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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진훈 칼럼] 속 좁은 日 vs 전략 없는 韓
입력 : 2019.07.26 10:4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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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 대통령은 2008년 3월 취임 후 첫 인터뷰를 매일경제, 영국 파이낸셜타임즈, 일본경제신문(닛케이), 중국경제일보 등 주요 4개국 경제신문들과 했다. ‘경제대통령’ 이미지를 강조하려는 의중이 강했다.
당시 청와대를 출입했던 필자는 질문지 취합이나 특파원들과 일정 참석자 등을 조율하는 간사역할을 했다. 원래 매경 편집국장만 동석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닛케이 편집국장도 날아오겠다고 했다. 청와대 집무실 2층에 있는 원탁형 테이블에 앉자마자 닛케이 편집국장이 인사 겸 영어로 짧게 질문을 던졌다. 통역관도 제대로 듣지 못했는데 나중에 이동관 전 청와대 대변인이 기자실에 들러 풀(Pool)해줬다. 닛케이 국장이 “일본 국왕이 한 번쯤 방한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물었고, 이 전 대통령이 즉각 “오시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화답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국내 언론들은 이 내용을 보도하지 않았다. “원래 정치·사회는 빼고 경제이슈만 질문하기로 약속된 인터뷰였다”며 청와대가 보도자제(엠바고)를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닛케이는 ‘이 대통령, 천황 방한초청 의향’이라는 제목을 1면 톱으로 뽑았다. 그만큼 폭발적인 이슈였다는 얘기다. 직후 4월 도쿄 한·일정상회담 후 기자회견에서도 MB는 굳이 천황(天皇)이라는 존칭까지 써가며 “한국을 방문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공식적으로 밝혔다.
이후 한·일병합 100년째인 2010년에 맞춰 방한을 추진하자는 얘기까지 나왔으나 끝내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강제징용이나 성노예로 끌려가 고초를 겪은 당사자나 유족들이 격렬 반대시위를 하는 불상사가 염려됐기 때문이었다. 당시 후쿠다 야스오 일본총리도 일왕이 한국서 봉변을 당했다간 정권을 내놔야 할 만큼 위험부담이 크다고 판단했다는 후문이다. 이후 간 나오토, 노다 요시히코 총리로 이어지는 민주당 정권이 과거사 사죄나 배상에 조금만 성의를 보였더라도 오늘과 같은 한·일 참사는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지금의 문재인 대통령과 아베 총리는 솔직히 상극에 가까울 정도로 케미가 안 맞는다. 미래보다 과거청산을 앞세우는 좌파 문 정부는 역대 정권가운데 가장 깐깐하게 대일외교를 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정한론(征韓論)자 요시다 쇼인을 우상으로 삼는 아베 총리는 우리 대법원의 강제징용자 배상판결을 오히려 역공의 기회로 삼고 있다. 얼마 전 우리 정부 고위관계자가 한·일 양국의 미래를 얘기하며 요시다 쇼인을 언급했는데 그야말로 뜬금포다. “조선을 속국화하고 만주 대만 필리핀을 노획한다. 구미 열강과의 교역에서 잃은 국부를 약소국에서 착취해 메워야 한다.” 19세기 중반 이런 주장을 서슴없이 한 극우파가 바로 요시다 쇼인이다. 이보다 무역보복같은 옹졸한 대응이 아키히토 전 일왕의 뜻과 맞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꼬집었더라면 아베 총리도 뜨끔했을지 모른다.
‘베트남판 이순신’으로 불리는 보 구엔 지압장군은 미국 프랑스 중국 3대국(大國)과의 전쟁을 모두 이긴 비결을 이렇게 말했다. “적이 원하는 시간, 장소, 방법으로 싸워주지 않는다.” 영화 타짜에서 주인공 고니(조승우)가 몇 배나 수가 높은 아귀(김윤석)를 이긴 비법도 딱 하나다. 이기는 패를 쥐었을 때 올인하는 것이다. 문재인 정부에 묻고 싶다. 미중 무역전쟁에다 자영업 줄폐업으로 경제가 만신창이 된 지금, 그것도 우군조차 없는 대일 전면전을 이길 패가 과연 있는가. 일본은 속이 좁지만 한국은 전략이 없다.
[설진훈 매경LUXMEN 편집장]
[본 기사는 매경LUXMEN 제107호 (2019년 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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