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민우의 명품 와인 이야기] 2001년산 최고의 보르도 와인, 샤토 오존

    입력 : 2021.03.11 14:02:31

  • 쌀이 부족하여 잡곡을 섞은 혼식과 밀가루로 만든 분식이 권장되던 어린 시절, 동남아시아의 따뜻한 나라들에서는 1년에 벼농사를 두 번이나 할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고 부러웠다. 쌀 생산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당시에는 농업의 부가가치 같은 개념들을 어린 나만큼이나 당시 어른들도 상상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골든퀸 3호와 같은 명품 쌀들을 마트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이제 고급 농산물을 재배하는 것은 농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와인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농부들은 좋은 와인을 만드는 데에 관심이 많지만 어떤 농부들은 낮은 품질의 와인을 많이 생산하는 데에 관심이 더 많다. 하지만 와인은 벼농사와 다르게 병당 1000만원짜리 와인이든 5000원짜리 와인이든 1년에 단 한 번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전 세계의 모든 와인 지역에 봄, 여름, 가을, 겨울의 4계절이 존재한다. 4계절 중에 단 하나도 농사에 중요하지 않은 계절이 없지만, 품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와인 농부들은 항상 가을이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수확 시기의 날씨가 와인의 품질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다는 이야기이다. 와인을 수입하고 유통하는 내 입장에선 가을만큼이나 봄의 날씨도 중요하다. 바로 이때 와인 가격에 영향을 주는 많은 일들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사토 오존의 포도밭. 사진 이민우.
    사토 오존의 포도밭. 사진 이민우.
    3월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와인 산지인 프랑스 보르도에 몹시 중요한 시기이다. 우선 전해에 수확한 포도로 양조한 와인을 처음 선보이는 트레이드쇼가 매년 3월 말에서 4월 초 사이에 열린다. 전 세계에서 온 바이어들이 오크통에서 막 숙성을 시작한 와인을 맛보고 나면, 와인 생산자들은 출시 가격을 정한다. 3월이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이 시기에 종종 우박이 내려 농작물에 큰 피해를 입히기 때문이다. 대서양을 방금 건너온 비구름은 보르도의 포도밭에 말 그대로 손가락 마디만한 얼음덩어리를 소나기처럼 쏟아낸다. 이를 보르도 지역 사람들은 지불레 드 막스(Giboulee de Mars)라고 부른다. 이때 내리는 우박들은 막 트기 시작한 싹을 잘라버리고 나무줄기에도 상처를 입힌다. 우박에 피해를 입은 포도밭은 생산 능력에 큰 타격을 받게 된다. 10개의 생산라인을 가지고 있는 공장에 화재가 나 3개 라인이 앞으로 1년간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을 상상하면 이해하기 쉽다.

    이런 경우 대부분의 농부들은 포도밭을 포기하고 다른 일에 전념한다. 운이 좋으면 환상적인 여름과 가을을 보내어 뛰어난 와인을 만들 수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별로 높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박이 내린 해의 와인은 낮은 가격에 출시 되는 편이다. 하지만 이런 해에도 포도나무를 자식처럼 생각하고 전념을 다하는 농부들이 있다. 그리고 기적같이 좋은 와인이 만들어지는데, 이런 해를 ‘농부들의 해’라고 부른다. 자연이 아닌 농부가 만든 와인이라는 뜻이다. 가장 대표적인 해는 바로 2001년으로, 봄에 내린 우박으로 큰 피해를 입었으나 어떤 농부들은 역사상 최고의 와인을 만들었다.

    필자와 샤토 오존의 후계자 폴린 보티에.
    필자와 샤토 오존의 후계자 폴린 보티에.
    2001년산 보르도 와인 중 내가 꼽는 최고의 와인은 바로 ‘샤토 오존’이다. 샤토 오존은 보르도 생테밀리옹 지역 와인 등급의 가장 높은 등급인 그랑 크뤼 1등급 A클래스에 속하는 와인으로, 단연 보르도 최고의 와인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샤토 오존의 포도밭은 로마인들에 의해 가장 먼저 조성된 포도밭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샤토 오존이 위치한 생테밀리옹 마을 언덕을 방문해 보면, 특별한 지식이 없더라도 로마 사람들이 왜 이곳에 처음 포도를 심었을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정도의 좋은 전망을 가지고 있다. 샤토 오존은 와인 자체도 훌륭하지만 농부들에게 큰 영향을 주고 있는 정신적인 지주이기도 하다.

    이웃 마을에 위치한 ‘샤토 라플뢰르’는 카베르네 프랑 묘목을 샤토 오존에서 가져왔다고 전해지며, 개러주 와인(Garage Wine)으로 시대를 풍미한 ‘샤토 발렁드로’ ‘샤토 그라시아’ 등의 와인들도 오존의 주인인 알랑 보티에의 영향을 받아 와인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알랑 보티에의 딸인 폴린은 나와 같은 지역 양조학교를 다녔는데, 그녀는 샤토들의 후계자들이 즐비한 학생들 사이에서도 가장 관심을 많이 받았다.

    사진설명
    보르도 와인 컬렉터들은 대체로 1980년대에 생산된 와인들을 좋아하지만, 샤토 오존만큼은 알랑 보티에가 전권을 쥐기 시작한 1995년산부터를 최고로 여긴다. 알랑 보티에는 포도 수확 시기를 조금 늦추어 포도가 더 여물기를 기다리고 추수를 함으로써, 좋은 와인이지만 심심해 보였던 샤토 오존을 젊고 매력적인 와인으로 바꾸어 놓았다. 확실히 이전에 만들어진 샤토 오존은 섬세하고 좋은 향을 내지만, 오늘날 애호가들이 좋아하는 역동적인 느낌은 들지 않는 편이다. 반면 알랑 보티에 시대의 샤토 오존은 훨씬 복잡하고 종종 메독 지역 와인에서 나는 동물적인 향도 느껴진다. 샤토 오존 2001년산은 젊은 알랑 보티에의 마지막 와인으로, 2002년부터 10년간은 유명 와인 컨설턴트인 미셸 롤랑이 양조에 같이 참여하였다. 여러 면에서 샤토 오존 2001년산은 꼭 소유하고 싶은 이정표와 같은 와인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민우 와인칼럼니스트]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26호 (2021년 3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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