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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원의 마음산책] 옛 은사님과 함께한 식사
입력 : 2018.05.30 16:5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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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고향에 내려가 그곳에 계신 초등학교 시절 은사님과 저녁식사를 했다. 마음은 매년 그렇게 하자, 하면서도 이번에 한 저녁 식사도 몇 년 만에 찾아뵌 자리였다. 사람들은 지금 내 직업이 소설가니까 어린 시절에도 매우 반짝이며 글을 잘 썼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겸손의 말이 아니라, 나는 대학에 입학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백일장 같은 곳에 나가 상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초등학교 시절엔 초등학교 시절대로 그랬고, 중고등학교 시절엔 또 그 시절대로 그랬다. 상은 고사하고 나는 언제나 교실에서 그런 대표를 뽑는 1차 선발에서조차 멀찍이 떨어져 있던 평범한 소년이었다.
“너희 집에도 나무가 많지? 그러면 어디 매화나무를 한 번 살펴보자. 같은 매화나무도 먼저 피는 꽃이 있고, 나중에 피는 꽃이 있지. 그러면 그중에 어떤 꽃에서 열매가 맺을까?”
나는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같은 나무의 꽃도 다른 가지의 꽃보다 더 일찍 피는 꽃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그렇지만 이제까지 선생님이 보니까 어떤 나무의 꽃도 제일 먼저 핀 꽃들은 반갑고 보기는 좋은데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 제대로 된 열매를 맺는 꽃들은 늘 더 많은 준비를 하고 피는 거란다. 이번 대회에 나가서 아무 상도 받지 못하고 오니까 속이 상하지?”
차마 그렇다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선생님 얼굴도 바라볼 수 없어 어린 제자는 그저 가만히 땅만 내려다보았다.
“선생님은 네가 어른들 눈에 보기 좋게 일찍 피고 마는 꽃이 아니라, 이다음에 큰 열매를 맺기 위해 천천히 피는 꽃이라고 생각한다. 너는 지금보다 어른이 되었을 때 더 재주를 크게 보일 거야.”
그때는 그 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몰랐다. 그러나 뭔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선생님은 어린 제자에게 꽃 이야기로 용기를 주신 것이다.
“선생님은 이다음에 네가 꼭 큰 작가가 되어 선생님도 네가 쓴 책을 읽게 될 거라고 믿는다. 너는 지금 어른들 눈에 보기 좋게 일찍 피었다가 열매도 맺지 못하고 떨어지는 꽃이 아니라 남보다 조금 늦게, 그렇지만 아주 큰 열매를 맺을 꽃이라고 믿는다.”
나에게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저마다 방법이 달랐지만 우리 친구들 모두 그 선생님에게 그런 사연 하나씩 가지고 있다. 너는 손재주가 참 대단하구나. 또 너는 이런 것을 잘하는구나. 그리고 너는 또 저런 것을 참 잘하는구나. 또 집안이 가난해 중학교를 가지 못하는 아이에겐, 지금은 집안이 가난해 중학교를 가지 못해도 너는 부지런하니까 이 부지런함만 잃어버리지 않는다면 어른이 되어서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부자로 살 거다, 하고 선생님은 우리들 하나하나에게 칭찬으로 용기를 주셨다.
나는 스물한 살 대학 2학년 때부터 본격적으로 작가수업을 했다. 그러면서 신춘문예에만도 10번 가까이 떨어졌다. 군에 가 있는 동안에도 신춘문예 응모만은 빠지지 않고 했다. 처음 몇 해 동안은 아직 내 공부가 모자라니까 하는 생각으로 버틸 수 있었지만 떨어지는 햇수가 계속 되다 보니 중간중간 이것이 정말 내가 가야 할 길인가 하는 회의가 들 때도 많았다.
그때 다시 힘을 내라는 좋은 얘기들과 좋은 격려도 많았지만, 이런저런 회의로 불안해져 있는 나를 다시 책상에 불러 앉혀 보다 치열한 습작 생활을 하게 했던 것은 너는 제대로 열매를 맺을 큰 꽃이 될 거라는 어린 시절 은사님으로부터 들은 격려 한마디였다. 내가 이제 그만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을 때마다 그 칭찬이 또 한 번의 희망과 오기를 가지게 했다. 다섯 번 여섯 번 떨어지면서는 내 나이가 이미 그때 그 말씀을 해준 선생님의 나이보다 더 많아졌는데도 여전히 어린 시절의 소년처럼 그때 선생님의 말씀이 내가 가야 할 먼 길의 길을 밝혀주던 것이었다.
우리의 인생을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길로 표현할 때, 그런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는 불빛은 대략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가로등과 같은 불빛이다. 그 불빛은 당장 내 발밑을 환하게 밝혀주어 내가 선 위치를 확인하게 해주고 또 현재의 자리를 안전하게 해준다. 그러나 가로등은 아무리 환해도 내가 가야 할 먼 길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당장의 안온함과 안전함과 따뜻함을 주는 불빛이다.
그런 가로등에 비해 수십 리 밖에서 반짝이는 등대불이나 저 멀리 고갯마루에서 깜빡이는 불빛은 그 불빛에 의지해 당장 무엇을 할 수 있는 게 없다. 그러나 먼 곳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그 불빛들은 우리 인생이 가야 할 먼 길의 방향을 가리키고, 그 길에 대한 믿음을 심어준다.
멀리 떨어져 살아 자주 찾아뵙지는 못해도 우리들 마음 안에 선생님은 언제나 환하게 우리 마음 안에 희망등을 밝히고 계신 것이다. 내년에는 나 혼자가 아니라 그 시절 친구들과 함께 좀 더 따뜻한 자리를 마련해야겠다.
[소설가 이순원]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93호 (2018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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