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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마음산책] 빚더미에선 찾을 수 없는 청운의 푸른빛
입력 : 2019.11.07 11:1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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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어디 계시는지도 모르는 용주 형께 씁니다. 내가 용주 형을 처음 만난 것은 지금으로부터 42년 전 대학에 막 입학해서였습니다. 조금 더 설명하자면 그때 나는 어느 지방 국립대 경영학과의 신입 입학생이었고, 용주 형은 같은 1학년이어도 군대에 다녀온 예비역 입학생으로 법학과 학생이었습니다.
학과가 다르니까 당연히 공부하는 과목도 강의실도 달랐지만, 그때는 1970년대의 유신시대였고,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신입 입학생이든 군대를 다녀온 예비역 복학생이든 일주일에 4시간씩 교련 수업을 받아야 했습니다. 현역 대위와 예비역 대위가 우리 군사훈련 시간의 교관이었습니다. 그렇게 경영대학생과 법과대학생과 행정과대학생이 같이 수업을 받는 군사교육 훈련장에서 처음 용주 형을 보았습니다. 1학기 때는 학과가 달라 눈에 잘 띄지 않아 형의 존재를 몰랐지만, 2학기가 되었을 때 법학과에 다니는 친구가 방학 동안 다음 학기 등록금을 스스로 벌어서 학교에 다니는 용주 형에 대해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그것은 지금 다시 떠올려도 좀 숙연한 이야기였습니다. 여름방학이든 겨울방학이든 길어야 50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 기간 동안 다음 학기 등록금 마련을 위해 용주 형이 노동판에서도 일당이 가장 높은 험하고 위험한 일을 찾아다닌다고 했습니다. 여름엔 시멘트 콘크리트로 집을 짓는 건축현장에서 어깨에 고름이 흐르도록 질통을 메고 다리를 후들거리며 공중 철판을 오르내리고, 겨울이면 이 산 저 산 능선으로 고압선 철탑을 세우는 작업현장을 찾아다닌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야 짧은 방학 동안 당시 사립대학 등록금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 국립대학 등록금과 최소한의 기본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나자 키가 나와 비슷한 용주 형이 거인처럼 우러러보였습니다. 그때부터 마음으로 따르며 꽤 가깝게 지냈고, 졸업 후엔 서로 다른 길로 가 소식이 끊기게 되었지만 그 시절 고학생의 모습이란 그런 것이며 청운의 꿈 역시 그런 것이었지요.
이 학생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로 나오며 시작부터 신용불량자가 되고 빚쟁이가 되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워지는 것이지요. 대학생들이 이렇게 돈을 빌리는 이유가 무얼까요. 물으나마나 풍족하지 못한 가정의 풍족하지 못한 여건 속에서 학교를 다니는 동안 우선은 공부를 해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학비 때문에 빚을 지게 되는 거지요. 부모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라면 학생 스스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비싼 등록금과 비싼 생활비를 우선은 대출로 마련하기 때문이겠지요.
이렇게 힘들게 빚을 안고 대학을 졸업한다고 해서 다음 단계로 일자리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앞에서 우리 아비세대의 고학생 용주 형 얘기를 한 것은 우리 세대는 스스로 이렇게 마련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아비세대는 한여름 건축현장이든 한겨울에 바람 쌩쌩 부는 능선에 올라 철탑작업을 하든 짧은 방학동안 자기 힘으로 등록금을 마련할 여건이라도 되었지만, 지금 학생들에게 등록금은 방학동안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하든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 제법 괜찮아 보이는 직장에 다니는 부모들조차 자녀가 하나가 아니라 둘일 경우, 더구나 두 자녀가 함께 대학을 다닐 경우 자녀의 학비 마련이 쉽지 않아 어쩔 수 없이 학자금 대출을 받는 게 현실이 아닌지요. 더구나 부모에게 학자금을 전적으로 기댈 수 없는 학생들의 경우는 더 그렇겠지요. 이렇게 학비를 대출받지 않으면 안 될 불우한 환경의 학생들이 절반 가까이는 너무 높아져버린 등록금 때문에 무슨 일을 하더라도 그것을 스스로 해결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지요.
우리 아비세대는 어쩌다 이런 여건을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준 것일까요. 집에 학생이 있든 없든 이런 현실이 정말 너무 답답하지 않은지요. 청운의 꿈을 안고 대학에 들어가 공부를 하는 게 아니라, 시작부터 청운의 푸른 빚을 떠안고, 끝내는 그 빚에 눌려 신용불량의 실업자로 대학문을 나설 수밖에 없는 저 아이들을 우리 어른들은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내년 봄에 치를 선거에 대해 미리 성급하게 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선거 때만 되면 반짝 나오는 반값 등록금 문제, 이거야말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정말 나라가 나서야 할 문제 아니겠는지요?
지금은 어디에 계신지 모르는 용주 형, 나는 그때 용주 형이 얼마나 힘든 날품팔이 노동으로 학자금을 마련했는지 잘 압니다. 용주 형의 피고름이 맺혔다가 딱지가 앉은 어깨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용주 형이 아무리 힘든 노동 품을 팔았어도 방학동안 그렇게 판 노동 품으로 다음 학기 학비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는 지금보다 학비가 턱없이 낮았던 것일까요? 아니면 피고름 맺히는 노동이었지만 방학 동안 한시적이긴 했어도 노동 품값이 비쌌던 것일까요?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면 그게 참 안타깝습니다. 노량진 학원가에서 보면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청춘들이 안타깝고, 대학교 부근에 가면 그 부근의 아이들이 안타깝고, 무거운 가방을 메고 전철 손잡이를 잡고 가는 아이들을 보면 그 아이들의 무거운 가방과 등판이 우리를 안타깝게 합니다.
저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 그것이 안타까워 이렇게 글을 쓰긴 하지만, 그것을 해결할 방법에 대해서는 어떤 묘안도 떠오르지 않습니다. 왠지 저 아이들의 무거움이야말로 우리 어른들의 책임인 것 같아 한없이 미안하게 느껴질 뿐입니다.
좀 좋은 세상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소설가 이순원]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10호 (2019년 11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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