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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보고회 생략… 투자점검회의 신설 ‘투자 리셋’ 그룹 방향 전환 모색하는 LG
입력 : 2025.07.11 10:4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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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G디스플레이 파주 사업장 LG그룹이 대대적인 투자 ‘리셋’에 착수했다. 매년 상반기 진행되던 전략보고회를 올해는 생략하고 대신 ㈜LG 주도로 주요 계열사의 중장기 투자 계획을 일일이 들여다보는 ‘투자점검회의’를 신설했다.
회의는 5월 중순부터 시작됐으며 LG전자·LG화학·LG디스플레이·LG이노텍·LG에너지솔루션 등 주요 계열사가 대상이다. 투자 점검 회의는 권봉석 ㈜LG 부회장이 직접 주관했다. 각 계열사별 투자 실행력과 수익성, 사업 지속 가능성에 대해 정밀 진단한 결과는 구광모 LG그룹 회장에게 직접 보고됐다.
이번 회의는 단순한 사업보고나 전략 검토가 아니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LG그룹 계열사가 추진 중인 각 사업의 생존 가능성과 향후 방향성을 모두 면밀히 들여다보는 구조적 검토 성격이라는 점이다. 기존 전략회의가 ‘방향’을 논의했다면 이번 점검은 ‘의사결정’을 위한 실행 기초 자료라는 점에서 무게감이 다르다는 게 재계 판단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단순한 LG그룹의 미래 먹거리 검토가 아니라, 실제 자본이 투입되고 있는 사업의 존속 가치를 다시 계산해보자는 취지로 보인다”라고 설명했다.
내부적으로는 이 같은 그룹 수뇌부의 움직임을 ‘포트폴리오 최종 정비’로 보고 있고 그룹 차원의 방향 전환이 본격화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이번 변화는 구광모 회장의 위기 인식에서 비롯됐다.
구광모 회장은 지난 3월 계열사 사장단 회의에서 “경영 환경의 변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다”며, “사업 구조가 현실을 따라가지 못한다면, 더 이상 기회를 잡을 수 없다”고 말했다.
구광모 LG 회장 특히 “지속 가능한 진입 장벽이 있는 분야에만 실행력을 집중하자”고 강조하면서, 그는’선택과 집중’ 원칙을 다시 꺼내들었다. 누적돼 온 사업 포트폴리오를 재정비할 필요성이 커졌다는 경종을 울린 것으로 해석된다.
이번 LG그룹의 투자 점검 회의는 단기 수익성 개선보다 중장기 전략 재편에 방점이 찍혀 있다.
LG그룹은 구광모 회장 체제 출범 이후 인공지능(AI)·바이오(Bio)·클린테크(Clean Tech), 이른바 ABC를 차세대 성장 축으로 삼고 2024~2028년 5년간 100조원 투자 계획을 수립한 상태다.
다만 본업의 현금 창출력이 약해질 경우 이 같은 대규모 투자 기조에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수요는 불확실한데 고정비는 지속되기 때문에, ‘선투자-후성과’ 구조는 기업에 큰 부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LG 주요 계열사들이 추진해온 기존 사업이 불확실성이 지속되는 상황이라는 점도 이번 투자 전략 재점검의 배경으로 작용하고 있다.
LG디스플레이 사례가 대표적이다. LG디스플레이는 2조 2000억 원 규모의 LCD 공장 매각으로 자금을 확보했지만, 여전히 24조원에 달하는 부채를 안고 있다.
회사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를 중심으로 고부가 포트폴리오 전환이 속도를 내고 있지만 시장 경쟁이 치열한 만큼 수익성 개선은 중장기 과제로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중국 디스플레이 업체들의 OLED 설비 투자가 급증하고 있는 점도 변수다. 중국 BOE는 스마트폰용 고부가 디스플레이(LTPO OLED) 시장에 본격 진입할 것으로 보이며 위협감을 높이고 있다. LG에너지솔루션도 투자 기조에 변화를 주고 있다. 미국 인플레이션감축법(IRA)에 맞춰 북미 현지 공장을 잇달아 세운 이 회사는 올해부터 내실 다지기에 초점을 옮기고 있다. 그러나 회사는 1분기 기준 미국 첨단제조생산세액공제(AMPC) 세제 혜택을 제외하면 830억원 적자를 기록한 상태다.
