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허연의 인문학산책] 체 게바라는 정글에서 괴테를 읽고 있었다

    입력 : 2021.04.30 14:18:34

  • 그는 이념을 떠나 20세기를 상징하는 하나의 캐릭터다

    난 그날의 묘한 감흥을 잊을 수 없다. 사진집에서 본 체 게바라는 예상했던 대로 열정적이면서도 순수한 눈빛의 주인공이었다. 사진집에 실린 사진 중 유독 한 컷이 내 눈길을 끌었다. 체는 누워서 책을 읽고 있었다. 선명한 사진도 아닌데 공교롭게도 책 표지가 보인다. 표지에는 ‘괴테(Goethe)’라고 선명하게 써 있다. 자멸파(?)를 좋아하는지라 일찍이 체를 좋아했지만 이 사진 한 장은 나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장투쟁일 것 같은 사람이 독서를, 그것도 괴테라니. 물론 괴테의 사상에서 꿈과 혁명을 찾아내는 것이 그다지 어색한 일은 아니다. 하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는 게릴라 시절 정글에서 평화로운 표정으로 괴테를 읽는 체의 포스는 돌올한 데가 있었다.

    체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또 하나의 장면이 있다. 1990년대 후반. 난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람블라스 가로를 걷고 있었다. 유럽 출장을 갔다가 시간이 남아 평소 가보고 싶었던 도시를 찾은 것이었다. 람블라스 가로는 유럽의 여느 광장이 그렇듯 각종 기념품가게가 즐비하게 늘어선 채 관광객들의 눈을 홀리고 있었다. 길 중간쯤 걸었을까. 다른 화려한 상점과는 달리 아주 초라한 좌판 하나가 내 눈길을 잡아끌었다. 흡사 한국의 새마을 모자 같은 낡은 모자를 눌러쓴 노년의 남자가 체 게바라 기념품을 팔고 있었다. 좌판은 너무나 초라했다. 체의 얼굴이 새겨진 배지 몇 개, 손수건 몇 장과 포스터, 귀퉁이가 닳아버린 낡은 책 몇 권이 전부였다. 내가 유심히 그것들을 들여다보자 중년의 사내가 내게 물었다.

    “Do you know Che?"

    당황한 내가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나를 끌어안았다. 난 태어나서 누군가와도 그렇게 과격하고 힘 있는 포옹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지구 반대편에서 온 청년을 그렇게 끌어안을 수 있었던 건 아마 연대감 때문이었으리라. 체는 그렇다. 이념을 떠나 하나의 공통언어다. 때로는 뜨겁고, 때로는 경건하고,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늪 같은….

    사진설명
    ▶이카루스의 모습으로 살았던 시대의 아이콘 체는 자기가 추종했던 꿈을 위해 날아오르려고 했던 이카루스였다. 이카루스가 태양의 뜨거움 때문에 밀랍으로 붙인 날개가 녹아내려 에게해에 떨어져 숨을 거두었듯 그의 죽음은 또 다른 하나의 신화로 우리에게 남아있다.

    “나이: 40세가량 / 인종: 백인 / 신장: 약 173㎝ / 머리카락: 밤색 곱슬머리, 짙은 눈썹 / 코: 곧음 / 입술: 얇음, 니코틴의 흔적이 남아있음 / 눈: 연한 푸른색 / 사망원인: 흉부총상과 출혈.”

    체 게바라의 해부보고서다.

