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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훈의 유럽인문여행!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서] 프랑스 예술가의 안식처, 튀니지 시디 부 사이드
입력 : 2021.04.30 14:2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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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트막한 언덕을 따라 조성된 시디 부 사이드가 처음부터 마을 전체가 온통 하얀색과 파란색으로 칠해진 것은 아니다. 1920년쯤 프랑스 출신의 화가이자 음악가인 루돌프 데를랑게르가 정착하면서 자신의 집을 지중해 도시처럼 칠한 것이 시작이었다. 그가 처음 이곳을 찾았을 땐 작은 항구도시에 불과했고, 집들은 대부분 아랍식의 안달루시아풍이었다. 하지만 데를랑게르는 10여 년에 걸쳐 지중해의 파란빛과 재스민의 하얀 꽃을 바탕으로 집의 외부를 장식하였다. 그 후 마을 사람들은 안달루시아풍의 이미지를 버리고 푸른색과 하얀색으로만 마을 전체를 꾸미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시디 부 사이디가 ‘튀니지안 블루’를 갖게 된 배경이다. 그가 살던 집은 현재 튀니지 국립 아랍 음악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앙드레 지드
18세기 이후 오스만제국이 튀니지를 지배할 당시 오스만 출신의 총독과 부유한 귀족층들이 이곳에 하나둘씩 별장을 짓기 시작하면서 마을은 튀니지에서 가장 매혹적인 지중해의 도시로 성장하였다. 또한 1883년부터 1956년까지 튀니지는 프랑스에 식민지배를 받았는데, 이때 프랑스 출신의 앙드레 지드, 시몬 드 보부아르, 알베르 카뮈, 모파상, 생텍쥐페리 등 글을 쓰는 문학가들이 많이 찾아왔고, 제1차 세계대전 전후에는 문인들 이외에도 유럽의 많은 예술가가 찾아오면서 더욱 유명해졌다. 그 결과 이 작은 항구도시는 프랑스 파리의 ‘몽마르트르’라는 별칭이 생겼고,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아지트로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아마 세상을 떠돌며 자신만의 예술혼과 뮤즈를 찾으려 했던 보헤미안들에게 한 번쯤 일탈하고 싶을 때 거쳐 가는 그들만의 은밀한 안식처이자 유토피아 같은 해방구가 바로 시드 부 사이드였다.
마케 그림(1914)
‘나트(Natte)’는 프랑스어로 ‘돗자리나 짚을 땋다’라는 뜻인데, 카페 안으로 들어서면 대나무를 땋아 만든 돗자리와 카펫 등이 깔려 있고, 앙증맞은 찻상이 놓여 있다. 아주 동양적인 내부 분위기의 카페로 프랑스 출신의 많은 문학가가 찾아와 글을 쓰고, 새로운 작품을 구상했다. 그뿐만 아니라 1914년 현대 추상 회화의 거장인 파울 클레와 그의 친구인 아우구스트 마케가 이 카페를 찾았는데, 마케의 그림 중 <카페 데 나트(Le Cafe des Nattes, 1914)>라는 작품이 이 카페를 배경으로 그린 것이다.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나트 카페의 모습은 지금과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로 변한 게 없다. 사람이 많을 땐 카페 안에서 차를 마실 수 없어 20여 개의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서 차를 마시는데, 이 카페 데 나트의 분위기를 색다르게 즐기는 방법이다. 운 좋게도 카페 안에 앉으면, 앙드레 지드, 알베르 카뮈, 사르트르와 그의 연인 보부아르 등 유명인들의 방명록과 사진들도 볼 수 있다. 향기 그윽한 재스민차를 마시며, 100여 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날 수도 있다. 담배 연기 자욱한 실내에서 열띤 토론을 하는 카뮈의 모습도 보이고, 이 도시를 아름답게 꾸민 루돌프 데를랑게르가 아랍식 악기인 ‘쿠난’을 연주하고, 파울 클레와 마케가 강렬한 색채로 시디 부 사이드의 분위기를 재빠르게 그리고 있는 모습 등이 한 편의 영화처럼 스치고 지나간다.
카페 데 나트
이곳에서 매일 같이 산책을 하고, 카페 데 나트에서 차를 마시며 자신만의 문학세계를 찾으러 부단히 노력하였다. 그러다가 자신의 이름을 프랑스 문학계에 알리게 된 작품이 1909년에 발표한 <좁은 문>인데, 이 소설의 구상을 이 카페에서 시작하였다.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그는 어릴 적부터 숙명적인 사랑을 한 외사촌 누이, 마들렌과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근친상간 때문에 사랑을 이룰 수 없었지만, 마들렌 그의 여러 작품의 주인공이 되었다. <앙드레 왈테르의 수첩>을 비롯해 <전원교향악> <여성학교> 등 그의 작품 속의 여주인공들이 바로 마들렌느이다. 이처럼 여행자들은 예술가들이 자신만의 예술적 뮤즈를 찾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이곳에서 차를 마시며 잠시나마 그들의 예술적 영혼과 만나기 위해서 오늘도 시디 부 사이드를 찾는다. 평생 잊히지 않는 튀니지안 블루와 재스민의 하얀 꽃이 바람에 춤을 추며 우리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이태훈 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8호 (2021년 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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