LG화학 역시 세계 2위 담수처리 사업부인 워터솔루션을 매각하는 등 비핵심 자산 정리에 착수했다. 회사는 여수 NCC 공장 등 저수익 화학 부문 구조조정도 병행 중이다. 미래 전장 사업 등 미래 먹거리 발굴에 적극 나서고 있는 LG전자와 LG이노텍도 새로운 사업 전략 수립이 필요한 시점이다. LG전자는 올해 설비투자 규모를 4조 3000억원으로 확대했지만 TV 부문 수익성 부진이 발목을 잡고 있다.
TCL과 하이센스 등 중국 브랜드의 보조금 공세에 밀리며 점유율이 하락하고 있고, 중저가 라인은 주문자 설계·생산 방식(ODM) 확대, 프리미엄 라인은 OLED 집중 전략으로 이원화가 진행 중이다. LG전자는 가전 분야에서 여전히 시장 리더십을 유지하고 있지만, 중국산 가전의 공세는 점차 부담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LG이노텍은 북미 핵심 고객사 매출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차량용 카메라·센서 등 전장 중심의 다각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전기차 시장 회복 지연으로 본격적인 성과를 내는 데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이번 투자 점검 회의는 구광모 회장이 취임 이후 꾸준히 추진해온 ‘LG식 체질 개선’ 전략의 연장선에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투자점검회의를 마무리한 뒤 ‘구광모 회장의 제2의 결단’이 나올 수 있다는 추측도 조심스레 나온다.
2018년 6월 회장 자리에 오른 뒤 구 회장은 ‘선택과 집중’ 원칙에 따라 수익성과 지속 가능성이 낮은 사업을 중심으로 경영 방향을 점진적으로 조정해 왔다.
그는 2019년 LG CNS 지분 매각을 시작으로 2020년에는 LG화학에서 배터리 사업을 분할해 LG에너지솔루션을 출범시켰고, 2021년에는 LG전자 스마트폰 사업에서 철수하는 결단을 내렸다.
액정표시장치(LCD), 태양광, 전기차 충전 사업 등도 모두 당시 시장성과 미래 성장성을 고려해 재편한 사례로 평가된다. 단기 실적보다는 장기 기업 경쟁력에 무게를 둔 전략적 판단이었다. 최근에는 배터리 사업을 그룹의 핵심 축으로 삼겠다는 구회장의 메시지도 공식화됐다.
구 회장은 올해 3월 정기 주주총회에서 “배터리를 그룹 대표 사업으로 반드시 성장시킬 것”이라고 밝히며, 글로벌 통상 불확실성과 미·중 기술 갈등 속에서도 배터리를 중심에 놓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이는 그간 AI·바이오·클린테크(ABC)를 중심으로 구성된 미래 전략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배터리를 ‘실질적 주력 산업’으로 재정의한 첫 공개 발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특정 산업을 구회장이 직접 주력으로 강조한 것은 이례적이라는 평가도 당시 다수 나왔다.
이처럼 ‘해야 할 사업’과 ‘조정이 필요한 사업’을 구분하는 기준이 더욱 명확해지면서 그룹 전반의 방향성도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재계에서는 이번 투자점검회의를 LG의 사업 포트폴리오를 다시 정비하는 계기이자, 향후 10년을 준비하는 전략적 분기점으로 보고 있다. 특히 올해 전략보고회를 생략하고, 대신 계열사별 투자 실행력을 일일이 점검하는 방식을 택한 것은 위기 의식보다는 신중함이 강조된 행보라는 해석도 나온다.
한 재계 관계자는 “과거 LG가 보여준 의사결정의 흐름을 돌아보면, 필요할 땐 한발 물러섰다가도 준비가 끝나면 다시 집중해 성과를 내는 방식이 반복돼 왔다”며 “구 회장은 치밀하고 단단한 방식으로 또 한 번의 방향 전환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박소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