    오래전 <체 게바라 평전>을 읽고 이런저런 삶의 권태가 모두 날아가 버리는 듯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체 게바라 평전>이 처음 나왔을 때만 해도 두꺼운 데다 내용이 다소 딱딱한 이 책이 베스트셀러에 오르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책이 나오고 예상은 빗나갔다. 순식간에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두 달 만에 7쇄를 찍었다. 이념논쟁도 치열함도 사라진 21세기 벽두에 왜 다시 체 게바라였을까. 체는 세상을 바꾸고 싶은 꿈을 품었던 많은 사람들은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조차 각인되어 있는 하나의 캐릭터였던 것이다. 체는 하나의 꿈이면서 20세기를 대표하는 캐릭터다. 평전이나 자서전이 잘 안 팔리는 한국 서점가에서 <체 게바라 평전>이 베스트셀러가 된 건 바로 체 게바라라는 캐릭터의 위력 때문이다. 책이 처음 나오고 출판사 측은 각 대학 구내서점에 책 홍보포스터를 붙였다고 한다. 그날 밤 재미있는 일이 벌어졌다. 밤사이 누군가가 포스터를 모두 떼어가 버린 것이다. 학생들이 집에 붙여 놓기 위해서 가져간 것이었다. 신세대 대학생들에게도 체는 연예인 캐릭터 이상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체의 사진은 작품으로도 걸작이다. 카스트로의 전속 사진사가 혁명기념일 행사 중 카스트로 뒷자리에 앉아 있는 게바라의 표정이 하도 멋있어서 무심코 셔터를 눌렀다는 사연이 있는 사진이다. 외모만 봐도 체에게서는 범하지 못할 내공과 에너지가 느껴진다. 그 에너지는 멋진 이름, 우수에 찬 사진 한 장에 고스란히 담겨 세상 속에서 부활하고 있다.

    ▶“우리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 체는 꿈의 화신이다. 아르헨티나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의사라는 안락한 길을 버리고 혁명의 길을 나선 꿈의 인간, 혁명이 성공하면 다시 다른 곳의 혁명을 위해 떠났던 비장함. 그리고 죽음.

    체는 혁명이 성공한 쿠바에서 국립은행 총재를 지내던 시절에도 사탕수수밭에서 노동을 했다. 이런 체를 보고 사르트르는 ‘우리 세기에서 가장 성숙한 인간’이라는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그 모든 것들이 모여 ‘체 게바라’라는 캐릭터가 탄생했고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고, 흉내 낼 수 없는 한 인간의 캐릭터에 열광했던 것이다.

    체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을 지켜보며 “우리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가지자”고 외치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죽어있는 모습이 끔찍하리만큼 예수와 닮아 있었다는 체는 대중들의 마음속에 영원한 캐릭터로 아직도 살아있다.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는 게릴라가 되기 전 체의 청년시절 편린들이 녹아 있다. 23살의 젊은 의대생 체는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아르헨티나를 떠나 칠레, 페루, 콜롬비아, 베네수엘라를 거쳐 다시 아르헨티나로 돌아오는 9개월간의 긴 여행을 떠나게 된다.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세상의 진실을 알고 싶다는 목적 하나만으로 고물 오토바이를 타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람처럼 자유롭게 떠난 여행 동안 그가 써 내려간 메모들이다. 우리가 <모터사이클 다이어리>에서 만나게 되는 청년 체는 때로는 유머러스하고 때로는 따뜻한 정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그가 써 내려간 다이어리에는 생생하고 때 묻지 않은 감동이 있다. 낭만적이면서도 거침없는 그의 기록은 한 자 한 자 우리의 마음을 흔든다. “아르헨티나 땅에 발을 디뎠던 그 순간, 이 글을 쓴 사람은 사라지고 없는 셈이다. 이 글을 구성하며 다듬는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다. ‘우리의 위대한 아메리카 대륙’을 방랑하는 동안 나는 생각보다 더 많이 변했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시를 필사했던 게릴라 정 많은 청년 체는 여행을 통해 혁명가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체는 시를 좋아했다. 체는 늘 노트에 시를 필사해서 읽곤 했는데, 1967년 볼리비아 밀림에서 체포되었을 때 평소 그가 메고 다니던 배낭 속에는 남아메리카 시인들의 시 69편이 필사된 녹색노트가 들어 있었다. 특히 체는 칠레의 시인 세사르 바예호의 시를 좋아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아한 시가 <같은 이야기>라는 작품이다. “나는 신이 /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 내가 살아 있고, 내가 나쁘다는 걸 / 모두들 압니다. 그렇지만 / 그 시작이나 끝은 모르지요. / 어쨌든, 나는 신이 /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나의 형이상학적 / 공기 속에는 빈 공간이 있습니다. / 아무도 이 공기를 마셔서는 안 됩니다. / 불꽃으로 말했던 / 침묵이 갇힌 곳./ 나는 신이 / 아픈 날 태어났습니다.”

    체 게바라는 신이 아픈 날 태어났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토록 세상의 아픔을 자기 어깨에 짊어지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허연 매일경제 문화스포츠부 선임기자·시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8호 (2021년 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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