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는 니스다’라는 말

    입력 : 2016.08.05 17:51:35

  • 어떤 현상이나 사건을 접할 때 사람의 마음에서 어떤 느낌이나 기분이 일어난다. 그것을 감정이라고 한다. 가령 교통사고를 내고 뺑소니를 쳤다는 소식을 들으면 분노하게 되고, 카드빚에 내몰려 자살했다는 중년 가장의 소식을 들으면 안타까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분노나 안타까움만은 아니다. 분노 속에 슬픔이 들어 있기도 하고, 안타까움과 함께 죄책감을 느끼기도 한다. 특정한 현상이나 사건이 누구에게나 언제나 같은 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아니다. 같은 뺑소니나 자살 사건도 누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방법으로 행했느냐에 따라, 그리고 그 소식을 듣는 사람이 누구인지, 어떤 상황인지에 따라 반응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은 화를 내는데 어떤 사람은 안타까워한다. 입장과 처지, 상황과 세계관이 다르면 느끼는 감정과 반응도 다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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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건의 외부에서, 그러니까 구경꾼의 시각으로 벌어진 사건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을 내거나 반응을 보이는 것은 쉽고 편리하다. 그러나 자신이 그 사건의 당사자이거나 어떤 식으로든 그 사건에 관여된 인물이라고 가정하면 의견이나 반응을 내는 것이 그렇게 단순할 수 없다. 어떤 현상이나 사건에 내가 놓일 경우 어떤 행동을 할지는, 그 현상이나 사건에 실제로 맞닥뜨리기 전에는 확언할 수 없다. 자기에게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가정 아래 공언된 장담을 전적으로 믿을 수는 없다. 배가 고파서 이웃집 물건을 훔친 사람에 대해 도둑질은 나쁘다고 비난하는 것은 쉽고 간단하지만, 가족들이 굶고 있는 것을 보고 있을 수 없어 이웃집 담을 넘는 사람의 입장을 생각하고 ‘내가 그런 처지에 있다면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질문해 보는 것은 어렵고 복잡하다. 그럴 때 우리는 섣부른 감정적 반응을 자제하게 된다. 지나친 신중함일 수도 있고, 이런 신중함이 옳음과 그름, 의와 불의, 할 일과 하지 않을 일의 경계를 흐릿하게 하여 윤리적 혼돈을 부추길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에 대한 배려와 상황에 대한 이해를 통해 더 올바르고 의미 있는 선택을 하는 일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어떤 현상이나 사건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은 대개 피상적인 것이고, 외부에서 주입된 것이다. 그러니까 통념이고, 통념이 항상 그른 것은 아니지만, 개별 상황의 특수성을 염두에 두지 않았기 때문에 오류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보아야 한다. 진실은 통념에 갇힐 수 없는데, 그것은 진실이 추상적이거나 일반화된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개별적인 실재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한 가지 행위가 한 가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가지 행위가 한 가지 원인에서 비롯한다고 믿기 때문일 텐데, 이 생각만큼 위험하고 폭력적인 것은 없다. 행위는 그 행위자에 대해 많은 말을 하지만, 그러나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반지를 끼워주(는 행위를 하)면서 그 사람을 소유함으로써 얻을 이득을 계산하고, 반성의 말을 하고 눈물을 펑펑 쏟으면서 속으로 이를 가는 존재가 인간이다.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이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의 행위를 할 수 있고, 선하지 않으면서 선한 행위를 할 수 있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헤어지는 행위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물론 다는 아니겠지만, 단순히 핑계나 구실로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믿는다. 그것은 사랑하지 않으면서 사랑하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 것과 같은 근거에서다. 행위가 한 가지 원인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개인의 행위의 고유함을 인정하는 일이다. 이 사람의 이 행위는 다른 사람의 어떤 행위와도 같지 않은 유일한 행위이다. 역사 이래로 이 사람이 해온 것과 같은 행위를 해온 사람이 수도 없이 많지만, 이 행위를 인류에 의해 수없이 행해진 것과 동일한 것으로 환원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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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기를 행위자에게(행위자의 처지나 입장에) 대입해 보는 것이 즉각적이고 섣부른 반응으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일이다. 그것은 사건의 내부에 자기를 위치시키는 일이다. 행위자와 공감하고 이해하는 일이다. 그러면 멀리서 팔짱을 끼고 바라보기만 하는 외부자가 가질 수 없는 감정이 생기고, 당사자와 자기를 동일시하게 된다. 예컨대 “나는 샤를리이다”라고 말하게 되고, “나는 니스다”라고 선언하게 된다. 나는 남과 다른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구의역 사고의 그 19세 청년을 자기 아들이라고, 자기 친구, 자기 형이라고 선언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자기 아들이 아닌데 자기 아들처럼 느끼는 것이 가능하냐고, 그것이 위선이 아니냐고 묻는 사람은 사건의 내부에 자신의 자리를 놓아보지 않은 사람이다. 놓아볼 생각이 없는 사람이다. 절대로 놓아볼 수 없는 사람이다. 솔직하지 않느냐고? 때때로 사려 깊지 못한 사람이 솔직하다. 이 경우에는 솔직하다는 것이야말로 오만함이다. 아무리 더워도 외출할 때는 옷을 갖춰 입는 이유를 생각해 볼 일이다. 타인들의 시선으로부터 맨몸을 감출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것은 순진한 것이 아니고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오만이다.

    그런 사람에게까지 동일시해야 하지 않느냐고? 아마 그 사람이 동일시를 원치 않을 것이다. 하찮은 사람들이 특별한 신분인 자기와 동일시하는 것을 언짢아할 게 틀림없다.

    [이승우 작가]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71호 (2016년 08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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