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장원의 클래식 포레스트] 구스타프 말러와 ‘비극적 교향곡’ 예술과 인생의 필연과 아이러니

    입력 : 2021.04.30 10:42:12

  • 한 달 전쯤 영국 BBC뮤직매거진의 페이스북 계정에 아주 흥미로운 포스트가 하나 올라왔다. 제목은 ‘최고의 말러 교향곡은 무엇인가(Which is the Best Mahler Symphony)?’ 구스타프 말러가 남긴 교향곡 아홉 곡에 순위를 매긴 차트였으니, 말러 애호가라면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말러의 6번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는 서울시향
    말러의 6번 교향곡을 연주하고 있는 서울시향
    ▶낭만주의 교향곡의 궁극적 거장 잠시 구스타프 말러를 소개하자면, 1860년 7월 7일 오스트리아령 보헤미아에서 태어난 유대인 음악가이다. 독일 낭만주의 시대의 황혼기에 음악계에 투신하여 지휘자로서 최고의 자리까지 올라갔으나, 정작 그 자신은 작곡가로서 인정받기를 더 원했다. 교향곡과 예술가곡을 양대 축으로 하는 그의 작품들은 생전에는 널리 받아들여지지 못했으나, 사후 약 50년이 지난 1960년대에 이른바 ‘말러 르네상스’가 일어나면서 새삼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50여 년이 흐른 오늘날 말러는 베토벤, 브람스, 차이콥스키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인기 교향곡 작곡가이자, 베를리오즈, 리스트, 바그너 등이 꽃피웠던 낭만주의 음악의 거대한 흐름을 교향곡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융합해낸 거장으로 각광받고 있다. 그의 교향곡들은 길이도 길 뿐더러 내용적으로도 방대하고 복잡하며 난해하여 엄청난 피로감을 유발하기 일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을 듣고자 하는 관객들의 수요는 세계 각지에서 넘쳐난다.

    BBC뮤직매거진의 순위에는 수긍할 만한 부분과 논란이 될 만한 부분이 섞여 있다. 사실 말러의 교향곡에 순위를 매긴다는 건 대단히 무모한 짓이다. 개인적 선호도라면 모를까, 소위 ‘말러리안’을 자처하는 열혈 애호가들이 수두룩한 상황에서 세계적으로 명망 높은 전문지가 그런 일을 벌이다니! 자칫 과도한 빈축을 사거나 매체의 공신력에 의문이 제기될 수도 있는 일이다. 해당 포스트의 편집자도 이런 면을 충분히 의식한 듯, ‘모두 좋은 작품이지만 분명 우열은 있다’고 전제한 다음 선정작과 사유를 역순으로 열거했다. 참고로 그 1위부터 9위까지 교향곡의 번호를 차례로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제9번, 3번, 2번, 1번, 4번, 7번, 5번, 6번, 8번.

    필자의 입장을 말하자면, 3위까지는 순순히 받아들일 수 있다. 말러의 마지막 완성작인 제9번은 기법과 내용의 양면에서 최고의 걸작이라는 데 거의 이견이 없다. 연주시간이 무려 100분에 달하는 대작인 제3번은 ‘세상만물을 포용하는 교향곡’이라는 말러 특유의 교향곡관을 잘 보여준다. 일명 ‘부활 교향곡’으로 불리는 제2번은 피날레에 대규모 합창단이 동원되어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계승한 모습이며, 초심자부터 마니아까지 거의 모든 청중에게 가장 감동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문제는 그 이후인데, 솔직히 필자에게 순위를 매겨보라고 하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답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제6번이 꼴찌를 다투는 점은 마음에 걸린다. 마지막 악장에 유명한 ‘해머(나무망치) 타격’이 등장하는 이 교향곡은 ‘말러의 인생작품’이라 불러도 무방할 정도로 커다란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의 정점에서 절망을 노래하다 ‘교향곡 제6번’은 말러 교향곡 창작의 주요 특징인 거대한 스케일과 다채로운 관현악 기법의 한 극단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의 작품세계 전반에 깔려 있는 근원적 설정과 사유를 암시하고 있다. 말러는 이 곡에 ‘비극적 교향곡’이라는 부제를 달았는데, 그것은 아마도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낭만적 비극’에 대한 오마주일 것이다.

