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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덕의 한국기업 탈각의 순간들] ① “남의 길을 따라가지 말라… 성공의 껍데기만 가질 뿐이다”
입력 : 2025.08.01 17:38: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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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현덕의 <한국기업 탈각(脫殼)의 순간들>
성공한 기업들은 보면 결코 우연이란 건 없습니다. 운이 따랐다 한들 그 운을 기회로 만든 결정적 순간이 있습니다. 마치 뱀이나 매미가 껍질을 벗듯, 탈각(脫殼) 이전의 기업과 이후의 기업은 전혀 다릅니다. 담대한 변신으로 위대한 성공을 이끈 기업가의 여정을 기록합니다.농심 신동원 회장이 지난 2023년 사내 아이디어공모전 ‘챌린지페어’에서 연구원들이 만든 시제품을 시식하고 있다. 라면을 건강식품이라고 한다면 정신 나간 사람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 정신 나간 사람이 있었다. 농심(창업 당시 회사명은 롯데공업) 창업자 율촌 신춘호다. 그는 라면 사업을 하면서 이렇게 외쳤다. “나는 장수(長壽)식품을 개발하는 인간”이라고.
회사를 경영하면서 율촌은 “우리는 나와 내 자식들이 먹는 음식을 만든다”며 “식품 사업의 기본은 위생 처리고 여기에 보태지는 게 맛이요, 보기 좋은 모양”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우리는 인간의 생명을 연장해주는 기능까지 갖춘 제품을 지향해야 한다”고.
그의 고민은 천연식품보다 안전한 가공식품을 만드는 거였다. 세간의 고정관념에 대한 도전이었다. 가공식품에 덧씌워진 편견들. 천연 원료를 변형하고 인위적으로 조작해 만들었기 때문에 원래의 순수성을 잃어버렸다는 무의식적인 거부감, 생소한 첨가물을 넣은 데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그리고 때때로 발생하는 식품사고, 이런 일이 터지면 늘 따라붙는 언론의 자극적인 보도….
스스로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어떤 첨가물도 넣지 않고, 변형도 가하지 않은 천연식품은 과연 인간의 건강에 안전한가”라고. “그 천연식품을 만든 대기와 토양은 과연 깨끗한가”라고. “천연식품이 지닌 고유의 독성은 어떻게 할 것이며 원천적으로 오염이 됐다면 어떻게 걸러낼 것인가”라고. 그는 오히려 과학을 믿었다.
나는 長壽 식품을 개발하는 사람지난 2007년 7월 농심은 처음 터를 잡은 서울 동작구 대방동 공장 부지로 안양에 있던 연구개발센터를 옮겼다. 연면적 8549평 규모의 20층짜리 건물에 연구소를 집어넣었다. 그 건물 이름이 도연관(道延館). 올바른 가치관을 갖고 기업을 해야 한다는 농심의 경영 철학을 담았다. 연구개발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했다. 안양공장에 있는 연구직 직원들에게 다 도연관으로 올라오라고 했다. 그리고 신제품 개발을 주축으로 식품 안전을 포함한 기술 연구까지 모두 망라하는 두뇌 조직을 바로 자신의 집무실 옆에 둔 것이다. 이름도 농심R&BD(Reaserch & Business Development)센터라고 했다.
당시 농심의 사업 규모를 감안하면 과잉투자임에 분명했다. 그는 직원들에게 “손익을 따지는 단순투자가 아니라 시대의 변화를 읽고 미래를 도모하자는 전략적 결단”이라고 강조하면서 “나는 여기서 농심의 100년을 설계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그가 “농심인 한 사람 한 사람은 개발하는 사람, 창조하는 사람이 돼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1983년 6월 직원 조회)고 독려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농심이 1965년 창업 이후 60주년을 맞는 지금까지 개발한 제품은 모두 1083개. 1년에 18개 이상의 신제품을 내놓은 셈이다. 두 달 걸러 세 개꼴. 농심 신제품 개발의 산증인이라고 할 수 있는 김재훈 전 농심연구소장은 “실제 트라이했다가 접은 건 이보다도 더 많다”고 말한다. 그는 1974년 롯데공업에 입사해 생산 파트에 근무하다 연구소로 발령 나 농심의 신제품 개발에 깊숙이 관여했던 인물이다.
“율촌은 늘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부대는 사람이 일낸다. 나부대는 사람 그냥 놔둬라. 조용히 있지 못하고 좌충우돌 설쳐대는 게 나부대는 거죠. 율촌은 부정적으로 이런 말을 쓴 게 아니었습니다. 되든 안 되든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직접 부닥쳐 실천하라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것도 해보고 저것도 해보고 그랬습니다. 그리고 제품이 만들어지면 회장실로 가서 ‘한번 시식해 보죠’ 하고 될 것 같으면 임원들 소집해 시식회 하는 거고 아닌 것 같으면 접었습니다.”
도연관 2층 연구소 PT실에 가면 들어가는 문 입구에 편액이 걸려있다. “나는 장수(長壽) 식품을 개발하는 인간이다.” 모든 신제품 개발에 늘 안전과 건강을 고려하라는 율촌의 메시지를 담았다. 이 편액이 걸린 방에서 2008년부터 율촌의 장남인 신동원 회장이 주재하는 회의가 있다. 그 이름이 ‘씨알 회의’, 말 그대로 새로운 창조물을 탄생시키는 씨앗을 키우는 회의다. 약 20명의 마케팅, 연구 담당 임원들이 모여 진행하는데 통상 오후 3시에 시작해 저녁 시간 직전까지 이어진다. 신동원 회장이 지금까지 이 회의를 주재한 횟수는 370여 회. 평균적으로 1년에 22회를 한 셈인데 휴가나 출장을 빼면 최소한 격주에 한 번은 열리는 회의다.
이병학 사장은 “선대 회장이나 현 회장이나 신제품에 대한 집념과 열정은 상상을 초월한다”면서 “다만 선대 회장은 주로 개인의 직관과 통찰에 의존했다면 현 회장은 집단 지성의 힘으로 풀어나가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설명한다. 자신만의 신제품을 쉴 새 없이 쏟아내며 달려온 농심. 20년 만에 1위 기업에 등극했고 그 후 40년 계속 1등 기업을 유지하는 비결이다.
(다음 회차에서 이어집니다.)
[손현덕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