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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어떤 생각] 이야기 셋
입력 : 2016.12.02 18: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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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빌로니아에서 당신은 나로 하여금 수많은 계단들과 문들과 벽들로 된 미로 속에서 길을 잃도록 만들었소. 이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당신에게 계단도 문도 복도도 벽들도 없는 나의 미로를 보여줄 기회를 부여하였소.”
그런 다음 그는 바빌로니아 왕의 포승을 풀어주고 사막 한가운데 남겨두었다. 바빌로니아 왕은 그곳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굶주림과 갈증으로 죽었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짧은 단편 <두 왕과 두 개의 미로>의 내용이다. 메시지는 분명하다. 만들어진 미로보다 만들어지지 않은, 본래 있는, 자연의 미로가 더 복잡하고 교묘하다. 사람이 만든 어떤 가상의 세계보다 현실의 세계가 더 기묘하고 이해할 수 없다. 어떤 픽션도 현실을 능가할 수 없다. 현실이 가장 비현실적이다. 아무리 상상력이 뛰어난 소설가도 상상할 수 없는, 상상하지 못할 일들이 현실 세상에서 일어난다. 뉴스가 소설을 압도한다. 아무리 기묘하고 환상적인 이야기도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비하면 심심하다. 소설을 읽을 수 없다.
② 산그늘 덤불 속에서 시신이 발견된다. 시신을 발견한 사람은 나무꾼. 몇 명의 목격자들이 이 사건에 대해 증언한다. 승려는 죽은 남자가 여자를 말에 태우고 가는 걸 보았다고 말한다. 다조마루라는 도둑을 붙잡은 이는 죽은 남자가 가지고 있던 화살을 근거로 도둑이 그 남자를 죽였을 거라고 증언한다. 여자도 그 도둑이 해치웠을 거라고 추측한다. 도둑인 다조마루는 자기가 남자를 죽였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여자는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여자를 차지할 마음을 품고 남자를 숲으로 유인해 사내의 목숨을 끊지 않고 여자를 손에 넣었으며 그때까지도 남자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데 여자가 두 사람 중에 누구든 죽어야 한다고, 자기는 누구든 살아남은 사내를 따르겠다고 했다고 말한다. 그래서 남자를 풀어주고 맞대결을 벌였다고, 스물세 합 째에 그 사내의 가슴을 찔렀다고, 그런데 결투가 끝나고 돌아보니 여자가 온데간데없었다고 말한다. 여자는 자기가 남편을 죽였다고 말한다. 도둑이 자기를 욕보이는 장면을 남편이 묶인 채 멸시하는 눈빛으로 차갑게 노려보았다고, 자기는 남편에게 부끄러운 꼴을 보였기 때문에 죽어야 했다고, 그 전에 남편을 죽였다고 말한다. 자기도 죽으려고 했는데 그럴 기력이 없어서 그러지 못했다고 말한다. 죽은 남자는 무녀의 입을 빌려 다르게 말한다. 도둑이 아내를 욕보이고는 자기의 아내가 되어달라고 요구했는데, 그때 아내가 어디든 데려가 달라고, 남편인 자기를 죽여 달라고, 그렇지 않으면 같이 갈 수 없다고 부르짖었다고 말한다. 그러자 도둑이 자기에게 저 여자를 죽여줄까 하고 물었다고, 자기가 대답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아내가 도망가자 도둑이 밧줄을 끊어주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아내가 떨어뜨리고 간 단도를 집어 자기 가슴을 찔렀다고 말한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소설 <덤불 속>의 내용이다. 남자를 죽인 사람은 누구인가. 사람들의 진술이 추가될 때마다 진실이 흐릿해진다. 죽은 사람은 있지만, 누가 죽였는지 오리무중이 된다. 말이 더해질수록 진실이 달아난다. 진실을 덮기 위해 말들을 쌓는 일도 일어난다. 증언이 쌓이면서 진실은 알 수 없는 것이 된다.
③ 공부를 많이 한 각 분야의 전문가들, 연구원들, 박사들, 대학의 교수들, 사법고시·행정고시·외무고시에 패스하거나 여러 고시에 동시 합격한 수재들, 신문사와 방송국에 근무하는 언론인들, 그리고 또 유능하고 바르고 자격을 갖춘 선량한 이들이 많이 있었다. 그들은 대통령 곁에 있었고, 대통령은 그들의 능력을 이용해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그 많은 유능하고 바르고 자격을 갖춘 선량한 이들을 가까이 부르지 않았다. 그 대신 유능하지도 바르지도 자격을 갖추지도 선량하지도 않은 사람들만을 불러 나라를 다스렸다. 유능하지도 바르지도 선량하지도 않은 그들은 나라를 자기들의 텃밭으로 만들었다.
대통령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이 없다. 대통령이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말하지 않는 한 알 수 없는데, 대통령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말하지 않을 것이고, 말하더라도 다르게 말할 것이고, 유능하지도 바르지도 않은 이들이 무슨 말인가 할 테지만, 그들 역시 다른 말을 하거나 여러 가지 말을 할 것이므로, 국민들은 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유능하고 바른 건축가와 학자들을 거느린 바빌로니아의 왕이 아니라 그저 사막을 가진 아랍의 왕이 승리한다는 보르헤스의 이야기를 곱씹으며 치욕과 모멸감과 울화와 슬픔 가운데서 술을 마실 것이다.
[이승우 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75호 (2016년 12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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