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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선 교수의 중국문명 기행] (17) 역사에는 선한 의지가 있는 것인가
입력 : 2015.04.17 14:4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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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승환 조각
원숭환 초상
충신 원숭환은 명나라 숭정(崇禎) 3년 가을, 서력기원으로는 1630년 음력 8월 16일에 베이징의 시스파이로우(西四牌樓)에서 책형(磔刑)을 당해 죽었다. 책형은 세간에서 천도만화(千刀萬禍)라고 부르는, 사람의 살을 한 점 한 점 포를 떠서 죽이는, 상상하기조차도 끔찍한 형벌이다. 그런데 충신 원숭환이 바로 이 끔직한 형벌을 당해 죽었다. 그것도 3일에 걸쳐 3600번의 칼질을 통해 죽이는, 사람의 짓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처참하고 기가 막혀서 말문이 막히는 방법으로 죽임을 당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원숭환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동안 길거리에 늘어선 수많은 사람들은 욕을 하고, 돌을 던지고, 심지어는 그를 죽이려고 달려들어 물어뜯거나 칼을 휘두르는 사람까지 있었다. 당시의 사실을 기록한 <명계북략(明季北略)>이란 책은 형장에 나온 사람들이 원숭환에 대한 분노의 감정이 얼마나 극렬했는지를 보여준다. 여기엔 살을 도려내는 망나니로부터 “은전 하나로 손가락만한 크기의 살점을 사서, 침을 뱉고 한바탕 욕을 하며 먹었다. 원숭환의 살점은 다 팔렸다”라는 기록이 담겨 있다. 만고의 충신 원숭환이 어떻게 이런 지경이 된 것일까. 충신을 매국노로 둔갑시킨 타락한 정치에 대한 혐오감과 인간본성의 잔혹함에 대해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는, 다시 하늘을 쳐다보기가 부끄러운 장면인 것이다. 원숭환은 1584년에 광둥성(廣東省) 둥관(東筦)에서 태어나 만력제(萬歷帝) 시절에 진사시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었다. 당시의 명나라는 내부적으로는 무능한 황제와 타락한 환관 위충현(魏忠顯)을 비롯한 간신들의 국정농단, 이자성의 난으로 대변되는 빈농들의 봉기로 어지러웠으며, 외부적으로는 만주족의 침입 앞에서 연전연패함으로 말미암아 망국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였던 1622년, 천계제(天啓帝) 2년에 원숭환은 과감히 홀로 만주족의 침략이 빈번한 변방을 찾아 상황을 정밀하게 조사한 후 자청해서 요동지방을 지키는 책임자로 부임했다. 그리고는 현재의 영원에 견고한 성을 쌓고 포르투갈제 대포를 배치하여 누루하치와 맞섰다. 그 결과 1666년 영원대첩에서 만주족의 대군에 맞서 대승을 거두고 누루하치에게 부상을 입혀서 죽게 만드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왼쪽부터) 원숭환 묘비와 묘지
그래서 둥화스시에지에(東花市斜街)에 있는, 중학교 운동장의 끄트머리에 자리 잡고 있는 원숭환의 묘지를 찾아가는 나의 발걸음은 무겁고 머리는 복잡했다. 원숭환이란 올곧고 선량한 충신에게 가해진 가혹한 운명과, 그에게 우리 인간들이 저지른 만행과, 그를 기억하는 방식의 초라함 때문에도 그랬지만, 원숭환의 무덤을 지키기 위해 누대에 걸쳐 숨어 살아야 했던 사(舍)씨 집안의 기구한 인생역정 때문에 더욱 그랬다.
