 공장에 안착해 실제 정상적으로 가동해야 하는데, 그건 또 다른 차원의 고난도 작업이기 때문이다. 스프 원료를 혼합해 저장하는 사일로(Silo) 설비만 해도 시스템이 복잡해 정상 운영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김 전 소장은 “당시 일본 사무소에 근무했던 신동원 회장과 일본 선진 설비를 벤치마킹해 도입한 설비인데 당초 쉽게 적용할 것으로 생각했으나 실제로는 그게 아니었다”면서 “2년이란 준비 기간은 어찌 보면 초고속으로 진행해 달성한 것으로 봐야 한다”고 말한다. 안성공장이 완공되고 나서 20년이 지나 김 전 소장은 스프연구실장을 맡는다. 동시에 안성공장장으로 발령 난다. 그러고는 나중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저온건조공법인 제오드레이션(Zeodration)을 연구하는 태스크포스의 총괄 책임을 맡는다. 이 공법이 스프 건조기에 장착된 농심의 핵심 경쟁력이기도 하다. 그는 안성 스프공장에 율촌의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설명하면서 다음의 일화를 들려준다.
“제가 안성공장장에 부임한 게 1992년이었습니다. 회사가 공장 인근 연립주택을 하나 구해 사택으로 제공했습니다. 그냥 방 하나 있는 소박한 숙소였습니다. 율촌은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 ‘설비 시스템 그거 아직도 안 됐노’라고 물어보더니 대답이 신통치 않자 급기야는 안성공장에 내려와 ‘내 오늘부터 니 집에서 자야겠다’며 끝장을 내겠다는 태세였습니다. 그분이 원래 그렇거든요. 근처에 호텔도 없었던 때니까요. 집사람에집사람에게 연락해 침구 좀 깨끗한 거 하나 가져오라고 하고 저는 마루에서 자고 율촌은 내 방에서 주무셨습니다. 5일 정도는 그렇게 보냈지요. 그제야 시스템이 안정되기 시작했습니다. 그걸 보자 그는 ‘됐다. 이제부터는 니가 알아서 해라’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율촌에게 안성공장은 그런 곳이었다. 공장 건설 2년 동안 투자된 돈은 48억원. 당시 농심 자본금의 두 배, 연간 매출액의 10%가 넘는 금액이었다. 회사 밖으로는 오일쇼크로 경제가 어렵고 안으로는 아직 1등 기업을 따라잡지 못하고 바둥대던 시기에 율촌은 어마어마한 모험을 단행한 것이다.
(다음 회차에서 이어집니다.)
[손현덕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