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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영의 영화로 보는 유럽사] (15) 제국주의와 아프리카 침탈 | 영화 `하르툼 공방전`과 수단의 흑역사
입력 : 2021.03.05 14:5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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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과학기술이 비약적으로 발달하고 산업혁명이 본격적으로 진행되면서 자본주의는 급성장기에 들어선다. 유럽 각국은 유럽 시장만으로는 한계를 느낄 수밖에 없었다. 쌓여가는 상품을 팔아치우고 싼값에 원재료를 조달하며 자본을 투자할 곳을 찾아 나서야 했다. 여기에다 경제적인 민족주의가 고조되면서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경쟁에 불이 붙었다. 유럽 강국은 이러한 국내외 상황에 대한 해법을 ‘식민지’에서 찾으려 했고, 1870년대부터 1914년까지 약 40년 동안 침탈을 기본으로 하는 제국주의가 맹위를 떨쳤다. 이 같은 식민지 쟁탈전으로 아프리카와 아시아, 태평양에 흩어져 있는 섬들이 대거 유럽 각국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아프리카는 에티오피아를 제외한 모든 지역이 식민지를 경험한 대표적인 식민지 수탈지역이다. 영국과 프랑스를 양대 축으로 독일,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벨기에까지 힘깨나 쓰는 유럽 국가들이 대부분 아프리카에 식민지를 뒀다.
그렇다면 파쇼다 사건이 일어난 수단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당시 수단은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한 이집트의 속국, 다시 말해 식민지의 식민지 상태였다. 이집트는 1870년대 중반 이후 수에즈 운하 건설로 짊어진 부채를 감당하지 못해 사실상 영국의 반식민지로 전락했다. 그리고 수단에서는 ‘무함마드 아마드’가 스스로를 이슬람교도의 구세주인 ‘마흐디’로 칭하며 이슬람을 결집하는 독립 운동이 일어난다.
1881년 마흐디군은 신정정치를 하는 마흐디국을 수립하고 이후 대영제국과 몇 차례의 전투를 벌인다. 그중 유명한 두 개의 전투가 있는데, 하르툼 전투(1884~1885)와 옴두르만 전투(1898)가 그것이다. ‘하르툼 전투’는 영국의 찰스 고든 장군이 참수당하고 원주민들이 세운 마흐디국이 압승한 전투인 반면, ‘옴두르만 전투’는 마흐디국이 반나절 만에 허무하게 무너져 수단이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된 전투이다.
그러나 고든 장군이 하르툼에 도착했을 때 그 지역에 이집트인과 유럽인이 생각보다 많았고, 이미 주변 여러 지역이 포위당해 있었다. 현실적으로는 하르툼 지역을 버리고 그곳을 떠나는 것이 가장 적절한 방안이었지만, 고든 장군은 영국 정부의 명령을 어긴 채 지원군을 요청하며 도시에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그리고 2000명 이상의 민간인을 나일 강 하류로 대피시키지만 하르툼은 이내 마흐디군에게 포위당하고 만다. 마흐디는 수단 부족들의 지지를 얻어 외부연락을 차단하기 위해 하르툼과 카이로 사이의 전신선을 끊었고, 하르툼 요새 안에서는 굶주림과 병마가 창궐하여 많은 수단인이 죽어갔다. 고든이 고립되자 영국은 여론에 떠밀려 가넷 우즐리 경을 원정군으로 파견하지만 구원군이 도착하기 직전 고든 장군은 참수당하고 하르툼은 313일간의 포위전 끝에 함락된다.
그렇다면 감독의 생각처럼 고든 장군은 수단인의 구원자였을까, 아니면 또 다른 유형의 정복자에 불과했을까. 판단을 위해서는 그가 영국 정부의 명령을 어기면서까지 수단인의 독립 주도세력인 마흐디군과 대치하며 하르툼 공방전을 펼친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마흐디군은 당시 수단에서 일어난 이슬람 민족주의 저항운동의 핵심세력이었다. 고든은 구세주로 추앙받는 무함마드 아마드(마흐디)처럼 자신도 기독교인으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온정적 제국주의자 고든 장군과 수단 독립을 내걸고 맞서는 마흐디군, 마흐디의 저주를 받으면서까지 고든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던 하르툼 족장들, 그리고 생존을 위해 양쪽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일반 수단 국민들. 식민지마다 예외 없이 비슷하게 전개되는 역사 속 실존 인물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누구의 시각에서 보느냐에 따라 고든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다만 고든의 경우 수단인을 지배의 도구로만 보지 않고 상대적으로 따뜻하게 대한 정복자라는 점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르툼 전투에서 참패했던 영국이 옴두르만 전투에서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 요인이 있겠지만 맥심기관총이라는 무기의 역할이 컸다. 하이람 맥심이 개발한 이 총은 방아쇠만 당기면 총알이 드르륵 나가는 완전 자동화된 방식으로 이전의 원샷 원킬의 기관총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한 사람 한 사람 조준할 필요도 없고 그 사람이 쓰러지는 모습을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단지 조준하고 방아쇠만 당기면 됐다.
윈스턴 처칠은 젊은 시절 참전했던 이 전투에 대해 저서인 <강의 전쟁: 수단 정복>에서 “불과 다섯 시간 만에 야만인을 싹 쓸어버린 현대문명의 가장 위대한 승리”라고 강조했다. 참으로 어이없는 표현이지만 말 그대로 학살에 가까운 전투였다. 옴두르만 전투에서 신앙의 힘으로 침략자를 물리치려던 수단군은 추풍낙엽처럼 죽어나갔고 최대 공신은 맥심기관총이었다. 이후 영국은 이집트와 공동주권으로 수단의 신민 통치에 들어갔다. 이러한 식민지배는 수단이 독립한 1956년까지 이어진다.
자국의 이해를 관철하기 위한 식민통치 방식 탓에 수단은 1956년 독립 후에도 1955~1972년과 1983~2005년, 두 차례에 걸쳐 피비린내 나는 내전을 겪어야 했다. 북부와 남부는 종교와 인종이 판이해 섞일 수 없는 구조를 가졌기 때문이다. 결국 2011년 남수단은 수단에서 분리 독립국가가 됐지만 영화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가 헌신적인 봉사 활동을 펼쳤던 데서 보여준 것처럼 아직도 빈곤과 기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같은 비극의 씨앗은 1899년 옴두르만 전투로 수단이 쑥대밭이 되고 영국과 이집트 양국의 공동통치령이 되는 데서 시작됐다. 수십 년 동안 영국의 통치를 빠르게 받아들인 북수단지역과 저항이 컸던 남부 사이에는 개발 격차가 크게 확대됐다. 특히 사막지대인 북부 지역에는 이슬람교를 믿고 아랍어를 사용하는 아랍계가 많이 거주하였고, 초원과 밀림지대인 남수단에는 영어를 사용하고 기독교와 토속신앙을 믿는 아프리카 본토 흑인이 많이 거주하였다. 그러나 통치자에게 남북 주민 간 차이는 아무런 변수가 되지 못했다.
오늘날 수단과 남수단의 갈등과 분쟁은 제국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만큼 그 원인은 영국이 제공했지만 해결의 몫은 오롯이 수단인에게 남아있다. 역사는 그 책임을 어떻게 물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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