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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우의 어떤 생각] 한 오멜 Omer의 만나 Manna
입력 : 2015.06.25 10:5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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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카프카의 <단식 광대>라는 단편소설에는 밥을 굶는 것을 보여 주는 사람이 등장한다. 그가 살던 20세기 초 프라하의 서커스단에 실제로 그런 사람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만큼 특이한 용모를 가진 사람은 아마 있었을 것이다.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 나오는 대로 우리의 서커스단에도 그런 사람은 있었다. 그러나 밥을 굶는 것이 무슨 볼거리가 된다고 서커스 무대에 섰을까 싶다. 그러니까 카프카의 단편 소설에 이런 사람이 나오는 것은 매우 이색적이라고 할 수 있다. 서커스 무대에 등장하는 사람은 평범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특별한 재능을 가졌거나 보통 사람들이 하기 어려운 묘기를 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카프카가 서커스 무대에 이 사람을 올린 것은, 밥을 굶는 일이 다른 서커스 단원이 하는 묘기 못지않게 특별한 재능이거나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묘기로 간주했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런 생각은 먹을 것이 지나치게 많고 다양해진 오늘날 특히 적절한 것 같다. 이런저런 먹을 것이 넘쳐나는 오늘날은 음식을 먹지 않고 굶기가 한층 어려워진 시대이기 때문이다.
카프카의 단식 광대는 왜 아무것도 먹지 않는가? 그의 대답은 이렇다. “나는 단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어. 왜냐하면 내 입에 맞는 음식이 없었기 때문이야.”
자본주의가 차려준 맛있고 풍성하고 화려한 식탁 앞에서 매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현대인은 이 말을 이해하기 어렵다. 자본주의 사회의 식당은 끊임없이 새롭고 근사한 음식들을 내놓는다. 차려진 음식을 다 맛보기 전에 새로운 요리가 식탁에 오른다. 어린 시절에 먹을 것이 별로 없었고, 있더라도 종류가 한정적이어서, 가령 고구마나 감자나 수제비 같은 것을 물릴 때까지 먹어야 했던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그러나 요즘은 물릴 틈을 주지 않을 만큼 먹을 게 많아졌다. 자본주의 사회는 수시로 신상품을 내놓고 소비를 부추기고 욕망을 개발하고 필요를 창출한다. 더 하라고 하고, 더 가지라고 하고, 더 즐기라고 하고 더 출세하라고 한다.
카프카 식으로 말하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거대한 서커스 무대와 같다. 우리는 서커스를 구경하는 자이면서 동시에 서커스 무대에 서서 기예를 펼치는 자들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펼쳐 보여주는 것을 구경하고, 그러면서 동시에 내가 가진 것을 남에게 펼쳐 보여주려고 애쓴다. 세상은 우리에게 더 하는 것을, 더 가진 것을, 더 즐기는 것을, 더 출세하는 것을 보여주라고 한다. 옷으로, 몸으로, 자동차로, SNS로 전시하라고 부추긴다. 현대인이 있는 모든 곳이, 심지어 가상공간까지 포함해서 ‘하는 것을 보여주는’ 서커스 무대로 바뀌었다.
우리는 때때로 우리가 한 것을 보여줄 뿐 아니라 보여주기 위해, 오직 그것만을 위해 무언가를 하기도 한다. 예컨대 블로그에 글을 게시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여행을 가거나 어떤 음식을 먹기도 한다.
가진(있는) 것을 보여주고, 심지어 보여주기 위해 가지기도 하니까 가진 것이 보여지지 않을 수는 없고, 그러므로 보여지지 않은 것은 가진(있는) 것이라고 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은연중에 퍼져 있다. 전시가 삶이 되었다. 가진 것을 전시하고 전시하기 위해 가지려 한다. 더 잘 전시하기 위해 더 가지려 한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광야를 헤매 다닐 때 하늘에서 만나(Manna;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았던 특별한 양식. 일명 하늘 양식)가 내려와 먹게 했다는 기록이 구약성경에 나온다. 여호와는 아침 일찍 나가서 한 사람이 한 오멜(Omer; 건조된 물건을 재는 단위. 약 2ℓ)씩 거두라고 지시했다. 그런데 부지런하거나 욕심이 있거나 걱정이 많은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일찍 나가 한 오멜보다 더 거뒀다. 자기가 돌볼 가족들을 생각하고 다음 날을 위해 남겨두기도 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성경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고,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았다.”
다음 날을 위해 남겨둔 것은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서 먹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신적 통치라는 강력한 시스템이 작동하던 시대에 일어났다. 그러니까 이런 평등,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나 똑같아지는 (지금의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신기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일이 가능했다. 그러나 무한 경쟁, 욕망이 무한대로 증폭된 자본주의 세계에서는 그런 신적 통치를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 시스템을 국가나 시장이나 경제 제도에 기대하지만, 마땅히 그래야 하지만, 욕망을 극한대로 끌어올리는 자본주의 체제의 속성이 그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오히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간극이 넓어지고 신분과 계층이 굳어지는 식으로 악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서커스단의 광대들은 보통 사람들이 하지 않거나 하지 못하거나 할 필요가 없는 묘기를 하는 것을 보여주는 사람들이다. 보여주기 위해 보통 사람들이 하지 않거나 하지 못하거나 할 필요가 없는 묘기를 하는 사람들이다. 필요한 것 이상을 가지려 하고 필요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고 필요하지도 않은 것을 욕심내는 우리는 서커스 광대와 얼마나 다른지 물어볼 일이다.
톨스토이는 “사람에게는 얼마만 한 땅이 필요한가 ”라고 물었다. 해가 지기 전에 발로 밟는 모든 땅을 다 주겠다는 말을 듣고 욕심껏 멀리까지 나갔다가 해가 지는 것을 보고 허겁지겁 달려와 쓰러진 사람을 위해 필요한 땅은 그 사람 키만 한 넓이였다. 우리에게 하루에 필요한 것은 한 오멜이라고 저 광야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록은 전한다. 물론 상징적인 이야기다. 그렇지만 해가 지는 걸 생각하지 않고 마구 달려 나가기만 하는 우리의 지나친 탐욕을 향해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필요하고 중요한 일인 것 같다. 혹시 우리는 너무 많이 가지려 하지 않는가. 우리는 지나치게 하려고 하지 않는가. 우리는 너무 살려고 하지 않는가.
이승우 작가 1959년 전라남도 장흥에서 태어났다. 1981년 한국문학 신인상에 <에리직톤의 초상>이 당선되며 등단했고, 소설집 <구평목씨의 바퀴벌레>, <일식에 대하여>, <미궁에 대한 추측>, <목련공원>, <사람들은 자기 집에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다>, <오래된 일기>, 장편소설 <내 안에 또 누가 있나>, <식물들의 사생활>, <생의 이면>, <그곳이 어디든>, <한낮의 시선>, <지상의 노래> 등을 발표했다. 대산문학상, 황순원문학상,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7호(2015년 06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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