    베토벤과 바그너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말러는 자신의 교향곡에 내러티브적 맥락과 드라마적 구조를 부여했다. 그의 교향곡 속에는 다분히 그의 자아가 투영된 ‘영웅적 주인공’이 등장하는데, 이 영웅은 인생의 모순과 부조리에 맞서 이상을 쟁취하려는 투사이자 세상의 비밀을 탐구하고 진리를 추구하는 철인이다. 그리고 그가 서로 다른 상황 혹은 인생의 단계 속에서 수행해 나가는 분투와 깨달음의 여정이 바로 그의 교향곡의 내용이다. 그런 그의 교향곡들은 어느 것이나 한 편의 이야기처럼 펼쳐지며, 그 대다수는 열린 결말로 마무리되어 초기, 중기, 후기로 나뉘는 시기별로 연작을 이루고 있다. ‘제6번’은 중기의 두 번째 작품으로 전작인 ‘제5번’이 절망적 어둠을 딛고 희망의 빛을 향해 상승하는 데 비해, 찬란한 승리의 순간을 뒤로 하고 처절한 패배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정반대의 과정을 그리고 있다.

    구스타프 말러
    구스타프 말러
    다시 말해 이 작품은 인생의 비극적인 면을 조명하고 있으며, 꿈과 이상을 갈망하며 노력하는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실패와 좌절을 맞닥뜨리게 되는 삶의 여정을 가장 부정적인 파국으로 귀결시킨 드라마라고 할 수 있다. 그 파국을 상징하는 장면이 바로 앞서 언급한 ‘해머 타격’인데, 마지막 악장에서 영웅이 적들에게 맞서 궁극의 투쟁을 전개해나가는 과정에서 육중한 해머가 반복적으로 내리 꽂히고, 그로 인해 영웅은 결정적인 타격을 입고 결국 쓰러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말러는 이 비극적인 곡을 하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에 썼다. 이 곡이 작곡되던 1903년에서 1904년 사이, 그는 유럽 최고 오페라 극장의 수장으로 군림하고 있었고, 작곡가로서의 명성도 차츰 높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빈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회자되던 알마를 아내로 맞아들인 뒤 두 딸이 태어나며 단란한 가정을 영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3년 뒤인 1907년에는 말러의 신상에 비극적인 사건들이 잇따라 일어난다. 10년간 몸담아왔던 빈 궁정 오페라 극장의 감독직에서 물러나게 되었고, 애지중지했던 장녀 마리아가 돌연 병사했으며, 자신도 치명적인 심장질환을 진단받았던 것이다. 작품을 둘러싼 아이러니와 우연은 끊임없는 논란을 야기하고 나아가 모종의 아우라를 유발했다.

    일례로 말러의 아내였던 알마는 훗날 이런 말을 남겼다.

    “제6번은 그의 작품 가운데 가장 자전적이고 예언적인 곡이다. 자신의 생애를 음악적으로 예고한 것이다. 그 역시 세 차례 운명의 타격을 받았고, 그 세 번째 것이 그를 쓰러트렸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해석일 따름이지만, 한편으론 작품에 숙명적 신비감을 덧씌우는 데 기여한 것도 사실이다. 다만 문제의 ‘해머 타격’은 초연 때는 세 번이었지만, 그 후 말러가 마지막 타격을 삭제하여 두 번으로 변경되었다는 점은 지적해둘 필요가 있겠다.

    ▶말러 음악의 해독제 지난 4월 중순 서울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교향악축제’에서 이 곡을 오랜만에 들었다. 제임스 저드가 지휘한 대전시향의 연주는 흠결도 적지 않았지만 ‘말러의 대작’에 대한 그간의 갈증을 달래주기엔 충분했다. 장대하고 처절한 비극의 감상은 예상보다 큰 카타르시스를 유발했지만, 그 직후 장장 90분에 달하는 러닝타임과 말러 음악 고유의 파토스가 야기한 피로감이 밀려왔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무슨 조화 속인지 모차르트 음악만 연달아 듣게 되었다. 그러다 말러가 1911년 5월 18일에 임종하면서 모차르트의 이름을 두 번 불렀다는 일화가 떠올랐다. 그리고 이런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것은 자신의 음악이 야기하는 피로감을 모차르트 음악으로 풀라는 배려는 아니었을까?’

    [황장원(음악 칼럼니스트,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8호 (2021년 5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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