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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현덕의 한국기업 탈각의 순간들] 셀트리온 | ③ CMO에서 바이오시밀러로
입력 : 2025.06.04 14:5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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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현덕의 <한국기업 탈각(脫殼)의 순간들>
성공한 기업들은 보면 결코 우연이란 건 없습니다. 운이 따랐다 한들 그 운을 기회로 만든 결정적 순간이 있습니다. 마치 뱀이나 매미가 껍질을 벗듯, 탈각(脫殼) 이전의 기업과 이후의 기업은 전혀 다릅니다. 담대한 변신으로 위대한 성공을 이끈 기업가의 여정을 기록합니다.서 회장이 이런 바이오시밀러 프로젝트를 공식화한 건 2008년 9월 9일. 웨스틴조선호텔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사업 구상을 공식 발표한다. 서 회장의 바이오 비즈니스는 CMO(Contract Manufacturing Organization)에서 시작했다. 말 그대로 원청기업과 계약을 맺고 생산만 맡는 이른바 위탁생산. 유명 제약사가 의뢰한 의약품을 대신 생산해 주는 비즈니스다. 제조업에서 주문자 상표 부착 생산인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er)과 같다고 보면 된다. 2002년 셀트리온이란 간판을 내걸고 바이오 사업에 뛰어든 후 이때까지 셀트리온은 CMO 기업으로 제법 이름을 날렸다. 직전 해인 2007년 매출액이 635억원으로 신생 바이오 기업으로서는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서 회장의 마음 한쪽에는 불만족이 자리해 있었고, 그 불만족은 새로운 도전을 잉태하는 씨앗이 됐다.
“CMO 사업은 고객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 그다지 좋은 모델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CMO업체가 가져가는 이익률은 그때그때 다른데 이는 비즈니스 리스크입니다. 계약을 따낸다 해도 FDA 허가 및 시생산에 1년 이상 소요되고 또 A제품을 생산하다 B제품으로 바꾸게 되면 바이오리액터를 세척, 소독, 건조하고 생산 시스템을 교체하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이걸 체인지오버(Change Over)라고 하는데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듭니다. 더욱이 소량생산할수록 손실은 커집니다. 특히 고객사가 신약 개발에 실패하면 한순간에 일감이 날아가는 일도 비일비재합니다. 공장을 지어놓고 적정 가동률을 확보하지 못하면 손실은 눈덩이처럼 커질 수 있는 비즈니스죠. 아무리 고객사를 모으고 수익성을 따져봐도 장기적으로 CMO 사업을 계속 이어 나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방향을 잡은 게 바이오시밀러. 이날은 셀트리온의 비전 선포식이었다. 그러면서 2011년부터 바이오 의약품 7종을 전 세계에 출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연간 매출액 1조원이 넘는 블록버스터급 바이오의약품의 특허가 만료되는 2013년부터 바이오시밀러로 오리지널 의약품이 독점하는 시장을 파고들겠다는 전략이었다. 경쟁사를 의식해 오리지널 제품명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지만 어떤 종류의 의약품인지 힌트는 던졌다. 그 정도면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유방암 치료제라면 로슈의 ‘허셉틴’이고, 직장암 치료제라면 이 역시 로슈의 ‘아바스틴’이 분명했다. 류마티스성 관절염 치료제라고 하면 존슨앤드존슨의 ‘레미케이드’였다. 바로 이 레미케이드의 시밀러 의약품이 셀트리온의 ‘램시마’다.
영안실에 마련한 생명공학연구소바이오시밀러의 뿌리를 더 캐고 들어가자면 셀트리온 생명공학연구소가 있다.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지만 당시만 해도 CMO 비즈니스에 연구소라는 조직은 필요 없었다. 생산만 잘하면 된다. 의뢰인으로부터 기술 이전을 받긴 해야 하는데, 통상 생산기술부라고 부르는 소규모 조직만 있으면 된다. 연구소는 본사의 제품을 직접 만들기 위해 필요한 조직으로 돈도 많이 들고 인력도 필요하다. 서 회장은 우선 비즈니스를 위한 공장 건립이 필요했다. 2002년 송도에 5만ℓ짜리 생산공장을 착공해 2005년 3월 완공되는데, 이 와중에 연구소 조직을 출범시킨다. 연구소는 인하대학교 의과대학 내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게 영안실이 있던 곳이었다. 지하 1층에 위치한 어둡고 음침한 20평 남짓 되는 장소였다. 거기서 그는 실제로 바이오시밀러 연습을 한다. 2006년 연구소 직원으로 입사해 지금은 셀트리온 연구개발부문장을 맡고 있는 권기성 씨의 설명이다.
인하대 의과대학에 마련된 셀트리온 생명공학연구소. 영안실이 있던 자리다. “제가 2006년 초 녹십자 선임연구원으로 있다가 셀트리온으로 입사했는데 그때 연구소는 송도 1공장이 지어져 거기로 이전된 상태였습니다. 근무 환경은 좋았습니다. 전에 다니던 녹십자라는 회사는 안정적이고 성장성 면에서도 떨어지지 않았지만 젊은 나이에 뭔가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습니다. 서정진이란 인물에 대한 호기심도 컸습니다. 그때 제 나이가 만 35세였는데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스타트업 회사에서 맘껏 일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는 사실 2004년부터 셀트리온의 문을 두드렸다. 그 때 경력직으로 합격은 했지만 집안 사정이 생겨 입사를 포기했다가 2006년 재도전을 하게 된 것이다.
“연구소에 들어오니 홍승서란 분이 소장을 맡고 부소장은 지금은 고문으로 있는 장신재 씨가 맡았습니다. 그 밑에 약 20여 명의 연구원이 있었는데 작은 조직은 아니었어요. 그때 은밀하게 떨어진 미션이 바로 바이오시밀러 프로젝트였습니다.”
서 회장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2006년일 겁니다. 연구소가 어느 정도 제자리를 잡아가면서 바이오시밀러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조심스러웠지요. 우리가 바이오시밀러 의약품을 만든다고 하면 그때까지 우리에게 생산을 의뢰한 고객사들이 거래처를 변경하고 떠날 수도 있으니. 그래서 준비는 극비리에 이뤄졌습니다. 그리고 웨스틴조선의 기자회견이 있던 2008년에야 주요 임원진들에게 바이오시밀러 구상을 알려줬습니다.”
연습한 제품은 얀센의 적혈구 생성인자(EPO;에포) 빈혈치료제인 프로크리트. 그는 “항체의 5분의 1 크기인 작은 단백질 의약품으로 테스트를 해봤더니 가능하다는 결론이 나왔다”며 “그럼 한번 해보자고 결심했다”고 말한다.
애초에 합성의약품은 족보에도 없었다. 바이오의약품을 목표로 했고 CMO도 바이오 부문에 국한됐다. 길은 두 갈래. 하나는 신약이고 다른 하나는 바이오시밀러. 서 회장의 선택은 시밀러였다. 그게 상대적으로 안전한 길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상대적’이었다. 누구도 안전하다고 생각지 않았다. 그것은 남들이 불가능하다고 시도조차 하지 않는 일이었고 누구나 다 아는 길이 아니라 처음 가는 길이었다. 발상의 대전환이었다.
(다음 회차에서 이어집니다.)
[손현덕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