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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마음산책] 우리 안의 등불 같은 선생님
입력 : 2019.12.31 15:4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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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초등학교를 함께 다닌 고향친구 아들의 결혼식이 있었다. 이 아들의 결혼식 주례를 우리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담임선생님이셨던 옛 은사께서 하셨다. 돌아보면 꼭 53년 전에 처음 사제 간의 인연을 맺은 스승님이시다. 그런 스승님께서 50여 년 전 초등학교 교실에서 만난 제자의 아들 결혼식 주례를 봐주신 것이었다. 우리는 이날 친구 아들 결혼식에 모두 모이기로 했다.
대관령 아래 한 마을에서 자란 우리 시골 친구들은 이 선생님을 그때도 지금도 언제나 ‘희망등 선생님’ 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선생님을 처음 만난 건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대관령 아래 산간 마을에 그때 나이로 스물다섯 살쯤 된 젊은 선생님이 전근을 오셨다. 선생님은 그 무렵 막 결혼을 하셨던 것 같다. 다른 선생님들은 강릉에서 시오리쯤 되는 학교까지 자전거로 통근했지만, 선생님은 우리가 6학년이 되자 학교 옆에 방 한 칸을 얻어 사모님과 시골로 들어오셨다. 그때는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를 가는 것도 시험을 봐서 들어가던 때였다. 선생님은 강릉 시내 학교 아이들보다 상대적으로 불리한 여건에서 공부를 하는 우리들을 위해 일부러 산골 마을로 들어와 신혼살림을 차리신 것이었다. 그때 우리는 너무 어려 그 뜻을 잘 몰랐다.
학교 옆으로 이사를 오신 다음 선생님은 저녁마다 교실에 남포를 밝히고 우리의 처진 공부를 채워 주셨다. 그때 선생님 책상에 놓인 남포의 상표가 바로 ‘희망등’이었다. 우리는 책상 앞에 등잔불을 놓고 공부를 했다.
교실에서 선생님 책상 위의 남포가 불이 제일 밝았다. 우리는 선생님을 ‘희망등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우리 친구들은 그때 선생님의 책상 위에 놓였던 ‘희망등’ 상표의 남포를 잊을 수가 없다. 우리는 집에서 남포나 등잔을 사용하면서도 그게 램프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도 모르고 살던 시골 아이들이었다.
나하고 선생님의 인연은 더 각별했다. 초등학교 6학년 1학기 때의 일이다. 교내 백일장에서는 물론 군 대회 같이 큰 백일장에 나가서도 매번 떨어지는 나에게 선생님은 이런 말씀을 했다. 그때 군 대회에 나가 아무 상도 받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온 다음이어서 어린 마음에도 나는 참으로 큰 낙담을 했었다. 그런 나를 선생님이 학교 운동장 가에 있는 커다란 나무 아래로 불렀다.
“너희 집에도 꽃나무가 많지?”
“예.”
“같은 꽃 중에서도 다른 나무나 다른 가지보다 더 일찍 피는 꽃이 사람의 눈길을 끌지. 그렇지만 이제까지 선생님이 보니까 그 나무 중에서 일찍 피는 꽃들은 나중에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 나는 네가 어른들 눈에 보기 좋게 일찍 피는 꽃이 아니라 이다음 큰 열매를 맺기 위해 조금 천천히 피는 꽃이라고 생각한다. 선생님이 보기에 너는 클수록 단단해지는 사람이거든.”
어린 영혼에 대한 격려는 바로 이런 것인지 모른다. 나에게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저마다 달랐지만 우리 친구들 모두 ‘희망등 선생님’에게 그런 사연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다. 너는 손재주가 참 대단하구나. 또 너는 이런 것을 잘하는구나. 그리고 너는 또 저런 것을 참 잘하는구나. 또 집안이 가난해 중학교를 가지 못하는 아이에겐, 지금은 집안이 가난해 중학교를 가지 못해도 너는 부지런하니까 이 부지런함만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어른이 되어서도 큰 부자로 살 거다, 하고 선생님은 우리들 하나하나에게 그런 칭찬으로 용기를 주셨다.
선생님은 우리가 앞으로 어른이 되어 살아가는 동안 어디 가서도 기죽지 않고 자신의 뜻을 펼칠 자신감을 어린 가슴마다 심어주셨다. 나는 스물한 살 때부터 본격적인 작가수업을 했다. 10년 가까이 신춘문예에 연속 낙방을 하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도 어린 시절에 들은 선생님의 격려 한마디가 참으로 큰 힘이 되었다.
그런 선생님께서 제자의 아들 주례를 봐주시던 날, 나는 그 자리에 조금 늦게 갔다. 결혼식장은 강릉 경포대에 있는 커다란 호텔 식장이었고, 나는 그 시간보다 조금 앞서 대관령 마을에서 미리 선약으로 정해놓은 북 콘서트가 있었다. 문단의 다른 작가들과 함께 참여하는 콘서트였다. 콘서트를 마치고 가면 아무리 빨리 가도 30분쯤 시간이 늦었다.
내가 식장에 도착했을 때 선생님께서 막 주례사를 하고 계셨다. 선생님은 옛 제자와의 인연을 얘기하고, 그 제자가 예전부터 얼마나 성실하고 부지런한 사람이었던가를 얘기하고, 그 앞에 선 부부에게도 인생의 성실함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친구의 아들도 다른 사람의 주례사가 아닌 아버지의 나이 드신 은사님의 주례사라 한 마디 한 마디 더 깊이 새겼을 것이다.
우리가 학교를 졸업할 때에는 졸업생이 50명쯤 되었는데, 그날 모인 친구들이 20명쯤 되었다. 이제는 제자들도 선생님과 함께 늙어가는 나이들이었다. 15년쯤 전 선생님께서 정년퇴임을 하실 때에도 우리는 그렇게 한 자리에 모였다.
친구 아들의 결혼식 날 선생님은 제자들과 오래 시간을 같이 하지 못하셨다. 전날 김장을 하느라 무리하신 사모님이 편찮으셔서 주례만 마치고 바로 돌아가셨다. 제자들은 선생님과 식사도 같이 하지 못했다. 더구나 늦게 도착한 나로서는 헤어질 때 선생님의 손만 겨우 잡아보고 말았다. 선생님의 손을 잡고 이렇게 당부의 말씀을 올렸다.
“선생님. 어릴 때 저희들이 바르게 제대로 자라는지 노심초사하시면서 지켜봐주신 것처럼 이제 나이가 들어 저마다 조금씩 늙어가는 저희들이 세상에 누가 되지 않고 바르고 멋지게 늙어가는 모습도 계속 지켜봐주셔야 합니다. 선생님께서 오래 지켜봐주시면 저희들은 어릴 때처럼 바르게 나이가 들 것입니다.”
선생님은 우리가 어른이 된 다음에도 우리 친구들을 하나하나 칭찬하며 훌륭한 제자들을 두고 있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좋으냐고 늘 말씀하시지만 정말 이렇게 존경하는 선생님을 마음속에 두고 가까이 모시는 일이야말로 얼마나 은혜로운 일이지 모른다.
그러니 우리의 영원한 희망등이신 강릉의 권영각 선생님, 늘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저희도 선생님처럼 바르고 멋지게 나이 들어가겠습니다.
[소설가 이순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2호 (2020년 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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