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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선 교수의 중국문명 기행] (19) 만리장성에서 느끼는 운명과 슬픔
입력 : 2015.06.25 10:5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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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징기스칸릉에 있는 몽고군 조각, 고장성 유적1,2
청마 유치환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생명의 서>라는 시에서 이렇게 썼다.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케 될지니/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白骨)을/쪼이리라.”
청마가 ‘원시의 본연한 자태’라고 말한 것을 나는 만리장성에서 ‘생명의 윤리’라고 해석했다. 청마는 북만주로 이주해 살던 시기를 전후해서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강박관념에 계속 시달렸다. 자기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들여다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을 지속시키려는 이유와 의지를 확인하려고 몸부림쳤었다. 산 속에서 수천 년의 세월 동안 변함없이 수렵생활을 하며 생명을 지속시키고 있는 어떤 종류의 인간들이 가진 ‘생명의 의지’를, 아니 그러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인간들 속에 맥맥이 흐르고 있는 ‘생명의 의지’를 배워야만 자신이 살 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청마는 그러한 그의 생각을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砂丘)에 회한 없는 백골(白骨)을/쪼이리라”라는 강력한 의지로 표현했다.
만리장성에 앉아 지는 해를 바라보면서 나는 굽이치는 장대한 장성을, 폐허로 삭아 내리는 허망한 장성을 인간들이 표현해 놓은 삶의 몸부림, ‘생명의 의지’라고 읽고 있었다. 그러한 나의 머릿속에는 먹을 것과 여자를 찾아 말을 타고 남쪽의 농경민족을 향해 약탈에 나서는 유목민족들의 기마행렬이 떠오르고, 그러한 약탈로부터 자신의 식량과 여자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장성을 건설하는 농경민족의 모습이 떠올랐다. 가혹한 환경 때문에 자주 식량부족에 시달려야 했던 유목민족으로 태어난 사람들과 부지런히 일해도 자주 북쪽의 약탈자들에게 식량을 빼앗기던 농경민족으로 태어난 사람들을 상상하면서 자신이 태어난 장소가 부과한 회피할 수 없는 삶을 생각했다. 만리장성의 이쪽과 저쪽에서 벌어졌던 우리가 지금 ‘침략’ 혹은 ‘전쟁’이란 단어로 규정하는 생존의 드라마를 생각하면서 나는 인간의 운명에 대해 막막한 슬픔을 느꼈었다.
그리고 이러한 기록과 함께 “이 속담은 친분만 믿고 대비를 하지 않았다가 낭패를 보는 경우를 빗대어, 하룻밤을 자더라도 성을 쌓아 적에 대비하듯이 철저히 대비하여야 함을 강조하는 뜻으로 보인다.”고 해석해 놓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이 구전설화가 말해주는 것은 그런 교훈이 아니라 만리장성을 쌓는 일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 장성축조 공사에 끌려가면 살아서 돌아오기 어려울 정도로 힘든 일이었다는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만리장성 공사에 끌려간 남편을 찾아 나서는 ‘맹강녀 설화’가 생겨났을 것이고 이웃나라인 우리 한국에까지도 자신의 정조를 바치겠다는 약속까지 하면서 남편을 빼내려는 설화가 유포되었을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리장성을 진 시황이 만든 것이라 생각한다. 아마도 ‘진 시황의 만리장성’이란 말이 입에 익어서일 것이다. 우리가 ‘진 시황의 만리장성’이라 생각하면서 구경하는 만리장성은 기실 그 대부분이 진 시황 대의 장성이 아니다. 춘추전국시대에 북방의 흉노를 막기 위해 각 나라가 조금씩 건설해 놓았던 장성을 완전하게 연결시켜 만리장성으로 만든 사람은 물론 진 시황이지만 우리가 현재 눈으로 볼 수 있는 장성은 대부분이 명나라 때의 장성이다. 이 사실은 사람들이 자주 찾는 산해관 장성, 팔달령 장성, 거용관 장성 등이 모두 벽돌로 만들어진 드높은 장성이란 사실에서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진나라 때의 장성은 벽돌 장성이 아니라 황토로 만든 판축 장성이며 높이 역시 2~3m로 현재 우리가 보는 장성의 절반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판축장성은 나무판자 사이에 짚이나 갈대 등을 썰어 넣은 황토를 채워서 굳힌 성벽이며, 높게 축조하는데 일정한 한계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세월이 지나는 동안 형체조차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폐허화됐다. 또 진 시황의 만리장성은 현재의 장성보다 훨씬 북쪽에 있었으며 반드시 산맥을 따라 축조된 것도 아니었다. 대략 동에서 서로 일직선에 가깝게 축조된 것이 진 시황의 만리장성이었다. 이처럼 만리장성의 위치가 왕조에 따라 남북으로 이동하는 변화를 한 데는 그 기능에 대한 나름의 역사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만리장성을 보면서 아득한 고대에 우리 인간들이 이처럼 대단한 건축물을 세웠다는 사실에 감탄한다. 그리고 소수의 사람들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만리장성에서 시황제란 인물이 휘둘렀던 권력이 얼마나 광포하고 절대적이었는지를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상식적으로 ‘진 시황의 만리장성’이라고 말하는 이면에는 시황제란 한 개인의 의지나 그가 장악한 강대한 권력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수십만 명의 목숨을 희생해 가면서도 끔찍하고 엄청난 공사를 감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절박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 사실을 우리는 춘추전국시대에 조나라의 무령왕(武靈王)이 ‘호복기사(胡服騎射)를 주장한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다. 북방의 유목민족처럼 기마에 적합한 방식으로 옷차림과 군대조직을 바꾸지 않는 한 그는 유목민족과의 전쟁에서 도저히 이길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듯 만리장성은 어느 날 우연히 만들어진 건축물이 아니다. 만리장성을 축조한 것은 농경민족인 한족이며, 그 기능은 밖을 향한 공격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을 향한 수비에 있었다. 만리장성을 중화세계와 야만적인 오랑캐의 세계를 구별 짓는 경계선, 혹은 국경선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은 후대의 일이고 만리장성의 일차적이고 본질적인 기능은 유목민족의 기마부대를 저지하는 데에 있었다. 만리장성을 만든 이유는 농경민족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절박한 현실에 있었던 것이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7호(2015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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