원숭환 대장군의 충직한 부하였던 한 사람, 그의 본명을 자신이 철저히 지워버렸기 때문에 현재 우리가 사시로만 기억하게 된 그 사람은 원숭환이 숨을 거두고 머리가 장대에 높이 걸린 그날 밤에 몰래 효수된 머리를 훔쳤다. 그리고는 벼슬을 버리고 이름을 바꾸면서 세상에서 철저하게 숨어버렸다. 그는 원숭환의 무덤을 숨기기 위해 고향의 모든 재산을 정리해서 광둥의원(廣東義園)이란 공동묘지를 만들고, 일족이 몰살당한 까닭에 원씨의 후손 노릇까지 대신하면서 조용히 숨어 살았다. 그 자신만이 그렇게 산 것이 아니라 후손들 역시 그렇게 살도록 엄하게 당부했다. 그의 유언은 자신의 무덤을 원숭환 대장군의 동반자가 되도록 옆에 만들라는 것과, 대가 끊긴 원시 집안을 대신해서 사씨 집안에서 제사를 지내고 무덤을 지키라는 것과, 그러기 위해 사씨 집안은 앞으로 영원히 관직에 오르지 말라는 것, 이렇게 세 가지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사씨의 후손들은 유언을 지켜 누구도 벼슬을 하지 않았으며 정치의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원숭환의 무덤을 둘러보며 사씨의 삶이 보여주는 거룩한 면모 때문에 원숭환을 죽인 금수와 같은 인간들의 행태에서 느꼈던 인간에 대한 모멸과 자괴감을 그나마 조금 덜어내고 가슴을 옥죄어 오던 답답함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원숭환의 억울한 죽음을 바로잡아 충신으로 다시 복권시켜 준 사람은 역설적이게도 청나라의 건륭제였다. 이민족이 세운 청나라의 황제가, 그것도 자기 왕조의 시조인 태조 누루하치를 죽게 만들었고 할아버지에 해당하는 태종 황태극이 간계를 써서 제거했던 사람을 다시 충신의 지위로 복권시켜 사람들이 그 충절을 기릴 수 있게 만들어 준 것이다. 이 건륭제의 대범함으로 말미암아 사씨가 몰래 훔쳐서 자기 집 뒷마당에 묻어두었던 원숭환의 머리는 155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비로소 무덤다운 무덤에 안치될 수 있었으며 그를 기리는 사당도 건립될 수 있었다.
현재의 베이징은 옛날과 많이 달라졌지만 원숭환의 무덤이 속했던, ‘광둥구원(廣東舊園)’이라 부르는 묘역에는 그의 한스러운 죽음과 그럼에도 그 죽음을 올바르게 바로잡아 기리지 못한 세월을 안타까워한 옛 시 한 편이 남아 있다. 잠시 대강의 뜻을 옮겨보면 “제사를 지켜 천고의 절개를 지키지 못하니/싸매어진 주검들이 구변(九邊)을 기록했을 뿐이라/ 곤궁한 처지는 서로가 친분을 나누는 것 같도다/큰 돌에는 어느 때야 비문을 새기며/들풀은 내버려져 봄도 모르지만/장군의 맑은 눈물이 대장부를 울게 하는구나” 이런 내용이다. 역사가 그의 죽음을 올바르게 평가해주지 못하고 후인들이 그를 제대로 기리지 못하는 사실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 시 속에 절절하게 담겨 있다.
나는 원숭환의 생애와 그의 처참한 죽음과 후세 사람들이 그를 기억하는 방식을 생각하며 대학 1학년 때 부딪쳤던 ‘역사란 무엇인가, 역사는 도대체 어떤 쓸모가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을 새삼스럽게 떠올렸다. 역사의 흐름에는 진정 선한 의지가 깔려 있다는 확신을 나는 아직까지 갖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원숭환과 그의 머리를 지키기 위해 사씨가 감내해야 했던 가혹한 운명은 역사의 선한 의지에 대한 나의 의문을 더 심하게 증폭시켰다.
이런 점에서 내가 중국을 열심히 돌아다니는 것은, 중국에서도 굳이 일반 관광객이 찾지 않는 역사의 오지만 골라서 돌아다니는 것은 어쩌면 역사에 대한 나의 근원적인 질문 때문인지도 모른다. 중국을 돌아다니는 나의 발길에는 어떤 명확한 답을 찾아낼 수 없는 질문이란 것을 알면서도 역사의 선한 의지에 대해 어떤 단서, 어떤 느낌만이라도 얻기를 바라는 갈망이 담겨 있는 까닭이다. 그러나 여전히 오늘의 우리 정치에서 보듯 인간들의 이기적 탐욕은 끝이 없고 나는 어쩔 수 없이 운명처럼 과거를 답사하며 커다란 절망과 작은 희망을 얻는다.
[본 기사는 매일경제 Luxmen 제55호(2015년 04월)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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